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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22. 2024

영화 이야기 <테넷>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이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가능할까.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선을 잡아채는 화려한 먹이는 때론 미끼일 수도 있다. 놀란 감독이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는 건 <인셉션>과 <인터스텔라>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리학의 부흥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영화가 감독 예술이라면 <테넷>에서도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물리가 아니라 사람이다. 물리라는 휘장을 걷어내면 <테넷>의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적이 있고 그 적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이 있다. 늘씬한 미녀와 명품 정장, 고급 승용차는 덤이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적의 정체는 바로 미래의 인류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술, 인버전이 발명된 미래의 어느 시대에 해수면은 말라붙었고 태양은 뜨겁다. 기술은 있지만 행성은 죽어간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난 것과 대조적으로 <테넷>의 미래인은 새로운 행성을 찾는 대신 행성을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거하려고 한다. 바로 과거의 인류 말이다. 과거의 인류는 미래인의 조상이므로 과거의 인류를 멸망시키면 미래인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가 한 번 시작된 핵폭발이 지구의 모든 산소를 연소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처럼. 그러나 미래인의 권력자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지나가는 장면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문제를 없애기 위한 수단이 문제만이 아니라 나까지 없앨 수도 있다는 위험성. 이것은 놀란 감독의 거의 모든 필모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고담을 보호하기 위해 기댄 배트맨은 조커를 낳았고, 조커를 불러들인 마피아는 몰살당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의 꿈에 들어간 코브는 영원히 무의식에서 나오지 못할 뻔하고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찾아 떠난 쿠퍼는 블랙홀에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방법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내모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시도가 나를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밀어넣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기존의 삶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으로 나를 이끈 것 역시 그 못지 않은 사실이다. 인셉션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코브는 영원한 수배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고 쿠퍼 역시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지 않았다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있었겠지만 지구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을 테니까. 다만 나는 여기서 문제를 방치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는 보편적 진리를 반복하려는 게 아니다. <테넷> 이전까지 놀란 감독의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다 새로운 문제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항상 주인공들이었다. 그런데 <테넷>은 다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적이고, 문제가 닥쳤을 때 삶을 포기하는 것은 주인공이다.


<테넷>의 포문을 여는 것은 오케스트라 공연장을 습격한 테러리스트의 총구다. CIA 소속인 주인공은 테러리스트 진압반에 잠입해 거래 대상인 플루토늄을 탈취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붙잡힌다. 계속되는 고문에 지친 주인공은 동료가 몰래 건넨 약을 먹고 자살한다. 고통에 못이겨 기밀을 발설할 경우 조직이 위험해진다는 게 이 죽음의 명분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 신 대신 직장상사가 말한다. “테스트였어.” 말하자면 주인공의 삶과 죽음은 모두 조직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셈이다. 


늙어서 죽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 그것이 무엇이건 사람은 자신만의 이유를 갖게 마련이다. 주인공의 경우라면 버틸 수 있는 고통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지나 기밀을 발설하면 조직이 위험해지므로 차라리 스스로를 희생하자는 게 그 이유였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 자신보다 조직을 우선시했다. 한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것 중에 자기 목숨보다 무거운 것은 없으니까. 그런데 조직은 그가 내놓은 목숨을 ‘테스트’했다.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지 한 번 시험해 본 것이다. 이후에 임무를 맡기는 방식 역시 그렇다. “냉전이 한창이야”라든가 “이건 국익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이 걸린 문제” 라는 말에는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조직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러니 주인공이 희생했던 삶은 주인공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의 것이다.


주인공이 문제 앞에서 삶을 포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숭고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주인공이 속한 조직은 애초에 조직원을 소모해 가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직의 수장은 불 속에 뛰어들겠다는 자들도 막상 열기를 느끼면 흔들린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불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제안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 있고 그대로 놔두면 우리는 멸망한다. 너는 싸울텐가? 국가가 인류로 바뀌었지만 소모당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프롤로그의 죽음이 알려준 것은 타인의 의도에 복무하는 삶은 자신의 원래 소속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은 모양의 삶이 주어진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테넷>의 본편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멸망당하는 인류에는 당연히 주인공도 포함된다. 그러니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 소모되는 일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프롤로그에서도 주인공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선택은 조직의 테스트에 이용되었다. 올바른 동기가 반드시 올바른 목적에 사용되지는 않는다. 바다로 나아간다는 결심은 개인의 것이지만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배의 선장이다. 플루토늄 탈취 작전에서 주인공은 남의 배에 타 있었고 버려졌다. 그렇다면 인류를 지켜내는 작전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스스로의 배로 항해할 것인가.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라면 주인공은 이미 갖출만큼 갖췄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의지보다 강한 의지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여기에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삶이 경험과 의지의 문제라면 두 번째 생은 전보다 수월할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적의 정체를 확인하고 접근해가는 과정을 보면 프롤로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무지하고 조직의 지시를 받아서만 움직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만 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도착한 곳에서 만난 인물들이 방향을 알려주면 그 방향을 열심히 좇아만 가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방향이 최초로 어긋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사토르의 아내, 캣을 만난 이후이다.


주인공은 프리야로부터 플루토늄을 재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캣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토르에게 플루토늄을 넘긴다. 나중에 알고리즘으로 밝혀지는 이 플루토늄은 미래의 적이 현재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의 마지막 조각으로서 조직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코 넘기지 말았어야 할 물건이었다. 즉 주인공은 캣이라는 한 명의 여자와 전인류를 저울에 올려놓고 전자가 더 기울었다는 판정을 내린 셈이다. 사랑에 빠진 남자라고 생각하면 흔한 전개지만 이 결정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주인공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캣을 위한 결정이 아니다. 어떤 오류에 직면하더라도 저 여자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생각해보면 주인공은 너무나 충실한 조직원이었다. 그에게는 내면이라는 게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의 내면에 있는 것은 조직이거나 국가와 같은 큰 이야기들뿐이고 그는 이 큰 이야기의 조연으로 살아가는데 온 힘을 다했다. 조직의 수장은 테스트에 합격한 자는 거의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내면에 국가나 조직 같은 큰 이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취미 혹은 갚아야 할 빚 따위의 작은 이야기를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자살할 리가 없으니까. 말하자면 주인공은 전체라는 기계의 가장 정교한 부품이었다. 그러나 캣이라는, 인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작은 이야기가 그로 하여금 톱니를 마모시키게 만들었다.


전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배가 아니라 자신의 배로 항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캣과 만나기 전이나 후나 조직을 보호하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운다는 주인공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캣과 만나기 이전에 그가 싸우던 방식이 조직의 지시를 받고 이행하는, 말하자면 남의 배의 유능한 선원이었다면 캣을 살리기 위해 플루토늄을 넘겨준 이후부터 그는 조직의 지시가 아닌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작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배의 선장이 된 것이다.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대전제는 동일하다. 인류와 국가를 위협에서 지킨다. 차이는 집단의 배를 타고 가느냐 자신의 배로 가느냐일뿐이다. 그러나 이 차이가 중요하다. <테넷>은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조직과 국가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숭고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이상이 아니라 방법이다. 전체주의가 위험한 것은 전체가 위험해서가 아니라 전체로 향하는 항로를 하나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바다의 끝은 넓고 항로는 무궁하다. 그러나 그 항로를 제한할 때 그리고 제한권을 소수가 독점하기 시작할 때 계급과 차별, 권력과 폭력이 나타난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안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소중한 작은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테넷>의 물리학인지 판타지인지 경계가 모호한 어지러운 시간 관념을 일종의 상대성으로 읽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정방향으로 나아갈 때 누군가는 역방향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전진과 후퇴가 아니다. 같은 역에 서 있는 두 대의 지하철이 움직이면 우리는 자신이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 일순간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두 대의 지하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각각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시퀀스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개의 부대는 서로 다른 시간으로 전진하고 그로 인해 한쪽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때 다른 부대는 되돌아가는 걸로 보인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두 개의 부대가 각각 현재와 과거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도착해야 할 곳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다. 그러니까 일방一方이 아니다. 이상은 품이 넓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만 똑바로 알고 있다면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우리는 도착해야 할 곳에 도착할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앞서 나가고 누군가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각자의 작은 이야기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지 앞지르거나 뒤쳐지는 게 아니다. 나는 물리에 무지하므로 <테넷>의 어지러운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테넷>은 품이 넓다. 거기에는 이 이야기가 도착할 장소도 있을 것이다.



2024년 2월 9일부터 2024년 2월 22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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