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Dec 30. 2023

영화 이야기 <사랑니>

평론가들이 사랑하는 영화를 보았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행복한 영화”라고 했고 허문영 평론가는 “아름다운 영화”라고 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비평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정확하게 칭찬하는 일”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확함은 비평의 객관성에 대한 지적으로 읽힌다. 그러나 행복하다는 말은 객관적인 말이 아니다. 아름답다는 말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객관성을 직업윤리로 삼는 이들을 무장해제시킨 영화다. 냉철한 눈을 가진 이들이 가슴으로 좋아하게 된 영화란 어떤 영화인가. 나는 이 영화가 궁금해졌다.


포털 사이트 평점을 보면 박하다. 네이버 기준으로 6점이 채 되지 않는다. 평론가가 좋아하는 영화는 어렵고 난해해서 대중들이 싫어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 영화의 대중적인 평이 좋지 않은 이유는 어려워서가 아니다. 주인공 인영은 서른 살의 학원강사인데 같은 나이의 남자와 동거를 하면서 열일곱 살의 제자와 연애를 하며 심지어는 첫사랑까지 등장한다. 무리하게 여성의 판타지를 겨냥한 영화처럼 보인다는 게 흥행 실패의 원인이지 않을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전혀 그런 영화가 아니다.


두 평론가가 똑같이 지적한 것처럼 이 영화는 설정을 오인하기 쉽게 연출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서른 살의 수학강사 인영과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이석이 등장하는데 영화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끌고가다가 인영이 이석을 두고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똑같이 생겼어”라고 말하는, 이른바 과거의 연인을 암시하는 시퀀스에서 갑자기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인영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넘어가 버린다. 이후 서른 살의 인영과 열일곱 살의 인영의 시퀀스가 교차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연출방식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닌 동일인의 현재와 과거로 인식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고 약 50분 정도가 지난 뒤 서른 살의 인영과 열일곱 살의 인영이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 관객은 뭔가 속은 듯한 기분에 빠지게 되고 만다.


사실 논리적인 모순은 없다. 동성동명이인은 흔한 것이니까. 이 영화에는 인영만이 아니라 또다른 동성동명이인이 두 명 더 등장한다. 열일곱 살의 학원 제자 이석이 있고 서른 살의 첫사랑 이석이 있으며, 동거하고 있는 서른 살의 정우가 있고 열일곱 살 인영의 친구인 정우가 있다. 말하자면 세 쌍의 동성동명이인이 있다는 말인데 물론 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을 개별 인물이 아닌 현재와 과거로 오인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연출 방식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서른 살의 인영에게 있는 수술 자국이 열일곱 살 인영에게도 있고, 열일곱 살 이석이 열일곱 살 인영의 교과서를 들고 있는 것처럼 서른 살의 이석 역시 서른 살의 인영이 준 교과서를 간직하고 있다. 연출뿐만 아니라 소품까지도 이들을 동시대인이 아닌 연대기인으로 보게 만든다는 얘기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보여주고자 함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마주쳐서는 안 되었다.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과거를 연상시키는 연출이나 비슷한 소품을 꺼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세 쌍의 인물이 서로 마주치게 함으로써 이것이 현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렸고, 한편으로는 세 쌍의 인물이 교차 등장하고 같은 소품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그들이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현재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말은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서른 살의 인영에게는 열일곱의 인영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열일곱의 인영은 시간이 지나 서른 살의 인영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서른 살의 이석이 열일곱 살의 이석과 “전혀 닮지 않”은 것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가.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다른 시절이라고. 우리는 떼를 쓰며 고집을 피우는 낯선 아이에게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본다. 팔짱 끼고 걷는 연인에게서 누군가는 과거를 볼 것이고 누군가를 미래를 볼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은 남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쳤거나 혹은 지나치게 될 시절이다. 만약 그들이 나와 같은 수술 자국을 가졌거나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시절은 더욱 생생할 것이다.


말하자면 타인이란 내가 아닌 시절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간에 존재하지만 내가 겪었거나 앞으로 겪게 될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니 그들을 일러 나의 과거이거나 미래라고 부르는 일이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섣부른 인류애를 주장하는 것처럼 오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타인은 남이 아니므로 잘해줘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나의 어느 시절을 볼 때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은 그때의 나는 어땠을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과거를 호명하지만 실제로 소환되는 것은 현재의 나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그때와 지금을 구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를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은 그때와 같지 않다.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서른 살 인영의 이야기이다. 열세 살의 터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서른 살 인영의 태도는 열일곱 살 인영의 태도와 구분되지 않는다. 열일곱 살 인영이 과거의 사랑(이수)을 현재의 사랑(이석)으로 전이시키듯 서른 살의 인영 역시 과거의 사랑으로 인해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하게 된다. 열일곱 살의 인영이 전화로 애원하듯 서른 살의 인영도 제발 끊지 말라고 애원하고, 열일곱 살의 인영이 차에서 뛰쳐내리듯 서른 살의 인영도 클락션을 누르며 폭주한다. 말하자면 둘은 서로 다른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서른 살의 인영이 서른 살의 이석을 만난 다음부터다. 카페에서 서른 살의 이석을 만나고 나서 고등학교 앞에서 열일곱 살의 이석을 연이어 만난 인영은 혼잣말로 내뱉는다. “진짜, 전혀 닮지 않았네.” 이 말은 서른 살의 이석과 열일곱 살의 이석의 차이에 대한 지적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향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곧 열일곱 살의 자신과 서른 살의 자신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인영이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때 만난 첫사랑의 기억 때문이었다. 즉 서른 살의 인영이 열일곱 살의 인영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이유는 나이는 서른 살이지만 실제로는 열일곱의 자신을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인영이 집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면서 “조인영, 미쳤어.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한거니. 열일곱 살짜리를 데리고”라며 자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의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 인영은 열일곱 살에서 서른 살로 되돌아온다. 열일곱 살의 이석은 그녀가 열일곱에 사랑했던 이석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는 더 이상 열일곱 살로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하는 동안 그녀는 열일곱이었으므로 열일곱 살의 인영은 그때의 자신이 아니라 단지 연적으로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석의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그녀가 지금이라고 믿었던 시간은 사실은 그때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지나갔다는 것도.


그때를 알게 되면 지금도 알게 된다. 저녁에 학원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인영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일곱 살의 인영은 자신이 아니라 이석 앞에서 하염없이 울던 그 애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열일곱 살 때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했듯 지금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하는 것은 열일곱 살의 인영이어야 자연스럽다. 서른 살의 학원 강사가 아니라. 하지만 새벽에 깬 인영은 멀리 학원 건물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알고 학원으로 달려간다. 이재진 음악감독의 경쾌하고 설레는 배경음악 사이로 인영은 거리를 지나 학원에 도착하고 잠들어 있던 열일곱 살의 이석과 키스한다. 이 장면은 인영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지만 이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열일곱을 연기한 인영이 아니라 오롯이 서른 살의 인영이다. 그녀는 비로소 과거의 누군가를 호출하지 않고 지금의 자신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 속에서 인영은 두 번 사랑에 빠진다. 한 번은 열일곱으로 한 번은 서른으로. 이를 두고 혼란과 자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을 구분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 영화가 열일곱 살의 인영과 서른 살의 인영을 같은 공간에 놓아둔 이유는 그때와 지금이 이토록 명료하게 다르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서른 살의 인영은 눈앞에 열일곱 살의 인영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이 더 이상 열일곱 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그때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이 두 번의 사랑을 전자는 미성숙으로 후자는 성숙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열일곱 살의 인영은 “다시 태어나면 이석이 되고 싶어”라고 말하는데 이는 아마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말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말일 것이다. 이처럼 열일곱의 그때는 너에게 눈이 멀어 나를 소멸시킬 만큼 찬란한 일기였다. 서른 살의 인영이 열일곱 살 때의 첫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단순히 자라지 못한 아이라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그때를 살아보고 싶은 마음의 반영이다. 사랑에 빠진 열일곱과 비싼 걸 먹을 수 있는 서른 중에서 고르라면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때를 지금으로 여겼던 서른 살의 인영은 열일곱 살의 이석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생에 가장 빛났던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냈다. 이것이 미성숙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망이다. 이 열망이 있어 서른 살의 인영은 자기보다 열세 살이 어린 소년에게 사랑을 애원할 수 있었다. 태울 것이 없는 삶은 애원하지 않는다.


서른 살의 인영에게 열일곱 살은 사랑니이다. 이가 돋을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고 생각할 무렵 예상치 않게 돋아나는 치아처럼 열일곱 살의 이석을 만난 순간 그녀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사랑이 돋아난다.(그녀가 애인이 아닌 이성과 동거하는 사실은 에로스의 부재를 뜻한다. 남성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인영은 정우를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영이 통증을 느끼는 장면이다. 인영은 서른 살의 이석이 꺼낸, 자기가 오래 전에 빌려준 교과서를 보는 순간 통증을 느낀다. 열일곱 살의 인영이 교과서를 보고 열일곱 살의 이석과 키스하듯이 서른 살의 인영도 교과서를 보는 순간 다시 옛사랑을 떠올리려고 할 때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사랑니는 새롭게 돋아난 치아지만 그대로 두면 자기는 물론 주변 치아까지 썩게 만든다. 서른 살 인영에게 열일곱의 감정은 다시 찾아온 사랑의 가능성이지만 그렇다고 열일곱에 머무는 순간 이 가능성은 썩게 된다. 아무리 그때와 닮았어도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우리가 그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을 구분할 수 없을 때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인영의 통증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고이다. 사랑니가 상징하는 사랑의 가능성이 치아를 뽑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듯 사랑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열일곱 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치아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랑니는 뽑아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열일곱 살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처럼. 남겨놓아야 할 것은 단지 다시 사랑할 수 있다는 마음뿐이다.


서른 살의 인영과 열일곱 살의 이석 그리고 서른 살의 정우와 서른 살의 이석은 영화 말미에 꽃을 본다. 서른 살의 정우와 서른 살의 이석이 보는 꽃은 땅에서 자란 꽃이다. 이 꽃은 저절로 자란 것이므로 사람이 키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키운 것이다. 시간이 키운 것의 권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에게 있으므로 시간이 지나갈 때 그 꽃은 다시 시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서른 살의 인영과 열일곱 살의 이석이 바라보는 꽃은 화분에 담긴 꽃이다. 이 꽃은 사람이 키운 꽃이면서 두 사람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꽃이다. 사람이 키운 것이므로 사람이 있는 한 이 꽃은 시간이 흘러도 지지 않고 비밀을 가진 꽃이므로 여느 꽃 사이에서도 두 사람은 그 꽃을 알아볼 것이다. 영화 <사랑니>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다. 


앞서 언급한 두 평론가는 이 영화에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하나씩 꼽았다. 신형철 평론가는 울다 잠든 열일곱 살 인영의 곁에서 구두를 갈아신는 보건 교사의 모습을 꼽았고 허문영 평론가는 서른 살 인영이 술에 취해 엄마가 입원한 병실 침대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내려오는 장면을 꼽았다. 내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에 열일곱 살 이석은 술에 취해 인영의 차 앞에 주저앉아 있다가 인영이 내려오자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면 자전거를 탄 인영이 앞서 가고 그 뒤를 헐떡거리며 이석이 쫓아가고 있다. 바로 이 장면이다.


이석이 술을 마신 이유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찾아왔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떠났을 것이다. 내가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영은 이석이 자기를 뒤쫓아오게 함으로써 사랑에 빠진 한 소년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그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고통을 느낀다면 그건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랑이란 결국 나를 영원히 달리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브레이크가 잘 안 된다며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인영을 보면서 이석이 떠올렸던 것은 ‘멈출 수 없는 길’이었을 것이다. 함께 갈 길이 멀어질수록 눈은 빛난다. 사랑이라면.



2023년 12월 17일부터 2023년 12월 29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