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는 걸까, 아니면 날씨를 핑계로 마음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일기예보는
습설이 내릴 것이라며 통행과 보행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안내했었습니다.
예보와 달리 눈은 적게 내렸고 그에 앞서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아주 오래전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것 같소?”를 보고, 그 팸플릿을 한동안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연극의 내용은 계속되는 폭우로 물바다가 된 외부 환경을 배경으로 하숙집 사람들의 생존 분투를,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찾으려는 줄거리를 유쾌하게 다룬 것이었습니다만, 날씨에 따라 감정의 변화를 자각하는 저 자신을 위한 경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와 인간의 사고·감정의 관계는 심리학과 행동과학에서 오래 연구되어 온 주제 중 하나입니다. 연구들은 대체로 날씨가 인간의 감정과 인지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우리가 직관적으로 믿는 것보다 훨씬 미묘하고 조건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초기 연구들(예: Schwarz & Clore, 1983)은 햇빛이 많은 날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한 평가를 더 긍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후속 연구 중에서는 햇빛 변수와 투자전략의 관계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Saunders, 1993). Anderson(2001)의 연구는 폭염 기간 동안 폭력 범죄와 충돌 행동이 증가한다는 통계적 연관성을 제시했는데, 이 결과는 더위가 감정을 ‘나쁘게’ 만든다기보다, 자기 조절 능력을 소모시켜 감정 조절이 어려워진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우울한 날씨와 우울감의 관계는 흔히 과장되어 있다는 대규모 메타분석 연구들은 비, 흐림, 기압 변화가 평균적인 기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거나 거의 없으며, 개인차가 극단적으로 크다는 결론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메타분석 연구 결과는 날씨라는 외부 상황의 변화라기 보다는 개인의 심리 내적 자원이 감정에 더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함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리학 연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날씨는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를
아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암시한다. “고
빗물은 사라지고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지붕과 화단 일부를 덮고 있는 얇은 눈을 보며, 오늘 제가 만난 시는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걸었다 “입니다.
당신이 돌을 가볍게 던졌다 나는 그 돌을 가볍게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별일 없어? 하면 별일 없어, 메아리로 돌아왔다 호주머니 속 돌이 걷는다 당신은 불을 끈 채 티브이를 보고 있다 창이 번쩍거린다 던진 방어하는 우는 웃는 분노하는 돌을 안고 당신은 침잠한다 내 심장 위에 당신의 심장 돌처럼 포개었다 깨뜨렸는지 꿈속에서 당신은 한쪽 얼굴이 무너진 채 나에게 잠시 기대었다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당신에게 간다
--지연,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 창비, 2025년
시인 지연(1971~ )은 2013년 [시산맥]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201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습니다. 제15회 시흥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8 전북문화관광재단 문예진흥기금을 수혜 했습니다. 박형준 시인은 시집 『모든 날씨들아 쉬었다 가렴』의 추천사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의인화하여 목소리와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말할 수 없던 존재들이 말하게 되는 시적 공간을 창조해 내며 생명과 존재,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라진 존재들이 남긴 흔적을 성실히 기록하며 그들을 향한 그리움을 전라도 방언의 구성진 가락과 소박한 말맛이 곳곳에 배어 있는 질박한 언어로 담아내었다”고도합니다.
이 시에서 화자의 의도는 어떤 사건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명확히 규정하는 데 있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생겨난 감정의 무게와 지속성을 ‘돌’이라는 사물에 맡겨 조용히 사유하게 합니다. 가볍게 던졌다고 믿었던 말, 시선, 마음이 사실은 호주머니에 들어가 오래 남아 걷고 있었다는 깨달음. 이는 감정이 격렬하게 폭발하기보다는, 말해지지 않은 채 안쪽으로 가라앉아 굳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시는 큰 사건을 말하지 않지만, 별일 없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순간, 그 ‘별일 없음’이 사실은 가장 큰 사건이었음을 알아차립니다. 불을 끈 채 TV를 보는 장면, 창이 번쩍이는 순간은 일상의 고요 속에 스며드는 불안과 기억의 번뜩임이 아닐는지요.
그런데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라니요?
돌의 밀도와 투수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매우 매우 느린 속도겠지요.
이 시를 다시 읽을 때, “호주머니 속 돌이 걷는다”는 구절이 자연스럽게 그 조각의 그림자를 불러왔습니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걷고 있다고 믿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몸은 앞으로 기울어 있지만 속도는 없고, 발은 내딛고 있으나 도착의 기색은 없습니다.
그 인물은 목적지를 향한다기보다, 걷고 있음 자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걷는 존재처럼 보였지요.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사람 I, 1960
이 조각의 기원은 자코메티의 친구이자 모델이었던 이사벨 람베르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던 중, 그는 그녀가 멀어질수록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의 강렬함과 정체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형상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미묘한 순간을 표현하려고 항상 노력했던 자코메티는 그날 밤 이후로 그녀에 대한 그 환상을 조각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답니다.
시 속의 돌은 가볍게 던져졌다고 믿어졌으나, 어느새 호주머니에 들어가 오래 머뭅니다. 돌은 말이었을 수도, 마음이었을 수도, 혹은 무심히 건넨 태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그러하듯, 이 돌 역시 부서지거나 흘러가지 않고, 몸 가까이에 남아 천천히 움직입니다. 걷는다는 것은 여기서 행동이라기보다 감정의 지속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걷는 사람〉의 몸은 지나치게 마르고, 표면은 거칩니다.
바람에 깎인 것처럼 보이는 그 형태는, 시 속에서 반복되는 ‘돌’의 이미지와 닮아 있습니다.
단단하지만 상처받았고, 버텼지만 무게를 잃지 않았던.
시에서 “던진 방어하는 우는 웃는 분노하는 돌”이라고 말할 때, 감정은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자코메티의 인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비장해 보이기도, 연약해 보이기도,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감정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침잠합니다. 불을 끈 채 TV를 보고, 창이 번쩍이는 순간을 견디며, 심장 위에 돌처럼 포개진 심장을 느끼지요. 이는 멈춤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부에서 계속 걷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코메티의 인물이 정지된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동을 암시하듯, 이 시의 화자 역시 움직임 없는 시간 속에서 관계의 방향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돌이 호주머니 속에서 걷는다는 말은, 마음이 이미 떠났음에도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는 고백처럼 읽히고요.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당신에게 간다.”
이 느린 속도는 자코메티의 걷기와 같은 리듬입니다.
그것은 돌진도, 후퇴도 아닙니다.
부수지 않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속도이지요.
마지막의 “단단한 돌에 빗물이 스며드는 속도로 당신에게 간다”는 구절은 체념보다는 느린 희망, 혹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정의 결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는 관계가 남긴 상처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게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다가가려는 마음의 속도를 존중하고 있군요. 그래서 읽고 난 뒤, 제 가슴에도 말없이 작은 돌 하나가 천천히 조용히 들어와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잠시 제자리에 서서 묻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무게를 견디며 걷는 속도는, 과연 얼마나 느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