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Jan 14. 2024

영화 이야기 <인셉션>

코브는 꿈을 통해 대상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비밀을 훔쳐내는 추출자다. 어떻게 꿈을 통해 대상의 무의식으로 접근하는가. 맨 먼저 설계자가 꿈을 만든다. 마치 게임 맵을 만드는 것처럼. 설계자가 꿈을 만들면 기계를 통해 추출자와 대상은 그 꿈속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이 각자의 컴퓨터를 통해 접속하는 것과 달리 꿈은 각자 꾸지 않는다. 꿈을 꾸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그는 설계자 본인일 수도 있고 다른 추출자일 수도 있다. 요약하면 설계자가 꿈을 만들면 추출자 중 하나가 그 꿈을 꾸고 다른 추출자와 대상은 기계를 통해 그 꿈속으로 들어간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일본의 성은 설계자가 만든 꿈이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스테이지가 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게임 맵은 개발자가 한 번 만들고 나면 플레이어가 고칠 수 없지만 꿈은 다르다. 설계자는 구조만 세운다. 디테일을 채우는 것은 꿈꾸는 자의 무의식이다. 맬이 “인테리어”를 보고 여기가 아서의 꿈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꿈은 꿈꾸는 자의 무의식만을 반영하는가. 그건 아니다. 참여하는 모든 플레이어의 무의식이 꿈을 채운다. 구조를 바꾸는 것은 꿈꾸는 자만 가능하지만 그밖에 인물이나 사물은 다른 플레이어의 무의식도 반영된 결과이다. 예컨대 추출자도 대상도 아닌 맬이 이곳에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코브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기계의 타이머가 종료되었을 때. 미리 설정해둔 시간이 끝나면 기계를 통해 꿈으로 들어간 플레이어는 잠에서 깨어난다.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시간이 남았어도 꿈에서 죽으면 곧바로 잠에서 깨어난다. 맬이 아서를 인질로 잡고 코브를 협박하자 코브가 아서의 머리를 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킥. 코브 덕분에 잠에서 깨어난 아서는 대상인 사이토가 먼저 일어날 것을 우려해 내쉬에게 코브를 깨우라고 말하는데 깊게 잠든 코브는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아서는 “킥”을 쓰라고 말하는데 그건 바로 코브가 앉아있는 의자를 넘어뜨려서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즉 잠들어 있는 육체에 물리적인 충격을 줌으로써 잠을 깨우는 방법이 킥이다.


꿈속에서도 꿈을 꿀 수 있다. 일본의 성에 있다가 내연녀의 집에서 깨어난 사이토는 현실로 돌아온 줄 알았지만 바닥에 깔린 카펫을 보고 여기가 꿈임을 알아차린다. 실제로 그 시각에 현실의 코브와 아서, 내쉬와 사이토는 모두 신칸센에서 잠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신칸센에서 사이토의 내연녀가 사는 집이라는 꿈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일본의 성이라는 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의 성은 아서의 꿈이었고 사이토의 내연녀의 집은 내쉬의 꿈이었다. 즉 이들은 내쉬의 꿈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다시 아서의 꿈으로 들어간 셈이다. 물론 각각의 꿈은 설계자가 미리 만들어둔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본편으로 들어가자. 추출에는 실패했지만 코브의 실력을 눈여겨 본 사이토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세계적인 에너지 독점 기업의 상속자에게 꿈을 통해 기업을 분할하라는 생각을 심어준다면 그에게 걸려 있는 수배를 풀어주겠다는 것. 사실 코브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도피 중이었던 것이다. 아서는 생각의 추출(Extraction)은 가능하지만 파종(Inception)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코브는 승락하고 파종, 즉 인셉션을 위한 팀을 모은다.


코브와 아서를 제외하고 세 명의 팀원이 모인다. 먼저 아드리아네는 설계자로서 총 3단계의 꿈을 설계한다. 꿈에서 꿈으로 들어갈수록 무의식은 깊어지고 씨앗은 깊이 묻을수록 깊게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다만 위험요소가 없는 건 아니다. 꿈에서 꿈으로 들어갈수록 인간의 의식은 불안정해진다. 꿈의 단계가 심화된다는 말은 곧 그만큼 현실과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대지라면 꿈은 심해이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도 심해에서는 누구나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깊어질수록 더 그렇다. 유서프는 약을 사용해서 이 공포와 불안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페이크맨 임스. 그는 꿈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로 변신함으로써 대상을 유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드리아네는 설계자이므로 굳이 꿈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일단 각 단계마다 꿈이 설계되고 나면 그 꿈은 추출자 중 누구나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네는 코브를 따라 인셉션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은 코브의 무의식이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꿈은 참여자의 무의식을 반영하므로 만약 코브를 방치했다가는 코브의 무의식이 꿈속에서 무엇을 불러낼지 모른다. 말하자면 아드리아네는 코브의 무의식을 감시하는 역할로 인셉션에 참여한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게 되니까. 아드리아네는 이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그의 무의식이 날뛰지 못하게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보잉 747의 1등 객실에서 인셉션이 시작된다. 첫 번째 꿈은 도심 한복판이고 꿈을 꾸는 사람은 유서프다. 입장하면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이것은 유서프가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에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무의식이 꿈에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변수도 아니다. 피셔를 납치하는 순간 뒤에서는 코브의 무의식이 불러낸 기차가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고 앞에서는 정체불명의 킬러들이 나타나 팀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피셔는 추출자로부터 방어법을 배웠던 것이다. 아서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무의식은 “무장”되어 있다. 피셔를 데리고 있는 한 킬러들은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


첫 번째 희생자는 사이토다. 가슴에 총을 맞은 사이토는 고통스러워하고 임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를 죽이려 하지만 코브가 막는다. 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 깨어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유서프가 사용한 약의 효과가 지속되고 있는 탓에 죽어도 현실로 돌아갈 수가 없다. 만약 죽게 되면 ‘림보’로 떨어진다. 림보는 다시 아서의 말을 빌리면 “원초적이고 무한한 무의식”이다. 말하자면 죽어서 표층으로 올라가지 못할 경우 거꾸로 심층으로 추락한다는 말이다. 이 심층은 “그곳에 한 번 갇혔던 사람의 기억만 존재”하므로 사이토가 죽을 경우 코브가 맬과 함께 머물면서 만들었다가 빠져나온 세계로 떨어지게 된다.


코브는 맬과 함께 철로에서 자살함으로써 림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꿈과 마찬가지로 림보에서도 죽으면 현실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림보가 꿈과 다른 점은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말은 얼핏 이해되지 않는다.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꿈을 꿀 때를 생각해보라.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도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늘을 날든 공룡을 타고 달리든 그것이 꿈이라는 걸 깨닫는 것은 대부분 깨어난 이후이다. 기계를 통해 꿈으로 들어가는 것이 게임에 접속하는 거라면 림보는 게임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서 어느새 꿈을 꾸는 것과 같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죽일 때까지 그곳을 나가지 못한다. 임스에 말에 의하면 그 기간은 “뇌가 멈출 때”까지이다.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팀은 서둘러 2단계로 들어간다.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세 가지다. 기계의 타이머가 종료되거나 죽거나 킥을 하거나. 죽으면 림보에 빠지므로 일단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타이머가 다 되기를 기다리자니 현실에서 설정해둔 시간은 이곳에서 일주일이다. 일주일 동안 무한히 몰려오는 킬러를 상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남은 방법은 킥뿐이다. 킥을 하는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하므로 자연히 1단계의 꿈을 꾸고 있는 유서프가 남게 된다. 단순 참여가 아니라 꿈을 꾸는 것은 그 꿈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미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다른 꿈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킥을 하기 위해서는 “중력이나 충격”이 필요하므로 유서프는 차량을 난간에 부딪혀 추락시키기로 한다. 신호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로 약속되었다.


팀을 실은 채 추격자를 피해 도주하는 유서프를 제외한 나머지 팀원은 2단계로 들어간다. 2단계의 꿈은 호텔 내부이며 꿈을 꾸는 사람은 아서다. 3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잠을 자는 장소는 5층이므로 아서는 아드리아네와 함께 4층 천장에 폭탄을 설치한다. 킥을 위해서는 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1단계에서 유서프는 음악을 틀고 다리 밑으로 떨어지기만 하면 되지만 2단계에서는 킥의 타이밍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1단계의 킥과 3단계의 킥을 연결하는 것이 2단계의 킥이기 때문이다. 아서의 말에 따르면 “너무 빠르면 돌아갈 수 없고 너무 늦으면 다음 꿈으로 갈 수 없”게 된다. 즉 3단계에서 아직 킥이 시작되지 않았는데 먼저 킥을 해버리면 2단계로 돌아올 수 없고, 1단계에서 추락이 끝난 후에 킥을 해버리면 1단계로 갈 수 없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이 킥이었다.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킥을 보면 마치 현 단계에서의 충격이 다음 단계의 의식을 불러오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본편의 3단계에서 임스는 폭탄을 터뜨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2단계에서 아서가 킥을 하는 순간 그 충격으로 3단계의 의식은 저절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4단계로 넘어간 코브와 아드리아네를 불러오기 위한 것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면 코브는 피셔가 림보에 빠지자마자 킥을 위해 폭탄을 설치하자고 말한다. 즉 임스가 폭탄을 설치하는 것은 2단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이유는 이렇다. 킥은 현 단계의 일방적인 충격이 아니라 현 단계와 다음 단계의 동시 충격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침대에서 떨어질 때 꿈에서도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롤로그에서 코브가 깨어난 건 1단계에서 물에 빠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2단계에서 수압으로 인한 충격이 동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편의 2단계에서 아서가 폭탄을 터뜨려 엘리베이터를 추락시킬 때 그속에 있는 사람들이 깨어나려면 3단계에 있는 임스가 폭탄을 터뜨려 건물을 무너뜨려야 한다. 다시 말해 3단계의 충격과 2단계의 낙하가 동시 적용됨으로써 2단계의 사람들이 깨어나고, 다시 2단계의 엘리베이터가 부딪히는 충격과 1단계의 추락이 동시 적용되어 1단계에서 팀원들은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피셔의 무의식이 무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일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3단계까지 들어가서 그의 무의식에 생각을 심고 킥을 이용해 빠져나온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3단계에서 코브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맬이 피셔를 죽임으로써 피셔는 림보에 빠진다. 이때 아드리아네와 코브는 그를 좇아 림보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보면 마치 림보는 4단계의 꿈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림보는 죽지 않고도 기계를 통해 입장할 수 있는 곳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림보에 빠지는 경우는 오직 죽었는데 깨어나지 못할 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브와 아드리아네가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의 림보가 다름 아닌 코브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피셔에게 림보는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자각할 수 없는 무의식의 바닥이지만 코브에게는 맬과 함께 갇혀 있는 동안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세계이다. 1단계부터 3단계까지가 아드리아네가 설계한 꿈이라면 이 꿈의 바닥, 즉 최종장은 코브가 설계한 꿈인 셈이다. 자신이 설계한 꿈이므로 코브는 아드리아네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고 마찬가지로 피셔와 아드리아네는 킥을 이용해 빠져나올 수 있다. 영화는 이후 코브가 해안가에 떠밀려왔던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은 1단계에서 다른 팀원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 물 밖으로 나왔지만 꿈에서 나오지 못한 코브는 익사했기 때문이다.


죽어서 다시 림보에 떨어진 코브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성이다. 같은 세계지만 그가 설계한 건물이 아닌 이유는 코브보다 사이토가 먼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토는 죽어서 림보에 떨어졌고 그곳에서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세계를 만들고 또 늙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기계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닌 죽어서 떨어진 곳이므로 코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다름 아닌 사이토가 가지고 있던 맬의 토템 덕분이다. 맬의 토템은 현실에서는 회전력이 떨어지면 쓰러지지만 꿈속에서는 영원히 회전한다. 영원히 돌고 있는 토템을 보는 순간 코브는 여기가 꿈이며 자기가 왜 이곳에 있는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이토와 함께 림보에서 죽음으로써 현실에서 깨어난다.


영화 <인셉션>을 관통하는 사고는 인간의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된다는 생각이다. 의식은 자각할 수 있지만 무의식은 자각할 수 없다. 그러나 임스의 말처럼 인셉션, 즉 생각을 파종을 하는 곳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무의식에 어떤 생각을 심으면 그 생각이 자라서 자기도 모르는 새 의식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무의식의 결과이다. 이 생각은 영화가 처음 개봉된 2010년에도 낯선 개념이 아니었으나 2024년인 현재에도 흥미롭다. 의식이 무의식의 결과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원인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운명이나 우연이 아니라 인과관계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 놓인 인과관계는 시간과도 유비를 이룬다. 피셔가 무의식의 심층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는 것이나 무의식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림보가 기억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그렇다. 시간의 인과관계에서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다. 예컨대 유서프의 꿈으로 들어간 1단계에서 느닷없이 기차가 도로를 질주하는 것은 무의식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가 현재에 도착했다는 은유이기도 하다. 무의식이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의식과 과거-현재라는 이 두 쌍의 유비항은 기묘한 모순을 만든다. 그 모순은 다름아닌 인간의 주체성의 서로 충돌하는 입장이다.


현재의 나를 만드는 것이 과거의 나라면 내 삶을 만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여기에는 운명이나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지금의 나는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결과물일뿐이므로 과거를 바꾸지 않는 이상 어떤 경우에도 현재를 수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는 인과론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역설하지만 동시에 한 번 만들어진 과거는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비주체성을 폭로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중문화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는 소재가 타임슬립이다.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간다는 판타지는 현재에서는 현재를 바꿀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금수저나 재능 같은 용어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언어는 사실의 지적이라기보다 현재의 기원을 과거나 개인의 힘으로 수정이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기표이다. 꿈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은 타임슬립과 같다. 꿈을 통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것과 죽음이나 비일상적 계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둘 다 변경이 불가능한 현재를 수정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무의식은 과거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단지 수정이 불가능한 현재를 수정하는 타임슬립 판타지의 새로운 유형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과거를 무의식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으므로 과거는 시간적인 의미에서 변경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의 고통스러운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가 기억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와 기억은 다르다. 과거가 지나간 일이라면 기억은 지나간 일의 의미이다. 지나간 일은 수정할 수 없지만 의미는 바꿀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억이 변화하는 것을 체감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알고보니 사실과 다른 경우와 종종 맞닥뜨리곤 한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흐릿해진 것이 아니다. 기억이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그 시점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기억이 현재의 반영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고통스러운 과거를 추억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서 과거는 무의식으로 설정되었으나 그 무의식을 변경하는 것은 다름아닌 인셉션, 즉 현재의 행위이다. 말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수정할 수 없는 과거를 수정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에서 코브 일행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피셔의 마음을 이용해 인셉션을 시도한다. 피셔의 아버지에 대한 인정욕구를 드러내는 기표는 사진이다. 아버지와의 단란한 한 때를 찍은 이 사진은 지나간 일의 기록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과거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아버지의 병실에 둔 이유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회복을 바라는 현재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과거의 사실이 그릇이라면 현재는 이 그릇을 의미로 채운다. 현실의 아버지는 사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깨뜨려 버리지만 꿈속에서 피셔는 이 사진을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현재의 마음이 무의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방증이다.


과거의 특정 사실이 현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고 그 의미가 무의식에 영향을 끼쳐 현재의 의식을 창출한다는 사실은 무의식이 과거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이 말에 따르면 무의식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단계에서 피셔가 아무렇게나 불렀던 숫자는 3단계에서 금고의 암호가 되어 있었다. 무의식의 금고를 여는 열쇠는 실제로 존재하는 과거의 번호가 아니라 현재의 숫자라는 말이다. 피셔는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바람개비를 발견한 후 회사를 분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설계자는 금고를 만들 수 있을뿐 금고 속의 내용을 채울 수는 없으므로 금고 속에 바람개비를 넣은 것은 다름아닌 피셔의 무의식이다. 바람개비는 사진 속 어린 시절의 그가 들고 있던 소품이었고 사진은 현재의 의미가 반영된 기표이다. 즉 그의 생각을 결정한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열망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무의식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과거는 무의식을 채운다. 코브가 림보 속에서 자신이 살았던 집을 만들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집에서 계속 살 것인지 아니면 여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깨어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맬은 이곳이 현실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토템을 금고 속에 가두어 버렸다. 나는 이 선택이 올바른 것이 아닐지언정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어디든 자기가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깨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서문에서 헤르만 헤세는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썼다. 새에게 알은 세계이면서 이전의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맬이 현실로 돌아와서도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표면상으로는 토템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계속 회전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 토템을 다시 움직인 것이 그녀 자신이 아닌 코브이기 때문이다. 맬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림보를 빠져나오지 않았다. 토템을 몰래 회전시킨 것은 코브이므로 림보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코브에 의한 살해이다. 코브가 죄책감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맬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을 깨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손으로 알을 깨뜨려주었다. 말하자면 맬이 스스로 세계를 선택할 능력을 빼앗은 것이다.


무의식은 현재의 반영이고 현재는 무의식의 결과로 창출된다. 스스로 토템을 회전시키지 않은 맬은 무의식 속에서 회전하고 있는 토템을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금의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죽음은 단순한 도피이다. 만약 맬이 스스로 금고를 열고 토템을 회전시킨 후에 현실로 돌아가기를 결정했다면 그녀는 현실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이곳이 자기가 있어야 할 현실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토템을 확인하지 않았고 그 토템은 타인에 의해 영원히 회전함으로써 그녀의 무의식을 결정지었다. 요컨대 맬은 코브, 즉 타인에 의해 주입된 생각과 싸울 수 없었으므로 결국 죽음으로 도피한 것이다.


코브가 가진 죄책감은 맬의 죽음이라는 과거 사실에 그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이다. 이 현재의 의미가 그로 하여금 매일 밤 기억으로 설계한 꿈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꿈에서만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현실은 꿈이며 꿈은 현실이다. 다시 말해 코브는 아내가 죽은 후에 현실에 있지만 림보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인셉션을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곧 그가 림보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매일 밤 기억으로 만든 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가 이 죄의식의 림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에게 현실을 알려준 토템은 맬의 토템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던 셈이다.


영화는 엔딩에서 코브가 회전시킨 맬의 토템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코브에게 있어서 진정한 토템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이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인지를 묻는 토템의 질문은 결국 코브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관객에게 당신이 처한 현실이 과연 당신이 선택한 현실인지 아니면 과거나 타인의 의지로 설계된 꿈인지를 묻는다. 대답은 각자의 것이지만 만약 이곳이 벗어나야 할 꿈이라면 우리에겐 킥이 필요하다. 영화 속에서 킥을 알려준 신호는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였다. 그렇다.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사랑이다. 코브를 집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 맬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던 것처럼.



2024년 1월 2일부터 2024년 1월 14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라디오 스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