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7년을 맞은 서울무용영화제를 찾았다.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두 관을 빌려 진행하는 행사였고 11월 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이었다. 방문한 날은 사흘째인 11월 3일이었는데 이날은 하루 종일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흐렸다. 세상이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가운데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의 체온은 모닥불 같았다. 국제영화제에서 느껴지는 것이 열기라면 지역영화제에서 느껴지는 것은 온기다. 뜨거운 순간은 삶을 감동시키고 따뜻한 순간은 삶이 얼어붙지 않도록 막는다. 극장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이 난무한 가운데 영화제는 그 대답 중 하나다.
제7회 서울무용영화제의 표어는 Re-Engaging throuth SeDaFF다. 해석하면 서울무용영화제를 통한 다시 참여하기 정도가 될 텐데 이 참여의 보이지 않는 목적어는 삶일 것이다. 무용은 몸짓이고 몸짓은 운동이다. 몸이 움직이는 한 삶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다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개막작인 <라이즈>를 포함해 이번 영화제의 초이스인 <그녀에게>, <하나와 앨리스>, <해피투게더>는 모두 몸짓을 통해 삶으로 복귀하는 영화들이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개막작 <라이즈>와 초이스 중 두 편의 영화 <하나와 앨리스>, <해피투게더>를 통해 몸짓과 삶의 이야기에 대해 읽어보려 한다.
하나. <라이즈> 의미의 몸짓
개막작부터 읽는다. <라이즈>는 인생의 절정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발레리나의 이야기다. 엘리즈는 <라 바야데르> 공연 중 발목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고 의사로부터 춤을 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선고를 받는다. 낙심한 엘리즈는 친구를 따라 모텔에서 서빙과 요리를 하며 요양하던 중 현대무용단에 합류하게 되고 마침내 다시 무대에 오른다.
<라이즈>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르는 영화다. 두 갈래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영화는 수많은 대비를 통해 묻는다. 엘리즈가 발목을 다친 건 남자친구의 외도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발목을 혹사시켰기 때문인가. 전통 의학은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고 대체 의학은 움직이라고 말하는데 정확한 진단은 어느 쪽인가. 고전 무용은 꿈을 향한 도약이고 현대 무용이 바닥을 뒹구는 현실의 체험이라면 진정한 삶의 몸짓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느 하나는 정답이고 어느 하나는 오답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라이즈>는 이 모든 것이 정답이라고 말한다. 엘리즈가 발목을 다친 건 남자친구의 외도로 인해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이면서 혹사당한 몸이 그 불균형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통 의학은 발목에게 휴식을 주었고 대체 의학은 발목을 재활시켰다. 현대 무용을 하는 와중에 엘리즈의 다리가 점점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얼핏 대체 의학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그녀를 달리게 하는 것은 전통 의학의 진단이다.
고전 무용과 현대 무용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몸짓인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엘리즈는 고전 무용을 하다가 다쳤지만 그녀가 현대 무용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전 무용을 수련했기 때문이다. 고전 무용은 그녀에게 한계를 보여준 동시에 한계까지 가고자 하는 열망도 선물했다. 그녀의 재능을 꽃 피우는 것은 현대 무용이지만 봉오리만이 꽃이 아니다. 뿌리까지 포함해야 꽃이다. 고전 무용이 위로 솟구치고 현대 무용이 바닥을 구른다고 해서 이 상승과 하강 사이에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새가 아니므로 솟구친 몸은 반드시 지면으로 떨어지게 마련이고, 떨어진 몸은 구르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삶은 상승과 하강 어느 쪽이 아닌 순환이다.
<라이즈>는 두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이 진정한 삶인가라고 묻는 우리에게 둘 다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모텔 주인은 고통도 의미를 품는다고 말했고 엘리즈의 어머니는 삶이 주는 모든 기회를 누리라고 말했다. 고통마저도 삶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삶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이 의미로 충만하다고 해야 맞다. 실제로도 그렇다. 고전 무용이나 현대 무용만이 의미 있는 몸짓이 아니다. 요리를 하는 것도 노래를 하는 것도 딸의 공연을 보기 위해 걷는 것도 모두 의미 있는 몸짓이다.
인간은 몸짓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삶을 의미로 충만하게 만들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은 의미 있는 몸짓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몸짓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엘리트 무용가 엘리즈에게 삶이란 발끝으로 서서 가장 높은 곳을 쳐다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발목을 다친 아르바이트생 엘리즈는 삶은 발끝이 아니라 온몸으로 지지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 <라이즈>의 무용은 곧 의미를 발견하는 몸짓이다. 이 영화 속에서 인간의 몸은 의미로 충만하다.
둘. <하나와 앨리스> 자유의 몸짓
<하나와 앨리스>에서 무용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십중팔구 앨리스가 오디션장에서 발레를 추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좋은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왜 아름다운가. 바로 앨리스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무대여서 넘치는 끼를 발산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앞선 수많은 오디션에서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앨리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이유는 긴장해서가 아니라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연기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는 이미 생을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슬픔을 연기해 보라고 한다면 어떨까. 즐거운 사람에게 즐거움을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것과 다른 슬픔, 이것과 다른 즐거움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앨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오디션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연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당한 것이다.
앨리스가 마사시의 전 여자친구가 된 것은 하나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딸의 자리를 부정당한 것 역시 엄마와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하나에 의해 친구에서 연적이 되고, 엄마로 인해 딸에서 옆집 아이가 되며, 아빠로 인해 현재의 딸에서 과거의 가족이 된다. 그리고 앨리스는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이 역할들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른 자리를 강요했지만 앨리스는 그들이 원래 자리에서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아니라 연적이 되어야만 하나와 친구로 지낼 수 있다. 옆집 아이인 척해야 엄마의 딸로 남을 수 있고 과거의 가족인 것처럼 해야 아빠를 또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앨리스의 삶은 타인의 기대를 연기하는 삶이면서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를 연기하는 삶이다. 그녀는 소중한 것을 위해 소중한 것을 억압한다. 연예계 지망생이 되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도 연예인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좀 더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의 기대를 연기하며 사는 앨리스가 처음으로 자신의 기대를 요구하는 인물이 생긴다. 바로 마사시다.
처음에 앨리스는 전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말하는 기억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 되어간다. 가령 바닷가에서 카드 놀이를 했다는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카드 놀이를 같이 했던 사람은 마사시가 아니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건 아버지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앨리스는 마사시를 자신의 기억 속 아버지의 위치로 이동시킨다. 현재 아버지의 부재로 쓸쓸해진 기억은 그 자리에 마사시를 놓음으로써 충만해진다. 하나와 엄마, 아빠가 자기에게 그랬듯 앨리스는 스스로를 위해 마사시를 그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다.
모든 것이 밝혀진 다음 앨리스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녀가 마사시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기억상실증이라고 속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이유는 그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위치로 제멋대로 옮겨놓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앨리스는 자신이 억압당한 방식으로 마사시를 억압했다. 그런데 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의 전환이 앨리스로 하여금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마사시가 앨리스에게 건네준 카드는 마사시가 아닌 아버지와 했던 카드 놀이에서 사용한 카드였다. 말하자면 앨리스가 마사시를 아버지의 위치로 이동시켜 가짜 기억을 향유하고 있을 때 마사시는 그 속에서 진짜를 들고 온 것이다. 이 진짜는 앨리스에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하는데 하나는 기억을 왜곡한다고 해서 가짜 기억이 진짜 기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카드 놀이는 두 번 있었고 앨리스가 주운 것이 오늘의 카드라면 마사시가 주운 것은 그날의 카드였다. 두 카드는 똑같은 하트 A지만 뒷면은 다르다. 요컨대 기억이란 모습을 재현할 수는 있어도 의미를 재현할 수는 없다. 그날의 카드는 그날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앨리스에게 절망이 되지는 않는다. 앨리스가 깨닫는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시간이 흘러 잃어버리거나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앨리스가 마사시를 아버지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은 그 자리에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재의 아버지가 그날의 아버지가 아니므로 그날의 아버지도 사라져 버렸다고 앨리스는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앨리스가 타인의 기대대로 자신을 연기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데 그건 바로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이전까지의 자신의 모습이 사라져 버릴 거라는 심리이다. 다시 말해 마사시의 전 여자친구를 연기하지 않거나 옆집 아이를 연기하지 않으면 원래 그들에게 친구이자 딸이었던 자신은 더 이상 친구나 딸이 될 수 없을 거라고 앨리스는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마사시가 준 카드로 인해 앨리스는 오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과 다르더라도 과거의 자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그녀가 연기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의 기대지만 본질적으로는 과거의 자기 자신이었던 셈이다.
과거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앨리스는 새로운 자기 자신을 연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오디션장에서 항상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유다. 반대로 마지막 오디션장에서 그녀가 발레를 출 수 있는 이유는 더 이상 과거의 자기 자신에 억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이즈>에서 고전 무용은 꿈을 향한 상승의 열망이라고 했다. 앨리스는 지금 미지의 자기 자신을 향해 날아오르는 중이다. 그러니 <하나와 앨리스>의 무용은 자유의 몸짓이다. 그녀는 바로 이 순간 해방되었다.
셋. <해피투게더> 지탱하는 몸짓
<해피투게더>의 춤은 탱고다. <여인의 향기>에서 알파치노가 분한 프랭크는 탱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실수하면 스텝이 얽히고, 그게 바로 탱고”. 말하자면 탱고란 잘못 딛은 걸음으로 나아가는 춤이다. 삶에 비유하면 방향을 잃어버린 자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를 때 사람은 방향을 잃어버린다. 왕가위 감독은 방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보여주기 위해 두 명의 남자를 우리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들은 남미 대륙 한복판에 있는 아시아인이며 동성애자다. 인종적으로 성적으로 계급적으로 소수자인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의 선택지다.
바로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떠나거나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아서 함께 하는 것. 전자가 보영이라면 후자는 아휘다. 보영은 아휘에게 항상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사람의 시작은 출생이고 끝은 죽음이다.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없으므로 누구도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삶을 단절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하지만 보영은 새로운 인생을 살지 못한다. 그가 아휘에게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것은 바꿔 말하면 다시 끝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영은 홍콩에서 아휘와 다시 시작하고 아르헨티나로 와서 다시 끝내버린다. 보영의 삶은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아니라 같은 자리를 맴도는 삶이다.
왜 그는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가. 보영은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새로운 삶이 어떤 삶인지는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지금의 삶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것이다. 현재의 삶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삶이 충만할 때 떠오른다. 열 다섯 소녀인 안네 프랑크도 일기에서 말하지 않았나. “죽음과 절망 위에 희망을 쌓아올릴 수는 없”다고. 그러니 보영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 즉 다시 시작하고 싶어지는 것은 바로 아휘와의 삶이 그를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영은 이것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그는 아휘를 떠난다. 아휘가 여권을 감추었을 때 불같이 화를 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보영은 아휘가 발목을 붙잡는 존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떠나고 싶은 충동 이른바 그가 발견한 삶의 가능성은 아휘와 함께 있을 때 발견한 것이므로 아휘로부터 멀어질 때 소멸한다. 방향을 상실하는 순간 갈 곳 없는 에너지는 스스로를 학대하기 시작하고 그는 퇴폐와 방종으로 자학하다가 아휘에게로 돌아온다. 아휘는 늘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보영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저기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아휘가 떠난 자리에서 보영은 깨닫는다.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너와 함께 있을 때만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아휘를 잃고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보영은 서럽게 운다.
아휘는 왜 떠났을까. 보영이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난 것이라면 아휘에게는 사람이 장소다. 그가 아르헨티나로 오고 또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은 새로운 삶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보영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휘는 사람 안에 머물고 사람이 없으면 갈 곳을 잃어버린다. 의지하는 타인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의지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홀로 걷지 못하는 그가 돌아오려는 보영을 외면하고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낯선 구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는 구절이다. 이 말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기다리는 것은 서 있는 것이지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아휘가 이 시를 읽었다면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휘가 서서 기다렸던 사람들은 모두 아휘를 떠나갔다. 그래서 아휘는 가면서 기다리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홀로 걷는 걸음이 아니다. 아휘는 보영 없이 이과수 폭포에 가지만 그곳에서 한 생각은 보영의 생각이었다. 요컨대 그는 마음 속에 보영을 데리고 함께 간 것이다. 홍콩의 야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장의 사진을 몰래 가지고 나온 이유는 장과 함께 있기 위해서다. 아휘는 겉으로 보기에 홀로 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를 떠난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며 가고 있다.
보영과 아휘는 걸어가는 방식은 다를 지언정 결국 홀로 걷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탱고란 다름 아닌 홀로 걷지 못하는 자들이 함께 추는 춤 아닌가. 혼자서 걷지 못하는 자는 넘어진다. 그러나 함께 걸음으로써 서로가 지지대가 되어주기 때문에 이 잘못된 걸음은 춤이 될 수 있다. 나의 엇갈린 걸음이 너의 엇갈린 걸음과 교차할 때 역설적으로 삶은 균형을 찾는다. 보영의 삶과 아휘의 삶은 각각 균형 잡힌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을 때 그곳은 새로운 삶을 발견하거나 혹은 새로운 삶을 향유하는 사랑의 공간이 된다. 사랑은 삶을 지탱한다. 탱고, 즉 <해피투게더>의 무용은 서로를 지탱하는 몸짓이다.
이렇게 해서 서울무용영화제의 세 영화를 읽었다. 각각 의미와 자유, 지탱이라는 키워드로 읽긴 했으나 종합하면 이것은 결국 다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올해의 표어 Re-Engaging이라는 말처럼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바깥으로 내몰고 또 다시 참여하기를 요구한다. 살아있는 한 삶을 아예 떠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끝내 다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다만 어떤 티켓을 가지고 재입장할지가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의미일수도 있고 자유일수도 있고 함께 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좋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몸짓을 통해 삶으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이번 서울무용영화제의 테마다. 방향을 생각하느라 서 있을 필요는 없다. 움직이면 길이 된다. 그 길의 이름을 붙이는 건 끝에 도착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2023년 11월 4일부터 2023년 11월 8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