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Feb 29. 2024

영화 이야기 <콜래트럴>

이것은 죽음의 신과 함께 보낸 밤의 기록이다.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전자가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다신교의 신이라면 후자는 기독교와 같은 유일교의 신이다. 이 영화에서 맥스가 차에 태운 신은 얼핏 전자처럼 보인다. 그는 잘생기고 언변이 뛰어난 신사이면서 원한다면 누구의 목숨이라도 가져갈 수 있는 전능함까지 갖췄다. 게다가 그가 밤새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살인을 하는 이유는 상대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청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청부의 대가는 아마도 돈일 것이므로 이 신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살인을 한다. 영락없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신은 유일교의 신이다. 신의 이름은 인간이 짓는다. 그러니 신은 스스로 정의하지 않고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따라 판단된다. 말하자면 빈센트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빈센트는 맥스를 어떻게 변화시켰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본다면 스릴러에 가까운데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성격상으로 봤을 때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보다는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에 가깝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얼굴이 변한다는 것이다. <페이스 오프>에서 숀은 얼굴을 잃어버리면서 자신의 삶도 잃어버리지만 나중에 얼굴을 되찾고 무사히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조커>의 아서는 분장을 지운 후에도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콜래트럴>은 <페이스 오프>처럼 얼굴을 훔치거나 <조커>처럼 분장을 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서 맥스의 얼굴은 끊임없이 변한다. 처음 애니를 태웠을 때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꿈에 쫓기지 않는 여유를 가진 남자로 보이지만 빈센트가 첫 살인을 한 직후에는 겁에 질려 영혼까지 빼앗긴 노예가 되었다가 빈센트의 가방을 도로에 던질 때는 신에게 도전하는 투사로도 변한다. 심지어 살인자 명단을 찾기 위해 빈센트를 대리해서 고용주를 만나러 갔을 때는 경찰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살인청부범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그의 진짜 얼굴인가가 아니라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원래 얼굴로 되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점이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뭉그러뜨리면 삶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성질의 길항작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안정성과 향상성이다. 안정성은 삶이 흔들리지 않게 무게중심을 잡아주고 향상성은 삶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한다. 이 두 가지 성질이 균형을 이루면 흔들림없이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있겠지만 이건 이상론에 가깝고 실제로 삶은 안정성과 향상성의 끝없는 영토 싸움이다. 안정성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면 삶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진다. 이 견고함은 어지간한 일에도 끄떡없는 갑옷이 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지고 생명력을 잃는다. 관점에 녹이 슬어 유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는 석상이 되어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향상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커지면 삶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는다. 두려움이 줄어들고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점점 딛고 선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환희는 현기증으로 바뀐다. 몸이 함께 가지 않는 영혼의 상승은 신이 아니라 귀신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자유는 부유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안정성은 타나토스이고 향상성은 에로스이다. 어느 한 쪽이든 극에 달하는 순간 삶은 상실된다. <조커>의 아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페이스 오프>의 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얼굴을 잃고 가족과 삶을 잃는 대격변 끝에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원래의 삶으로 고스란히 복귀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맥스는 어떤가. 그는 리무진 개인 사업을 꿈꾸고 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일이라곤 시간이 날 때 자동차 팜플렛을 돌려보는 것이 고작이다. 12년 동안 택시를 몰고 있으면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잠깐 하는 임시직이라고 말하는 것도 허세처럼 보인다. 사치스러운 성격은 아니지만 돈을 얼마나 모았는지도 알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보다는 그 꿈 자체에서 살아가는 것을 더 즐기는 인물이다. 선바이저에 몰디브의 사진을 꽂아두고 복잡한 일이 생길 때마다 가끔씩 쳐다보는 맥스의 모습은 혁명가라기보다는 몽상가에 가깝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몰디브의 사진을 주는 것은 다음 만남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이 만남을 현실에서 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작업이다. 실제로 애니로부터 명함을 받자 그는 그것을 지갑이 아니라 선바이저에 끼운다. 맥스에게 애니는 현실의 여성이 아니라 몰디브를 대체하는 몽상의 휴양지인 셈이다.


맥스는 본인이 꿈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 꿈을 향해 한 걸음도 옮기지 않는다. 하루 종일 달리지만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택시와도 같다. 이때 빈센트가 나타난다. 맥스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차 안에서 자동차 팜플릿을 보다가 느닷없이 자동차 위로 떨어진 시체를 본 이후다. 비유하자면 빈센트라는 죽음의 신은 맥스가 꾸던 꿈의 천장을 뚫고 강림한 것이다. 택시기사로 살아도 이상을 품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던 여유는 꿈의 천장이 찍어진 직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맥스의 민낯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공포와 두려움 앞에 저항하지 못하고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은 상대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는 운전수의 얼굴이다. 


실제로 맥스는 지금까지 손님을 싣고 달렸을 뿐 한 번도 자기가 가려는 곳으로 엑셀을 밟은 적이 없다. 운전대를 잡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이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택시의 주인은 운전수가 아니라 고객이다. 말하자면 맥스는 운전수인 척했던 게 아니라 실제로 운전수였던 것이다. 빈센트가 죽음의 신인 이유는 그가 죽음을 부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면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라틴어 격언인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이 말이 격언인 이유는 죽음을 떠올릴 때 바로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빈센트에 대한 맥스의 두려움은 일종의 자기 혐오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빈센트라는 존재가 맥스에게 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무력함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숭고한 이유는 그것이 죽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복수극과 마찬가지다. 현재의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 한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빈센트를 마주한 맥스는 깨닫는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꿔말하면 그가 이상과 꿈이라고 믿었던 것은 몽상이었고 이 몽상은 스스로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의 반영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연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연민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지 않는다. 빈센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맥스는 어머니를 만난 뒤 처음으로 빈센트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그의 마지막 목표가 애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빈센트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이 변화를 몰고 온 것은 어머니와 애니이고, 그들은 맥스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 소중한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한 번쯤 묻게 된다. 사랑과 연민은 어떻게 다른가. 연민은 분명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기준점은 무엇인가.


나는 이 기준점을 빈센트에서 찾는다. 연민은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연민은 죽어가는 것에 대한 연민이기 때문이다. 맥스가 운전하는 때때로 몰디브의 사진을 쳐다본 것은 그의 삶이 죽어간다고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거꾸로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다름 아닌 우리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낄 때다. 맥스에게 있어 그 누군가는 병실에서 하루종일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이거나 자기가 아니면 빈센트에게 죽을 운명에 처한 애니였다. 다시 말해 맥스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할 때는 노예가 되었으나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 할 때 전사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연민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바로 타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능력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죽어가는 삶에 연민을 느끼던 맥스로 하여금 사랑의 능력을 계발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죽음의 신을 유일교의 신으로 여긴다. 표면적으로 그는 청부살해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살인의 대가로 그가 무엇을 얻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사람을 죽일수록 변화하는 것은 맥스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맥스의 총을 맞고 의자에 앉는 모습은 패배자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할 일을 모두 마친 자의 안식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원래 있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간 사람은 맥스 밖에 없다. 원래 유일교의 신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인간은 도착하고 싶었던 곳에 도착한다.


영화의 제목인 콜래트럴은 담보라는 뜻이다. 우리가 담보를 맡기는 이유는 무언가를 빌려 삶을 보다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은행은 어떤 경우에도 빌려주는 것보다 가치가 낮은 것을 담보로 받지 않는다. 맥스가 처음 빈센트의 말을 따랐던 것은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고서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담보로 잡힌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누구나 그렇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도권을 넘겨준다면 언젠가는 저당잡힌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삶은 남은 것이 아니라 가져간 쪽에 있기 때문이다.



2024년 2월 26일부터 2024년 2월 28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테넷>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