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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01. 2024

영화 이야기 <라디오 스타>

2023년의 마지막 날이다. 원래는 이 해의 마지막 영화로 <콜래트럴>을 쓰려고 했었다. 허문영 평론가는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서 <콜래트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력한 수컷으로서의 삶이 모멸스럽다면 이 영화와 함께 하룻밤을 맞기를 권한다. 다음 날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처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우리는 무력감과 모멸감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쩌면 이 견딤은 무력감과 모멸감이 원래 견디어야 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무력한 것이고 무엇이 모멸적인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탓은 아닐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고 모욕이 반복되면 수치심이 되려 이상해진다. 필요하면 견뎌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견뎌내고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수치심이 덜한 한 해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가 견디고 있는 무력감과 모멸감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라디오 스타>로 갑작스럽게 올해 마지막 영화를 바꾸게 된 이유는 영월 여행 때문이었다. 나는 블랙야크 100대 명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1년에 10개씩 10년에 걸쳐 완등하는 것이 애초에 정한 계획이다. 올해 마지막 산은 영월 태화산이었는데 원래는 산을 내려온 뒤 청령포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청령포에 가보니 서강이 얼어붙어서 청령포 입장이 금지되어 있었다. 시간이 어느새 오후 4시를 넘었기 때문에 갈만한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찾은 곳이 라디오 스타 박물관이었다. 영화 촬영지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곳인데 영화 소품 외에도 최초의 라디오나 라디오의 역사 등 라디오 관련 자료를 개괄할 수 있는 박물관이라고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라디오 스타>를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영월에서 촬영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척에 있어서 금방 도착했다. 갈 때는 관람객이 나밖에 없었는데 10분쯤 지나자 단체 관람객이 방문해서 도망치듯 관람하고 나와야 했다. 그 분들이 눈치를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어쩐지 방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라디오 스타>를 올해 마지막 영화로 정한 건 박물관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본 영화보다 내 발로 찾아간 영화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성을 만날 때도 소개팅보다는 우연한 만남이 할 말이 더 많지 않은가. 우연을 운명으로 생각하고 싶어할 때 우리는 평소라면 흩어지도록 내버려두었을 것들을 조심스럽게 잇는다. 나는 영월에서 라디오 스타 박물관으로 그리고 영화 <라디오 스타>로 이어지는 선을 하나의 이야기로 간직하고 싶었다. 꼭 서로 무관해보이는 별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만드는 것처럼.


영화 <라디오 스타>는 <왕의 남자>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이다. 2006년에 개봉했고 박중훈 배우와 안성기 배우가 투톱을 맞췄다. 천만 영화를 성공시킨 직후의 차기작이 블록버스터가 아닌 지역색 물씬 나는 영화라는 점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20세기부터 호흡을 맞춰온 두 배우를 같은 스크린 안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누가 뭐래도 상업이다.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라도 엔딩 크레딧에 올라오는 배급사, 투자자, 제작사, 매니지먼트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OTT 플랫폼으로 인해 한풀 꺾이긴 했어도 2006년 당시만 해도 영화는 대중매체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통했다. 그 시장의 한복판에서 인연을 감상할 수 있다는 일은 복되다. 상업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자. 1988년 가수왕이었던 최곤은 잇따른 폭행과 마약 사건으로 2000년대에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해서 생계를 유지할 만큼 전락한다. 카페 사장과 기자를 폭행하는 바람에 감옥에 갈 처지가 된 최곤은 영월 라디오 DJ를 맡는 조건으로 합의금을 빌리고 매니저 박민수와 함께 영월로 떠난다. 폭행사고 합의부터 담배 한 개비 빌리는 일에 이르기까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 속에 사는 최곤의 모습은 얼핏 유아적 퇴행으로 보인다. 그래서 궂은 일 도맡으며 최곤을 챙기는 박민수의 모습은 헌신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최곤의 성장을 방해하는 울타리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최곤의 이 퇴행은 라디오 DJ를 맡으면서 뜻밖에도 청취율을 견인하는 매력으로 작동한다. 태권도 단증과 운전 면허증을 가진 실업자에게 태권도장 기사를 권하고 뱀에 물린 환자 밖에 없는 한가한 병원에 뱀 키우기를 권하는 직설적인 화법에 다방 종업원과 식당 아이를 게스트로 부르는 모습은 눌러야 하는 버튼만 수십 종인 첨단 문명의 결정체 방송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문명이 아닌 자연으로서의 인간이다. 생각해보면 최곤을 정상에서 바닥으로 추락시킨 것은 다름아닌 그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정, 즉 자연성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최곤의 전락은 박민수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유아적 퇴행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성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그는 1988년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가는 문명 속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자연인의 표상인 것이다.


서울에서 몰락한 그가 영월에서 재기하는 모습은 그런 이유에서 자연스럽다. 최곤이 DJ로 처음 내보낸 노래는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인데 이 노래는 도시인의 피로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노래이다. 그러나 영월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공간은 시장이거나 초막 혹은 읍내의 한가로운 가게들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도시인의 피로를 알지 못하므로 이 노래는 단지 소음이다. 반대로 원고가 아닌 육성으로 발화하는 자연인의 말은 사람들을 라디오 앞으로 불러모은다. 서울의 라디오가 개개인의 사연을 잘 정리된 소품으로 활용한다면 영월의 라디오가 트는 것은 정돈되지 않은 인간의 생생한 목소리이다. 라디오와 TV 세대에게 듣기만 하는 일방적인 목소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원래 인간의 말은 쌍방향이다. 혼잣말도 방향을 가진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혼잣말을 듣고 대답을 준비한 적이 있지 않은가.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말하기만 하고 듣지 않는 전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서로 듣고 말하는 대화의 장소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서울은 문명을, 영월은 자연을 상징하는 것일까. 최곤과 영월에 도착한 박민수가 아파트를 가리키며 “더 이상 시골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영월은 이 영화에서 문명의 반대편에 서 있지 않다. 방송국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문명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서울과 영월은 분명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니는데 그건 바로 자본주의가 포화된 시장과 이제 막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장의 차이에 기인한다. 서울에서 내려온 스타팩토리의 사장은 박민수에게 “지금이야말로 최곤 씨를 팔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한다. 회사명에서 알 수 있듯 그에게 스타란 공장에서 찍는 상품이며 최곤은 폐기 직전의 재고이다. 서울의 방송국 국장 역시 최곤의 방송이 인기를 얻자, 즉 광고를 붙일 수 있는 상품 가치를 가지게 되자 다시 서울로 부른다. 요컨대 서울은 모든 것이 상품으로 치환되는 자본주의의 심장인 셈이다.


반대로 영월은 어떠한가. 먼저 영월의 라디오 방송에는 광고가 붙지 않는다. 외상을 주는 가게가 있고 돈은 장난감(고스톱)의 소품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월의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장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역할’일 것이다. 영월 방송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의 역할을 넘나든다. PD와 DJ가 박차고 나간 자리를 기사와 매니저가 대체하고 다방 종업원이 게스트로 출연한다. 무명의 락밴드가 홍보팀을 대신하며 그들은 청취자였다가 출연진이었다가 나중에는 홈페이지 운영진으로도 변모한다. 그러나 이중에서 가장 뛰어난 변신은 아무래도 박민수일 것이다. 박민수는 최곤의 매니저이면서 방송의 마케팅 담당이고 외벽 보수 작업부에 방송 기사이자 대타 DJ 그리고 심지어 회의실에서는 국장 대신 결정을 내리는 등 무수한 역할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직업군을 소화해낸다. “이 촌구석에 매니지먼트 할 게 뭐 있”냐는 강PD의 힐난처럼 개중에서 가장 직업색이 희미한 박민수가 가장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는 것은 확실히 눈에 띈다.


역할이 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가. 자본주의의 핵심이 분업이기 때문이다. 분업은 산업혁명 시기에 생산량을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도입한 공정 방식이었다. 원래 인간은 하나의 제품을 온전히 만들다가 분업의 등장으로 제품의 일부만을 만들게 되었다. 분업 이후 인간은 전체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박탈당하고 부분에 대한 권리와 책임만을 인정받게 된다. 이제 전체가 어떻게 되든 내가 맡고 있는 파트에서 이상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공장이 도산할 위기에 처했어도 내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면 위기는 나와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분업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결과이며 이 결과가 분업의 도입으로 몸짓을 키우려고 했던 자본주의의 팽창에 기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영월 방송국의 롤체인지가 말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분업의 폐기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각자의 욕망이 있다. 최곤과 박민수는 서울로의 복귀를, 강PD와 국장 그리고 방송 기사는 원주로의 이전을 원한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의 욕망을 위해 서로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이동을 통 스스로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이란 결국 미래의 자신을 위한 것 아닌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라는 상상은 순간적인 쾌감은 줄지언정 현재의 자신을 충족시켜 주지는 않는다. 현재의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일인 것이다. 영월 방송국의 인물들은 라디오 방송이라는 현재의 일을 위해 서로의 역할을 넘나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를 각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역할과 정체성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나 누구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가 아니다. 그것은 다수이지만 하나이다.


직업색이 가장 희미한 박민수가 가장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유의미하다. 말하자면 그는 가장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뭔가가 되기 위해서는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만의 색이 분명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자기계발서의 흔한 클리셰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박민수는 직업색이 흐릿할 지언정 그의 색이 흐릿하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 그는 최곤보다도 더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역할과 개성은 다른 것이라고. 경계를 뚜렷하게 한다고 해서 색이 짙어지지는 않는다. 울타리를 친다고 해서 개성이 돋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색을 뚜렷하게 만드는 것은 경계가 아니라 생에 참여하는 일관성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 일관성을 흔든다. 최곤과의 계약을 위해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은 박민수는 결국 최곤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다. 박민수는 상품으로서의 삶이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최곤에게는 좋아보인다. 그는 서울로 가서 아내의 김밥장사를 도와주는 처지가 되는데 이것은 직업색이 희미한 그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시장에서 역할을 분명하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장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되는 것이다. 최곤은 자기 때문에 박민수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행을 거부하지만 여기서도 자본주의는 힘을 발휘한다. 전국으로 송출되는 전파를 서울이 아닌 영월에서 틀기로 결정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서울이냐 영월이냐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온다. 이 유연성과 융통성은 박민수의 일관성과 최곤의 고집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송출되는 방송에서 원고 대신 육성을 택한 최곤의 모습은 아직 인간이 완전히 패해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각해보면 최곤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서울에서이거나 혹은 서울에서 온 사람에 한해서였다. 그는 영월에서 술에 취한 강PD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들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를 영월로 좌천시킨 자연성은 자본주의라는 괴물 앞에서만 거칠어진 것이라고. 서울의 최곤 앞에서 관객들은 냉담해지지만 영월의 최곤 앞에서 관객들은 눈물 짓는다. 라디오는 전파를 수신해서 음성으로 교환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사람들이 듣는 것은 전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목소리이다. 자본주의와 인간의 관계가 이렇지 않을까. 계약과 거래, 교환과 화폐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것은 모두 인간의 관계인 것처럼.


영화 말미에 돌아온 박민수는 빗속에서 신중현의 <미인>을 부르며 등장한다. 빗속에서 두 배우가 조우하는 이 장면이 내게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유쾌한 패러디처럼 보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두 배우는 서로를 죽이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관계로 나왔지만 <라디오 스타>에서 두 배우는 서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관계로 나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그야말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이다. 박중훈 배우는 방송에서 안성기 배우와 자신을 시속 80km로 달리는 트럭과 180km로 달리는 스포츠카로 비유한 적이 있다. 이 트럭이 앞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자기가 사고 없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고. 내게는 글쓰기가 그런 트럭이었으면 좋겠다. 2024년에는 나를 추월하려는 마음 대신 멈추지 않고 쓰는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기를. 빠르게 가기보다 온전히 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도.



2023년 12월 31일부터 2023년 12월 3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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