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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Nov 20. 2023

영화 이야기 <블루 자이언트>

<플라워 킬링 문>을 보러갔다가 우연히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다. 본편을 보지 않아도 한 눈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는 영화였다. 예고편이 다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어감으로 들린다는 걸 안다. 하지만 <블루 자이언트>는 예외다. 나는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면서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꼈다. 예고편에서 느낀 것이 온기라면 본편에서는 열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때론 알 수 없는 결말로 유혹하는 이야기보다 정해진 결말로 직진하는 이야기가 관객을 울린다. 목적지를 안다고 해서 누구나 그곳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해피 엔딩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엔딩까지 식지 않는 체온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를 예매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영화는 예상과 기대를 빗나가지 않아서 역시나 내 체온을 덥혀주었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어떤 한기를 느꼈다.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으나 이 눈물은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결빙이 있었다. 어쩐지 속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원래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쓸 때 열정에 대해 쓰려고 했다. 영화 속 설명에 따르면 <블루 자이언트>는 푸른빛을 내면서 타들어가는 별을 말한다. 푸른 불꽃은 붉은 불꽃에서 태어나지만 붉은 불꽃을 집어삼키면서 타오른다. 우리는 불이 붉은색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푸른 불꽃은 우리가 모르는 불이다. 붉은 불이 뜨겁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푸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알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온도는 나와 세계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모르는 온도는 우리를 어떻게 변하게 할 지 알 수 없다. 이 온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되고 또 그런 우리로 말미암아 세계가 어떻게 될 지도 알 수 없다. 말하자면 푸른 불꽃은 우리 내부에서 태어나서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바꿔버리는 변화의 화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한기는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블루는 원래 차가움의 색 아닌가. 블루는 바다의 색이며 우울의 색이고 냉정의 색이다. 바다가 표면은 파랗고 이면은 어두운 것처럼 우울은 일상은 파랗지만 내면은 검게 얼어붙어 있다. 어쩌면 <블루 자이언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말하는 게 아닐까. 물론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푸른 불꽃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속에 숨겨진 파란 얼음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물론 간단히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열정의 반대말은 우울이라고. 그러나 그렇다면 열정과 우울은 왜 붙어다니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하나. 푸른 불꽃의 열정


<블루 자이언트>는 세계 최고의 재즈니스트를 꿈꾸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면 미야모토 다이는 눈이 내리는 겨울의 천변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다. 금속은 온도가 낮으면 얼어붙어서 다이는 금세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마우스피스를 끼우는 와중에 문득 고양이가 지나가고 다이는 친구를 대하듯 환하게 인사한다. 이 시퀀스는 짧지만 미야모토 다이가 어떤 사람인지 단숨에 설명한다.


악기는 원래 연습실에서 연습한다. 바깥으로 울리는 소리가 커서 가정에서 연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피아노는 헤드셋을 끼고 연습할 수도 있지만 헤드셋으로 들어오는 소리와 악기 자체가 공명하는 소리는 다르기 때문에 피아노 연주자도 연습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꼭 소음 때문에 연습실을 이용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건 집중력 때문이다. 밖에서 연습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말을 거는 취객이 있을수도 있고 어쩌다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여름에는 벌레가 달라붙고 겨울에는 몸이 얼어붙는다. 무엇보다 연습이란 어떻게 생각하면 알몸으로서의 자신이다. 누구도 알몸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다이가 천변에서 연습하는 모습은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색소폰에 대한 그의 열정이다. 한겨울에 천변에서 연습하는 이유는 아마도 연습실을 구할 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이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직업도 없다. 불고 있는 색소폰도 그의 형이 빚을 내서 사준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색소폰을 연습하기에 충분한 환경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싸우면서 색소폰을 불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다. 다이는 앞에서 말한 야외 연습의 단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견디거나 참는 것이 아니다. 견디거나 참는 자는 지나가는 고양이를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걸지 않는다. 다이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나는 와중에도 고양이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몸과 다르게 영혼은 조금도 얼어붙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기한 일이다. 색소폰은 금속이기 때문에 장갑을 껴도 차갑다. 게다가 손가락 감각을 익혀야 하므로 손가락은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다. 거기에 입술이 찢어져서 나는 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온도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이 추위는 가난의 온도이며 가난의 다른 이름은 무력함이다. 다이는 무력함에 포위되어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다이가 영하의 온도 속에서도 고양이를 향해 그러니까 세계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줄 수 있는 열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콕 집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나는 그게 다이가 말하는 ‘세계 최고의 재즈니스트’는 아니라고 믿는다. 세계 최고의 재즈니스트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일은 물론 온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로 만든 온도는 순식간에 식어버린다. 가라타니 고진은 어떤 결과에 있어 ‘하나의 원인’을 확정하려고 하는 것은 신학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재즈니스트라는 이미지는 잠시 체온을 올려줄 수는 있어도 영원히 뜨거운 온도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미지는 단일한 것이고 삶은 복합적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무수한 상자를 가지고 있고 그 상자들은 모두 제각각의 열쇠를 갖고 있다. 모든 상자를 열 수 있는 마스터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이가 한겨울에 천변에서 색소폰을 연습하는 것 그리고 그 연습이 그에게 고통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언젠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먼 훗날의 이미지 덕분이 아니라 바로 그 연습이 지금을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지가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충만한 삶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가령 다이가 연습을 할 때마다 고통과 절망을 느낄 뿐이라면 그래서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괜히 성질을 부리고 싶어진다면 세계 최고의 재즈니스트 같은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다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스스로의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다이는 자신이 색소폰을 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본 재즈 공연이었다고 말한다. 아마 다이는 그 공연에서 색소폰 소리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모습에 스스로를 이입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잊히지 않는 멜로디를 흥얼거렸을 수도 있고 잠자리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꿈의 발견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적합한 말은 바로 ‘자기 세계의 발견’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변용하자면 사람은 가까이서 보면 다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대개 비슷하다. 이 비슷함은 외양이나 성격에 기인한 게 아니라 정체성에 의한 것이다. 가령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이집을 가고 의무 교육 과정을 거쳐 대학에 가거나 취업한다. 또한 쇼핑몰에서 자주 보이는 20대 남성 혹은 30대 여성 같은 카테고리는 정말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다면 성립이 불가능한 개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지만 누구나 범주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끝내는 ‘같은 세계의 일원’이다.


다이에게 재즈 공연은 이 ‘같은 세계의 일원’인 다이로 하여금 ‘낯선 세계’를 보여준 것과 같다. 그가 우연히 발견한 낯선 세계는 그곳에 있지만 타인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들어갈수도 없다. 오직 자신만이 입장할 수 있는 세계이자 자신만의 역사를 써나갈 수 있는 시공간. 이것을 일러 ‘자기 세계’라고 한다. 판타지 서사의 클리셰 중에 단체 여행 중 혼자서 길을 잃고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자기 세계의 발견에 대한 비유다. 말하자면 다이는 재즈 공연을 통해 N분의 1이 아닌 1이 될 수 있는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이 세계로 들어온 순간부터 세계는 겉으로 보이는 풍경과 사물은 기존 세계와 똑같아도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같은 세계에서 질서는 공유되는 것이었고 의미는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그것을 얼마나 수용하고 재생산하느냐가 삶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자기 세계에서 질서를 만드는 것은 나이며 사물과 행동의 의미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가난한데 색소폰에 미쳐서 취직을 하는 대신 한겨울에 천변에서 색소폰을 부는 남자는 사람들이 보기에 고통을 자초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 말은 맞다. 다이는 분명 집에서 보일러를 켜고 귤을 먹으면서 TV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는 천변에 나와 입술이 찢어지고 손가락이 얼어붙어가면서 색소폰을 분다. 입술이 찢어지고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니 사람들 말대로 다이는 고통을 자초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통과 다이가 생각하는 고통은 의미가 다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통은 가난과 절망 그리고 무력함과 통증이다. 반대로 다이에게 고통은 자신이 발견한 낯선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의 산물이다. 요컨대 사람들에게 다이의 고통이 생을 허물어뜨리는 일인 반면 다이에게는 생을 건설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다이가 한겨울의 천변 연습을 부끄럽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미소 짓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를 둘러싼 세계는 바로 자기 세계이기 때문이다. 같은 세계는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므로 나는 세계와 친밀하지 못하다. 사람과 똑같다. 모든 사람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나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 나는 그(그녀)와 있어도 별로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그(그녀)는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대할 것이고 그 말은 나는 그(그녀)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세계에서 나는 유일하다. 나는 이 세계를 탐험하고 건설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가 없으면 세계는 무너진다. 당연히 나는 이 세계에 친밀감을 느끼는 한편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나의 ‘중요성’도 느낀다.


세간에서 말하는 꿈이 이 ‘자기 세계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의 진정한 역할은 경제적 혹은 사회적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세계의 발견이다. 멈추었던 심장이 뛰고 그로 인해 나의 온도는 올라가며 나는 그 뜨거움 속에서 열에 취해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그려낸다. 환상은 열기의 산물이다. 뜨거울 때 나는 비로소 상상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상상할 수만 있다면 내 안에는 아직 뜨거운 것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상양전에서 처음 덩크를 성공했을 때 “심장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아마 그때가 그가 자기 세계를 발견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인간의 체온은 대개 36.5도이며 이때 피는 붉은색을 띠며 돌고 있다. 하지만 자기 세계를 발견한 인간의 피는 뜨겁게 끓어오르며 파란 희망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희망이야말로 바로 <블루 자이언트>가 불고 두드리고 때리면서 들려주고자 했던 푸른 불꽃이다. 희망의 가치는 먼 훗날의 실현 가능성에 있는 게 아니다. 희망은 바로 그 순간을 충만하게 만들 때 가치있는 것이 된다.



둘. 파란 얼음의 우울


그렇다면 <블루 자이언트>는 자기 세계의 발견에 대한 영화인가? 내가 속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루 자이언트>의 세 주인공들, 다이와 유키노리, 슌지는 모두 재즈를 통해 자기 세계로 들어간다. 다이는 한겨울에 천변에서 연습하는 고통도 마다않고 유키노리는 당장 재즈 공연을 할 수 있는 팀으로부터 제안을 받지만 그들이 현실에 안주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슌지는 초보자면서도 학업까지 포기하고 드럼에 매달린다. 이들은 분명 재즈로 말미암아 자기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블루 자이언트>의 이야기는 자기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공 신화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만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보고 있는 다이와 유키노리, 슌지의 이야기가 현 시점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의 성공한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영화는 인터뷰를 통해 다이와 유키노리 그리고 슌지 중에서 오직 다이만이 세계적인 재즈니스트가 되는데 성공했다는 점을 미리 알려준다. 즉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고’되고 있다.


회고는 뒤돌아보는 것이다. 다만 그냥 과거의 사건들을 뒤돌아보기만 하는 게 아니다. 회고는 원근법의 구조와 같다. 원근법은 화가의 눈을 기준으로 해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설정하는 회화적 기법이다. 말하자면 먼 것과 가까운 것은 화가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회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일어났던 무수한 일들은 주체의 관점에 의해 선형적으로 재구축된다. 회고하는 자의 인생은 그가 돌아보는 시점에 그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 어린 날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 나이를 먹을수록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다. 그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사건을 돌아보는 시점과 관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블루 자이언트>의 이야기는 성공한 자의 회고다. 이 영화는 자서전은 아니지만 전기 작가가 쓴 성공 신화처럼 읽힌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는 모두 다이에 관한 이야기이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다이의 조력자이거나 다이가 어떤 인물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존재로만 등장한다. 일어나는 사건들 역시 다이의 성장을 촉구하는 촉매제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은 다이라는 한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복무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이야기가 자서전적 회고의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일어나는 순간 곧바로 의미를 획득하지 않는다. 사건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특정 관점 하의 서사에 편입되었을 때다. 예를 들어서 다이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천변에 했던 연습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겨울에 밖에서 연습하면 오히려 손가락의 감각을 해친다거나 차가운 공기를 많이 마시게 되어서 폐활량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식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천변 연습이 열정과 노력을 상징하는 의미를 부여받는 것은 그가 성공한 자리에서 그 일을 성공 신화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다이의 천변 연습은 그 자체로만 보면 꿈을 위해 노력하는 자기 세계의 서사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의 성공신화에 편입되면서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성공한 자의 과거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블루 자이언트>의 모든 인물들은 다이와 접촉하는 순간 즉시 의미를 부여받는다. 재즈바의 사장은 조력자가 되고 유키노리와 슌지는 동료가 되며 첫 공연에 참석한 관객은 그들의 성장 스토리를 지켜보는 보증인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인물들은 단독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다이를 위한 역할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극단적인 사례로서 유키노리는 마지막에 사고를 당하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력을 소진함으로써 자기가 쌓아온 서사를 다이의 히스토리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다이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다이를 위해 복무하고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가 다이의 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과 사람을 겪지만 그 무수한 사건과 사람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즉시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과 겪은 사건의 의미를 곧장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삶을 전진하는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회고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의미의 추출은 지금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먼 훗날의 내가 돌아본 지금, 즉 과거를 살아가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현재를 산다. 따라서 과거를 산다는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이상적인 형태의 나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할 때 가능하다. 요컨대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인간의 삶.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삶이다.


내가 <블루 자이언트>를 보면서 속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꿈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기대했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도구로 바꿔버리는 나르시시스트의 이야기를 기대하진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꿈, 즉 자기 세계의 발견은 세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 꿈이 경제적 혹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도구로 바뀌어버릴 때 자기 세계는 자폐적인 세계가 되고 만다. 자기 세계의 발견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어서 자기 세계를 발견한 사람, 이른바 드림워커는 누구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 세계란 오직 자신이 발견한 것만이 유일하다. 드림워커가 세계의 문을 연다면 나르시시스트는 세계의 문을 닫는다.


<블루 자이언트>는 꿈을 향해 전진하는 드림워커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나르시시스트적 관점으로 연출되었다. 한겨울에 천변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얼어붙은 손가락과 공사장에서 일하면서도 지친 몸으로 다시 색소폰을 드는 다이의 모습은 나를 얼마간 눈물짓게 했지만 이 눈물은 천편일률적인 다이의 성공신화 앞에서 차갑게 말라버렸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자의 이야기는 뜨겁지만 꿈이 성공을 위해 복무하는 이야기는 차갑다. 러닝 타임 내내 타오르기만 하는 다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한기를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 불꽃이 미지를 향해 길을 내는 다이너마이트의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길을 연출하는 특수효과의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블루 자이언트>가 스스로를 산화하는 푸른 불꽃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공에 복무하는 냉철한 서사, 이른바 파란 얼음의 이야기였다.



2023년 11월 12일부터 2023년 11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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