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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22. 2024

영화 이야기 <듄>

예전에 언더아머라는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를 본 적이 있다. NBA 선수인 스테판 커리가 나오는 광고였는데 수천 명의 스테판 커리가 공을 바닥에 튕기는 단순 동작을 연습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지는 내용이었다. 그때 광고의 카피라이터가 인상적이어서 불러와 본다. “YOU ARE THE SUM OF ALL YOUR TRAINING” 직역하면 너는 네가 했던 모든 훈련의 총합이다 정도가 될텐데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동기부여로서는 좋은 말일지 몰라도 이 말은 완전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했던 일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았던 일의 총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젠가 너는 네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후회하게 될 거라고. 우리가 한 일은 우리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만 하지 않은 일은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한다. 결국 우리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하지 않았던 일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것을 함으로써 달라질 수도 있었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달라지지 않은 삶을 생각한다. 달라지지 않은 삶은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대개 본인이 한 일의 결과는 수용해도 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니 달라지지 않은 삶은 납득할 수 없는 삶이다.


영화 <듄>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삶을 짊어지게 된 소년의 이야기다. 폴은 아트레이데스 가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가주의 계승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황제와 하코넨 남작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가문이 몰락하자 가문의 복권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복수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니 게세리트가 양성하고 있는 메시아의 후보이기도 하다. 폴의 어머니는 무녀이며 여자만 배울 수 있는 무녀의 기술을 폴에게 가르쳤다. 꿈에서 미래를 보고 이따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폴이 원했던 것은 복수자도 구원자도 아니었다.


폴이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은 책임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폴은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되었고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할 의무가 생겼다. 살해당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살해자에 대한 복수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폴은 망설인다. 가문의 계승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을 계승하고 복수에 성공하면 전 우주에 거대한 종교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꿈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폴은 선택해야 한다. 개인적인 복수심을 접고 전 우주가 전쟁의 광기에 휘말리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피의 복수를 한 뒤에 그 피가 멈추지 않고 세상을 물들이는 것을 지켜볼 것인가.


결과적으로 폴이 선택한 것은 후자다. 그는 아트레이데스 공작의 직위를 계승하고 하코넨과 황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꼭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우주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베니 게세리트의 수장인 모히암과 대면할 때 폴은 꿈에서 미래를 보지만 그 일이 모두 현실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전 우주가 메시아의 이름을 외치면서 광기의 혈투를 벌이는 일은 어쩌면 예지가 아니라 황제와 하코넨이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 너무나도 무력한 현재의 자신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꿈은 예지가 아니라 두려움의 반영일수도 있다는 얘기다.


예지는 신과 운명에 관한 것이므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은 인간의 것이다. 폴의 꿈이 현실로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이유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베니 게세리트는 무녀 집단이고 그들의 능력은 여성에게 특화되어 있어서 폴의 내부에서 매끄럽게 조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말은 폴에게 베니 게세리트의 능력만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이 살아있다는 뜻도 된다. 베니 게세리트의 능력은 예지나 타인을 조종하는 목소리 같이 초인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그 힘은 자신의 의지를 신에게 위임하고 나서 얻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신의 노예다. 그러나 인간은 예지도 없고 타인을 조종할 수도 없지만 스스로의 주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폴의 꿈이 무조건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신이나 운명 같은 인간 외부의 힘과 의지와 판단 같은 인간 내부의 힘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인물을 촬영할 때 아주 가까이서 찍거나 혹은 아주 멀리서 찍었는데 그로 인해 인물은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혹은 사막의 보잘 것 없는 일부처럼 보인다.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 그들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그들 자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끝없는 사막을 방황하고 있거나 거대한 샌드웜 앞에 섰을 때 그들의 운명은 자연이나 신 같은 인간 외부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휘말릴 것 같다.


그러니 폴이 아트레이데스 공작을 계승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우주를 지배하는 대가문 중 하나의 후계자에서 모든 것을 잃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전락한 운명은 폴의 선택이 아니다. 오히려 폴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폴은 이 운명을 수용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만약 꿈에서 본 종교전쟁 때문에 복수를 포기한다면 폴은 또 한 번 무기력하게 운명을 수용하는 셈이 된다. 그러니 폴이 가문을 일으키고 복수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꿈에서 본 일이 항상 이루어졌다면 폴은 싸우기로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하나로 인해 전 우주를 종교전쟁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꿈이 항상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지가 생길 수 있었다. 꿈이 항상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베니 게세리트의 힘과 충돌하는 인간이 힘 때문이라면 결국 그로 하여금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내겠다는 결심을 도와준 것은 신이나 운명 같은 초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힘이다. 인간의 힘은 예지를 무용으로 만들었다. 요컨대 무용한 인간의 힘이 신의 노예를 자유인으로 해방시킨 것이다.


물론 자유인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게 곧 승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폴이 아라키스에서 죽음을 예언했던 던컨은 실제로 폴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다 죽는다. 예지는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던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죽음은 폴의 예지 이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이미 오래 전에 결정한 무인이기 때문이다. 폴의 입장에서 그의 죽음이 신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도 던컨의 입장에서 이 죽음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는 피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맞서다 죽었다. 노예는 맞서지 않는다. 오직 자유인만이 맞설 수 있다.


폴이 가지고 있는 예지는 프레멘과의 만남에서 거의 무력화된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피 묻은 손으로 사막을 걸어가던 챠니는 가장 가까운 아군이 되고, 관용적인 스승으로 나왔던 자비스와는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인다. 심지어 자비스와의 결투 직전에 폴이 본 이미지는 그의 칼에 찔려 죽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비스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폴이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폴이 자비스를 죽이고 소년에서 무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꿈꾸는 아이에서 현실을 만드는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비유처럼도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 죽은 것은 자비스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꿈속을 헤매기만 했던 과거의 자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폴이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수록 오히려 프레멘들의 메시아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프레멘의 종교는 베니 게세리트의 수장인 모히암의 언급에 의하면 오래 전 그들이 퍼뜨려놓은 씨앗이다. 프레멘의 메시아가 리산 알 가입이라면 베니 게세리트의 메시아는 퀴사츠 헤더락이라고 부르는데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종교가 서로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은 종교의 자생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두 종교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스파이스를 주수입원으로 삼고 있는 황실 편의 베니 게세리트와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은 이제 뿌리와 상관없이 공생할 수 없는 관계다. 어느 쪽 메시아가 먼저 등장하느냐에 따라 집단의 명운이 갈린다. 


착취자와 피착취자라는 차이를 제외하면 두 집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메시아를 대하는 태도다. 프레멘에게 메시아는 예정된 인물이며 그들을 낙원으로 이끌어줄 신의 대리인이다. 그러나 베니 게세리트는 혈통의 교배를 통해 메시아를 생산하려고 한다. 베니 게세리트에게 메시아는 여신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자가 아니라 무녀의 자궁에서 만들어지는 자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마리아가 신의 지위에 올랐듯이 메시아를 낳은 자는 신이 된다. 베니 게세리트가 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들은 신, 정확히 말하면 신의 자리를 원한다.


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를 선택한 폴이 너무도 인간적인 베니 게세리트가 아니라 광신에 가까운 프레멘의 메시아에 가까워진다는 점은 특이하다. 어쩌면 이것은 진정한 운명 혹은 신의 존재를 증언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논법으로 본다면 인간은 운명을 거스를수록 운명에 다가간다. 폴이 유일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프레멘의 구원자가 된다면 꿈에서 본 종교전쟁은 정말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순수한 광신도는 신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인간을 믿지 않는 자는 인간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영화 <그을린 사랑>에서 이미 오이디푸스 왕을 소환한 적이 있다. 그러니 그가 그리스 비극을 차용해서 <듄> 시리즈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을린 사랑>을 통해 이야기했던 것은 이 참혹한 일이 운명이나 신에 의해서 일어난 게 아니라 바로 인간에 의해 일어났다는 지적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듄>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폴이 신이 아닌 인간을 선택했음에도 프레멘의 구세주가 되어가고, 베니 게세리트가 메시아를 생산해서 신의 지위에 오르려는 것은 종교의 일이 아니라 정치의 일일수도 있다는 얘기다.


영화의 세계관을 보면 서기 1만년이 지난 시점이고 인류는 우주 항행은 물론 행성에 도시를 세울 정도로 발전했지만 정치 제도는 중세 봉건제에 가깝다. 황제는 전 우주의 지배자지만 실제로 지배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대가문들의 지지이며, 황제는 대가문 중의 하나인 코리노 가문의 수장에 불과하다. 황제가 하코넨과 연합해 아트레이데스 가를 멸망시킨 것도 대가문들이 아트레이데스 가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죽은 것은 아트레이데스였지만 내일 죽는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이 권력은 불안하다.


권력이 불안하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베니 게세리트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종교집단이지만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이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황제의 직속으로 진실감별사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밀사로 파견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말하는 신은 황제이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전 우주의 지배자라고. 현재의 황제는 대가문들의 지지를 받아서 선출된다. 종교집단인 베니 게세리트가 대가문들의 지지를 받을 일은 요원하다. 그러니 베니 게세리트가 지배자의 자리에 앉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그들이 만든 인물을 황제로 앉히고 그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가문이 존재하는 한 베니 게세리트의 꼭두각시가 황위에 오를 가능성은 전무하다. 퀴사츠 헤더락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대가문의 숙청은 불가피하다. 이로써 메시아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메시아는 황제의 봉신이지만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가문들을 숙청함으로써 민중과 황제 사이를 수직으로 연결하는 통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역사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전제군주. 바로 절대왕정이다. 즉 베니 게세리트는 다수의 대가문들이 존재함으로써 전쟁이 끊이지 않고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전제군주를 만들려고 한다. 메시아란 바로 전제군주인 것이다.


프레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말하는 낙원은 모두가 평등한 시민사회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낙원이란, 프레멘을 핍박하고 스파이스를 훔쳐가는 황제를 위시한 대가문들의 몰락 이후의 세상이다. 카인즈 박사의 말에 의하면 아라키스는 원래 사막이었지만 식수를 찾고 나무를 심는 녹지화 사업을 진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전면 철회된 것은 스파이스가 발견된 다음이다. 사막이 없어지면 스파이스가 생산되지 않을 것이므로 지배계급은 아라키스의 녹지화 사업을 중지하고 스파이스 채굴 사업을 시작했다. 프레멘의 생존은 이로써 프레멘만의 일이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자격은 물론이고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자격도 박탈당한 것이다.


정확한 말을 쓰자면 프레멘은 제국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제국의 입장에서 프레멘은 지배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단지 스파이스를 채굴하는데 방해가 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프레멘은 아라키스라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찾았지만 정치적 권리는 찾지 못했다. 단지 생존한다는 면에서만 보면 그들의 존재는 사막쥐나 샌드웜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프레멘의 낙원이란 소외되지 않는 세상이다. 생존은 물론이고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 다시 말해 사막쥐나 샌드웜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천부인권을 보장받은 시민사회의 일원이 아니다. 짐승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다. 그들은 짐승으로 만든 것은 스파이스를 채굴하는 현 지배계급이므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황제와 대가문을 멸망시켜야 한다. 그러니 베니 게세리트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결국 프레멘의 메시아가 해야 하는 역할 역시 봉건 사회를 종결시키고 절대왕정을 출현시키는 일이다. 프레멘에게 이 사업은 종교와 같은데 그들의 종교에서 리산 알 가입을 제외한 모든 자는 평등하다. 다시 말해 지배자와 민중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메시아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도 결국 그 본질은 봉건 사회 이후에 출현하는 전제군주인 셈이다.


나는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리즈가 봉건사회에서 절대왕정 그리고 시민사회로 이어지는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이 전제군주의 출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베니 게세리트와 프레멘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을 등장시킨 이유는 지배자의 군주와 피지배자의 군주라는 서로 다른 모델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가문들을 숙청하고 봉건사회를 종결시킨다는 역할은 같아도 퀴사츠 헤더락과 리산 알 가입은 베니 게세리트와 프레멘만큼이나 다르다.


베니 게세리트는 전제군주를 만들려고 한다. 이 군주는 베니 게세리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그를 과연 전제군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베니 게세리트는 메시아에게 전제군주의 역할을 요구하지만 전제군주가 타파해야 할 기존 지배계급에 자신들이 포함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퀴사츠 헤더락이 나타나 황제와 대가문을 몰락시켜도 베니 게세리트라는 잉여가 남게 된다. 이 잉여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황제와 민중 사이에 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퀴사츠 헤더락이 만든 사회는 절대왕정이 아니라 베니 게세리트라는 대가문이 통치하는 특수한 봉건 사회가 된다.


베니 게세리트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 외에 목소리라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술은 듣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능력이다. 말하자면 베니 게세리트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단 한 명의 황제를 지배하는 것은 가능하다. 프레멘과 달리 베니 게세리트는 애초에 지배계급에 속한 집단이고 지배계급은 언제나 지배계급이 아닌 자리에서 사고하지 않는다. 베니 게세리트는 새로운 세계를 원하지만 그 세계에서도 자신들은 지배계급이다. 그들이 원하는 세계란 자신들이 지배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반대로 프레멘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며 단지 믿고 기다릴뿐이다. 원하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권리이므로 그들은 낙원으로 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폴과 자비스의 대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레멘에게는 항복이라는 개념이 없다. 권리가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들에게 진정한 삶은 새로운 세계 이후에 있고 현재의 삶은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폴이 베니 게세리트가 아니라 프레멘의 메시아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전제군주는 단지 강한 지배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전제군주란 대가문이 가져간 민중의 권리를 돌려주는 자인 것이다.


폴이 꿈에서 종교전쟁을 보았으면서도 복수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것은 인간 외부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신이나 운명 같은 것에 맞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라 복종에 대한 거부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거부의 권리야말로 소외되지 않은 존재의 권리다. 메시아를 만들고 이후에 그를 조종할 베니 게세리트는 그런 의미에서 폴이 복수자의 길을 선택한 맥락과 철저히 대립된다. 반대로 프레멘이 원하는 것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고 있는 세계와의 대결이다. 폴과 프레멘은 같은 싸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아닌 것을 거부할 권리를 위한 싸움이다.


끝으로 사족을 하나 붙이려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듄>을 보면서 여러 번 돌려 봤던 장면이 있다. 베니 게세리트의 수장인 모히암이 폴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모히암은 작은 상자 속에 손을 넣으라고 말한 뒤 찌르면 즉사하는 독침을 폴의 목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시험은 간단해. 상자에서 손을 떼면 죽는다.” 그러자 폴이 묻는다. “상자 안에 뭐가 있죠?’ 모히암은 대답한다. “죽음”.


나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읽었다. 고통에서 손을 떼는 순간 삶은 사라진다. 우리는 고통이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가급적 고통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죽지 않은 부분에서만 느껴지는 감각이다. 죽으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이 느껴진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고통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는 뜻은 아니다. 감수해야 할 고통은 자기가 아닌 것을 거부할 때 생기는 고통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이제까지 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삶은 부서지기 싫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 고통은 고통스럽지만 납득할 만한 고통이다. 납득할 만한 고통을 견딜 때 삶은 비로소 억울하지 않게 된다.



2024년 4월 8일부터 2024년 4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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