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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08. 2024

영화 이야기 <인터스텔라>

포스터에 있는 대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답을 찾은 적이 있던가. 어찌어찌해서 자기도 모르게 도착한 곳을 이제 더 방향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답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마침표를 찍지 못한 주관식의 답을 종이 울려서 제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제출한 답안지에는 끝까지 쓰지 못했으므로 완전한 답이 아님은 알지만 그래도 주관식이기에 부분 점수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게 답이 아닌 줄 너도 알잖아”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라고 머쓱하게 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 역시 마땅한 답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껏 내렸던 답 중에는 확실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채점을 해보지 않아도 이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답들도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그게 과연 정답이었을까 하는 질문으로 바뀌고 만다. 그때 오답을 썼던 것은 아니다. 단지 답을 제출해야만 했던 상황이 인생 전체라는 맥락에서 전혀 다른 위치로 옮겨간 것뿐이다. 그러니 그때 제출한 답이 시간이 지나 오답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우리의 탓인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떳떳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었잖아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알게 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런 와중에도 답을 내야 하는 순간은 다시 온다. 반추할 과거가 없었던 시절과 지금의 차이점은 단지 망설임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며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정말 답을 찾은 걸까. 아니 앞으로도 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영화의 주인공을 보면 그다지 믿음이 생기지도 않는다. 쿠퍼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우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끝내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찾지 못하고 별과 별 사이를 영원처럼 방랑한다. 물론 그의 여정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블랙홀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머피에게 중력방정식을 풀 수 있는 힌트를 주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우주로 솟아오르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원했던 것이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딸과 함께 하는 미래라면 그가 틀렸다는 사실은 여지없다. 마지막에 그가 마주한 것은 지구에 남겨두고 온 어린 딸이 아니라 어느새 자기보다 새하얗게 늙어버린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퍼의 여정을 실패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NASA의 우주정거장이 무사히 토성으로 쏘아올려져 인류가 멸망 위기에서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정의 모습이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순간이 있음에도 그것이 곧 원했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쿠퍼의 여정을 실패라고 말하는 순간 어쩐지 우리의 인생이 실패라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 웜홀을 통과해 블랙홀로 추락하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다. 단지 생의 어느 순간 필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원치 않은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럴지는 모르지만 이 영화 속에서 시간은 중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흐른다. 가령 밀러 행성의 경우 이곳에서 보내는 1시간이 지구의 시간으로 7년이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약 6만 배다. 쿠퍼 일행은 거대한 해일에 휩싸여 모함으로 복귀하는데 거의 3시간 정도를 쓰게 되고 그 결과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지나가 버린다. 늙어버린 로밀리와 지구에서 전송된 영상 속 성인이 된 아들과 딸의 모습은 그 23년이 단지 숫자가 아님을 웅변한다. 시간의 속도가 6만 배 차이가 난다는 건 바꿔 말하면 시간의 가치가 6만 배라는 뜻이다. 6만 배라는 환율을 감수하고도 밀러 행성의 시간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은 어쩌면 그곳에 가족과 인류의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은 실패했고 시간은 정확하게 비용을 산정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장면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속담의 주인공은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필사적이었다. 속담의 주인공은 신계의 시간이 인간계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을 몰랐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보내는 1분 1초가 지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속담은 교훈을 주지만 영화는 교훈을 주지 못한다. 속담은 네가 모르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눈을 팔다보면 어느새 너의 소중한 것들은 사라지고 말 거라고 경고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모르는 게 없었다. 쿠퍼는 밀러 행성의 시간이 지구보다 훨씬 느리게 간다는 것을 알았고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만큼 지구의 시간이 줄어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가야만 했던 것뿐이다. 쿠퍼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앎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였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것이 정답이 아님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는 써야하고 제출시간은 똑딱거리면서 임박해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문장을 쓰는 것뿐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고 혹은 어떤 식으로든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고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도 꽤 괜찮은 답을 써냈다고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삶이 제출하는 문제는 늘 새롭다. 과거의 것과 닮은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조차도 그때의 답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오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답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과거에서 답을 찾을 때 답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늘 실패했었다는 기억이다.


그러나 실패의 연속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답을 써왔다는 말이다. 무수한 오답은 무수한 시험에 응시할 때만 주어진다. 말도 안 되는 환율을 감당하면서까지 쿠퍼가 밀러 행성으로 진입했던 것은 어쩌면 그 속에 미래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계속 답을 써온 것은 쓰지 않으면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점수가 낮은 것은 차악이다. 최악이란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 내는 문제는 아주 미묘해서 지금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는 정답에 근접한 것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 괜찮은 답을 썼다고 생각하는 그는 이 답으로 인해 언젠가 쓴웃음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옳은 선택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지 나중에 뒤집힌 적은 거의 없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 한해 말한다면 과거의 후회했던 답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짠하고 정답의 모습으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 잘못은 잘못이고 실수는 실수이다. 게다가 만약 인생이 정말 그렇게 아무 기준도 없어서 과거의 오답이 미래의 정답으로 둔갑하는 일이 잦다면 오히려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라는 게 무색해질지도 모른다. 경험이랍시고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정당화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제출해서는 안 될 답안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잘못이다. 그리고 잘못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수정을 기다리게 된다.


오답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쿠퍼의 경우처럼 제출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출해야만 했던 것이고 필사적이었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블랙홀에 떨어진 직후 건널 수 없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과거와 조우한 쿠퍼는 우주로 향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제발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가 우주로 떠난 이유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만들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얼마간의 시간마저 잃어버리고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때 제출했던 답이 오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다. 하지만 타스와의 재회로 인해 그는 깨닫게 된다. 만약 출발하지 않았다면, 즉 그때 오답을 제출하지 않았다면 지금 딸에게 미래를 선물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딸과 함께 하는 미래를 얻고자 했다면 쿠퍼가 제출한 답은 오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딸에게 미래를 선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정답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답이 정답에 수렴하는 미래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계속되는 오답에도 그가 시험에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의 제목에 담긴 의미를 본다. <인터스텔라>는 직역하면 별과 별 사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번도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행성간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쿠퍼의 여정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답이란 행성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정에 존재한다는 말이 아닐까. 빛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인 것처럼.


영화의 엔딩에 쿠퍼의 나이는 124살이다. 밀러 행성에서 23년 그리고 에드먼즈 행성으로 가기 위해 블랙홀을 경유하면서 51년을 손해본 탓이다. 하지만 124살의 쿠퍼는 지구를 떠날 때의 모습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가 잃어버린 시간은 그의 시간이 아니라 지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읽힌다. 우리가 무언가에 실패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늙게 하는 것은 아니다. 124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인의 나이지만 실제 쿠퍼는 40대의 중년인 것처럼 우리가 무수한 오답을 제출했다고 하여 또 그로 인해 누군가 우리를 가리키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한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면 삶도 상대적이다. 우리는 모두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단지 각자의 시간을 살 뿐이다.


영화 속에서 인류가 토성의 궤도 위로 우주정거장을 쏘아올릴 수 있었던 것은 쿠퍼가 우주에서 필사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에서도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인류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곳은 웜홀 너머의 신행성이 아니라 지구에서 만든 우주정거장이다. 요컨대 삶은 너머가 아니라 여기에 우선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너머를 향했던 쿠퍼의 여정이 없었다면 삶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삶은 현재와 미래의 동시작용이다. 우리가 많은 오답을 제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마도 동시에 두 곳을 쳐다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까. 쿠퍼가 브랜드에게 그랬듯 삶은 우리에게 90%만을 보여준다. 그러니 기대를 갖자. 답안을 제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보여주지 않았던 10%가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90%가 현재라면 10%는 희망이다. 3%의 염도로도 썩지 않는 바닷물에 비하면 과한 수치 아닌가.



2024년 1월 26일부터 2024년 2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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