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자는 대답을 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답을 가진 자만이 질문할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전혀 모르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묻지 않는다. 설령 정답을 모르는 경우에도 오답이 무엇인지는 안다. 가령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원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말이 많지만 영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집을 떠난 소년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탈출’이 아니라 ‘복귀’라고 대답한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다시 삶으로 복귀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원래대로 살아서는 안 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었는데 정작 그 대답은 원래 세계로의 복귀라는 것이.
이것을 구분하기 쉽게 나누면 ‘원래의 삶’과 ‘원래의 삶으로의 복귀’가 될 것이다. 두 개는 어떻게 다른가. 전자가 주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선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영화 속에서 마히토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동생, 즉 이모를 새어머니로 맞아들인다. 아버지가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굳이 전처의 동생을 후처로 들인 것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전처를 닮은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아버지는 원래의 가정을 복구하고 싶어했다. 마치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마히토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무리 닮았어도 어머니와 이모는 다르다. 오히려 어머니를 꼭 빼닮은 이모는 죽은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모양이었다고. 부유하고 귀한 집 아들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굳이 아들을 자동차로 등교시킨 것처럼 아버지는 삶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했다. 전쟁을 하면 누군가는 전쟁에 희생되지만 누군가는 전쟁을 이용한다. 아버지는 전쟁을 이용하는 자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희생당한 자가 피해자라면 이용하는 자는 승리자니까. 아내를 잃은 피해자로 보이고 싶지 않고 전쟁 물자를 만들어 부를 이룬 승리자로 보이고 싶은 게 아마도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아들은 다르다.
아내와 흡사한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인 게 아버지에게는 상실감을 떨쳐버리는 일이겠지만 아들에게 새어머니는 어머니의 상실감을 각인시키는 대상이다. 마히토는 새어머니를 볼 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고 어머니의 죽음도 떠올렸을 것이다. 공습으로 병원이 불타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마히토는 어머니가 불에 타는 모습도 보지 못했고 시신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 속에 불길에 휩싸인 어머니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새어머니로 말미암아 각인된 상실감이 마히토의 죄책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대상을 떠올리는 일은 지키지 못한 자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건드린다. 아버지는 새아내를 얻어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던져버렸지만 그 무능력과 무책임은 고스란히 아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니 마히토가 새어머니 나츠코를 기피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연상시키는 대상을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당연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은 마히토의 잘못이 아니다. 자신의 탓이 아닌 과오를 수용할 때 인간의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것은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감정이다. 말하자면 승리자이고 싶었던 아버지의 결정이 아들을 피해자로 만든 셈이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피해자가 된 마히토는 돌로 자기의 머리를 찧는다. 이 자학은 가학이다. 왜냐하면 마히토는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이 바로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재혼했고 이미 아이까지 생겼다. 이 가정을 불완전한 가정으로 만드는 것은 마히토의 입장에서 보면 새어머니지만 반대로 새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마히토다. 만약 마히토가 없다면 이 가정은 완전히 새로운 가정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히토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과 더불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지위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마히토가 돌로 자기 머리를 찧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에 대한 항의이자 동시에 가족 내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발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학이란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다. 공존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세계를 없앨 수 없다면 나를 없앨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히토는 이 세계와 결별하고 싶어한다. 당연한 일이다.
결별하고 싶었던 세계를 떠났다가 스스로의 의지로 다시 돌아오는 것. 이것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이야기다. ‘원래의 삶’과 ‘원래의 삶으로의 복귀’의 차이는 선택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마히토는 어떻게 해서 세계를 떠나고 싶었던 마음을 철회하고 다시 원래 세계를 선택하게 되는가. 나는 이것이 궁금했다. 마히토의 마음이 변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탈출과 복귀의 반복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처럼. 나는 왜 삶이 끝내 다시 돌아오는 일의 반복인지 알고 싶었다.
마히토는 왜가리 남자에 의해 탑 안으로 들어간다. 이유는 두 가지다. 나츠코가 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것이 첫 번째고 왜가리 남자가 어머니가 살아 있다고 말한 것이 두 번째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구하러 가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고만 말했다. 나츠코가 ‘원치 않는 가능한 삶’이라면 어머니는 ‘원하는 불가능한 삶’이다. 원치 않는 현실의 삶과 원하지만 불가능한 삶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할까. 그런데 정작 마히토가 탑 안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단지 마히토를 속인 왜가리 남자뿐이다.
나는 이 시퀀스를 이렇게 읽었다. 우리는 현실의 삶과 이상적인 삶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삶을 선택할 수 없으며 단지 눈앞의 거짓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 영화에서 왜가리 남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다. 그는 마치 마히토를 오래 기다려온 것처럼 말했고 죽은 어머니가 살아 있다고도 말했다. 마히토의 이름인 진인眞人에 대비해서 말한다면 왜가리 남자의 이름은 허상虛像이다. 허상은 유혹한다. 마치 나만을 위한 무언가가 세상에 준비되어 있는 것 같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누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도 없다. 만약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 무언가를 갖기 위해 버티고 견디어온 자의 것이며 상실감은 모두의 것이다.
왜가리 남자가 처음 마히토 앞에 등장했을 때 마히토는 그를 따라갈 생각을 하는 대신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허상의 유혹에 끌려가는 대신 유혹과 싸울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영화의 제목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답 하나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진인은 허상에 맞서 유혹과 싸우는 자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의 물음은 결국 무엇이 진인인가하는 존재론의 물음 아닌가. 존재가 선행하고 방법이 뒤를 따르는 게 아니다. 어떤 방법을 따라가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가 만들어진다. 진인 역시 마찬가지다. 진인이 있고나서 진인의 방식이 있는 게 아니다. 허상을 물리치고 유혹을 견뎌내기 위해 싸우는 모든 자의 이름이 곧 진인이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왜가리 남자와의 대전에서 마히토가 사용하는 무기는 활이다. 그런데 이 활은 나츠코의 대궁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며 심지어 화살은 적인 왜가리 남자의 깃털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활은 진인이고 화살은 허상이다. 허상을 상대하는데 허상을 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이 허상의 화살은 본체인 왜가리 남자의 부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진인의 허상은 허상이 아니라 허상을 꿰뚫는 무엇이다.
나는 이 무엇의 이름을 염念이라고 부르고 싶다. 염은 지금(今)과 마음(心)이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다. 지금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므로 사라진 것도 다가올 것도 아닌 가장 참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허상의 일부지만 마음을 먹은 자가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쓰고 참아내면 새로운 지금, 즉 달라진 자기 자신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염은 진인과 허상이 결합된 존재이면서 현재의 나도 아니고 허구의 나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만들고자 하는 나이며 새로운 시간과 혁신하는 세계의 운동성이다.
마히토의 화살이 왜가리 남자의 부리를 꿰뚫은 것은 이 화살이 허상이 아니라 염이기 때문이다. 허상은 유혹해서 잡아먹지만 염은 견뎌내서 관통하게 만든다. 염은 생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가리의 깃털로 만든 화살은 마히토의 활이라는 진인 위에서 발사되었기 때문에 염이 될 수 있었다. 마히토는 어떻게 해서 싸울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어머니의 상실로 그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어진 세계에 무력하게 적응하고만 있을 때 세계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는 것을. 아버지의 재혼으로 마히토는 또 한 번 자신이 원치 않는 세계과 조우했다. 잠들어 있었던 지난 번에는 어머니를 잃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마히토가 처음 선택한 싸움의 방식은 자학이었다. 그는 돌로 자기 머리를 찧으면서 자기 소멸의 두려움에 맞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자기가 싸우려고 했던 세계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아버지는 마히토의 생각을 존중하거나 물어보는 대신 그를 건드린 자들을 응징하겠다고 나선다. 이것은 마히토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세계를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그런데 왜가리 남자의 등장과 나츠코의 상실은 생각지도 못한 싸움터로 마히토를 이끈다. 왜가리 남자는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말로 마히토를 유혹하는데 이 유혹에 맞서 마히토가 준비하는 것은 활과 화살이다. 즉 마히토는 한 번 사라진 것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마히토에게 이 가르침을 준 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책 속에 남겨놓은 글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집게 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마히토는 어머니가 자기를 위해 쓴 글을 읽게 된다. 이때 마히토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했던 흔적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도쿄의 공습으로 인해 돌아가셨다. 그러니 왜가리 남자의 말이 맞다면 어머니는 저승에서 돌아온 것이므로 귀신이거나 요괴이다. 하지만 책에 글자로 남겨진 어머니는 염이다. 염은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므로 마히토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글자 속에 온전히 남아 있다.
어머니는 글자 속에 있으므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마히토가 허상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던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에 의하면 한 번 상실된 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라진 나츠코는 지금 찾지 못하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이다. 키리코의 말처럼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마히토에게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히토는 위험을 무릅쓰고 왜가리 남자와 함께 나츠코를 찾아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다. 왜일까.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새어머니이고 나츠코에게 마히토는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이다. 이 두 사람은 공존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 가정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 말하자면 서로는 서로에게 불안이자 위협이다. 그런데 왜 마히토는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츠코를 구하러 가는 것일까.
같은 패배를 두 번 겪지 않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츠코는 마히토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어머니를 잃은 고통이 되풀이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나츠코가 아버지의 아내인 이상 어머니의 자리에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마히토는 아마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나츠코를 어머니의 자리에서 부정하고 모른 체하거나 혹은 어머니로 받아들여 구하러 가거나. 나츠코를 부정하는 일은 그녀를 새어머니로 만든 아버지의 세계를 부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한편으로 원래의 세계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의 세계만을 인정하고 다른 어떤 세계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이기도 하다. 이것은 저항이지만 동시에 퇴행이다.
반대로 나츠코를 구하러 가는 길은 그녀를 어머니로 인정하는 일이면서 아버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은 주어진 세계를 또 한 번 받아들임으로써 싸움을 포기하는 체념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얼핏 자기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길을 마히토가 선택한 이유는 나츠코를 포기하는 일이 저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나츠코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 나츠코는 이미 아버지의 아내이자 동생을 임신한 가족이다. 나츠코를 이대로 잃어버린다면 마히토는 또 한 번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를 무력하게 빼앗기는 셈이 된다. 고집을 지키는 것과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싸움인지 마히토는 알고 있다.
지하 세계로 내려간 마히토가 가장 처음 조우하는 것은 거대한 무덤이다. 망자를 알 수 없는 무덤의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죽은 자의 가르침은 산 자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므로 이 말은 타당하다. 그런데 죽은 자는 누구인가. 누가 죽었는지를 알아야 그가 살았던 삶을 배우지 않을 것 아닌가. 어떤 삶을 기피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삶을 따라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무덤의 문장은 이렇게 묻고 있다. ‘나를 배우지 않으려면 나를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영화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큰할아버지 이전의 탑의 주인으로 짐작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선 가지고 있는 단서를 조합해보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무덤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 어떤 ‘존재’가 있었다는 것. 둘째는 그 존재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셋째는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배워서는 안 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이렇다. 존재하나 알 수 없고 배워서는 안 되는 것. 이 특징은 온전히 ‘괴물’의 것이다. 괴물은 존재가 명확하지만 그 속성을 알 수 없고 따라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하 세계에는 바로 이와 같은 괴물들이 득실댄다. 바로 팰리컨과 앵무새들이다.
히미의 불을 맞고 죽어가는 팰리컨은 말한다. 새로 태어난 팰리컨들은 더 이상 나는 법을 알지 못한다고. 날지 못하는 팰리컨은 팰리컨이 아니다. 그건 팰리컨을 닮은 무엇이다. 마찬가지로 앵무새는 이곳에서 나는 대신 날개에 칼과 포크를 쥐고 있다. 이들 역시 앵무새가 아닌 앵무새를 닮은 무엇이다. 이 팰리컨과 앵무새를 닮은 괴물들은 왜 괴물이 되었을까. 간단하다. 팰리컨이면서 팰리컨이 아닌 것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고 앵무새이면서 앵무새가 아닌 것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괴물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것이 될 때 태어난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덤의 입구에 쓰인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는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상실’에 대한 경고이다. 실제로 지하 세계는 자기 자신을 상실한 자들로 가득하다. 팰리컨은 원래 먼 곳까지 먹이를 사냥하러 날아가던 새였으나 지금은 무력한 인간의 영혼(와라와라)을 먹이로 삼으며 연명하고, 앵무새는 세계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들의 왕국을 보존하는데만 급급하다. 탑의 주인인 큰할아버지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욕에 찬 지도자였으나 지금은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세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무력한 신으로 전락했다.
이들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이 원래 있던 곳을 떠나 지하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하 세계는 어떤 곳인가. 큰할아버지가 말에 의하면 이곳은 한 개인의 의지로 세계를 무너뜨릴 수도 창조할 수도 있는 곳이다. 큰할아버지가 마히토를 부른 이유도 자신의 뒤를 이어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줄 후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짐작컨대 나츠코가 납치된 이유도 앵무새들이 나츠코의 아기를 손에 넣음으로써 현 세계를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지하 세계는 천의 의지로 만들어진 열린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의지로 만들어진 닫힌 세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이다. 자기 세계에 대한 고집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스스로를 상실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설명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입체성’을 꼽았다. 여기서 입체성이란 말하자면 다양한 면이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가진 독특한 개성은 그가 가진 여러 가지 면이 좌충우돌하면서 입체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지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자기 세계를 고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말하자면 단면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대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과 행동에서 생동감을 느낀다. 캐릭터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이 생동감의 이름이다. 만약 생동감이 없다면, 특정한 면만을 보여주려는 강박에 빠져 있다면 우리가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캐릭터가 아니라 자폐이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 지하 세계로 들어왔지만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히려 마히토를 구원하는 것은 나츠코가 된다. 왜냐하면 나츠코의 존재로 말미암아 마히토는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츠코 없이 처음 탑을 발견했을 때 그 틈새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면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떠나고만 싶었던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하고 무덤 주인의 충실한 수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마히토가 무엇보다 원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 세계였으니까. 하지만 나츠코로 인해 마히토는 자신의 의지로 만들 수 있는 닫힌 세계 대신 자기 자신을 산산조각 내는 열린 세계를 선택하게 된다. 이 열린 세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인 <언제나 몇 번이라도>의 가사를 빌린다면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거울에도 새로운 풍경이 비치’는 입체적인 세계이다.
말하자면 마히토는 원래 세계로 돌아오지만 그곳은 처음 떠날 때의 세계가 아니다. 마히토가 떠나고자 했던 곳이 강요된 아버지의 세계였다면 돌아온 곳은 스스로 선택한 어머니의 세계이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부르는 호칭은 씨에서 이모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로 바뀌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강요나 주변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나츠코를 데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는 마히토의 의지에서 비롯된 변화이다. 소년은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지만 다시 세계로 복귀한다. 그리고 이 복귀에의 의지는 자기 세계의 고집이 아닌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히미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너를 낳는 멋진 경험”을 위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요컨대 어머니의 세계란 자기보다 소중한 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군국주의 혹은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세계와 사랑과 희생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세계를 양립시켜 전자를 자폐적인 세계로 그리고 후자를 입체적인 세계로 묘사한다. 영화의 배경인 1944년과 전후 양상을 전쟁을 일으킨 남성-가부장-전체주의와 전쟁을 수습하는 여성-모성-공동체의 관계로 본 셈이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한국전쟁 이후를 다룬 김원일 작가의 <마당 깊은 집>이나 박완서 작가의 <그 남자네 집>에서도 전쟁을 수습하고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를 건사하는 것은 여성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들이 남성을 가해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역시 남성-가부장-전체주의의 관계를 지적할 뿐 남성 자체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모든 여성이 전쟁을 수습하는 게 아니듯 모든 남성이 세계를 폐허로 만드는 게 아니니까. 이 영화에서도 아버지는 허세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될 뿐 괴물로 등장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무언가를 남성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남성에게 그런 속성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진인의 예를 들었듯 선험적으로 태어나는 진인이 있는 게 아니라 진인의 자세를 가지려는 자만이 진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누가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이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우리는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는 결정할 수 없고 어떻게 살 것인가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으로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이렇다.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열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하나의 의지가 만드는 세계로 끊임없이 유혹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가 만드는 세계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지키는 행위 그 자체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 지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경험을 너무나도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미가 마히토를 낳기 위해 죽음이 예정된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단박에 이 영화가 좋아졌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된 미오는 타쿠미를 만나 아이를 낳으면 병으로 죽게 된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미래를 바꾸지 않고 타쿠미를 만나러 돌아간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죽음이 예정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구도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을 선택하는 것은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받은 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삶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생명을 조합해서 삶으로 만드는 일은 개인의 몫이다. 삶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히미와 미오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시간과 공간과 생명을 포기하는 대신 삶을 가져간다. 원래 삶이란 시간과 공간과 생명을 대가로 얻는 것 아닌가. 건전한 야심을 품었음에도 끝내 지하 세계가 위태롭게 유지되다가 붕괴되고 마는 것은 큰할아버지가 만들기로 선택한 것이 삶이 아니라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세계를 만들면 좋은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계는 모두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삶을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만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자주 묻게 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답은 알 수 없지만 답을 찾기 위한 올바른 질문은 앞서 예로 든 두 편의 영화를 빌려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23년 11월 22일부터 2023년 12월 12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