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행복

Dolce far niente

by 윤재


'Dolce far niente’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한 즐거움’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달력의 마지막 장을 바라보게 됩니다.
종이가 얇아지는 것처럼 마음도 얇아지고, 숫자들이 왜 이렇게 빠르게 앞서가는지 잠시 서늘하기도 합니다.

집 대청소라도 해야 새해를 좀 더 단정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괜스레 마음만 바빠질 뿐입니다.

역할과 책임이 우선하며

제 자신의 속도나 욕망보다는,

언제나

해야 하는 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시간을 되돌아보던 중, 제 마음을 끌어당긴 그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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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고드워드, Dolce far niente(Sweet Idleness), 1904, 개인소장



'Dolce far niente’ 이탈리아어 표현으로, ‘달콤한 한가로움 또는 게으름’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림은 나태함이 지닌 몽환적이고 쾌락적이며 자기만족적인 면모와 그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잘 보여줍니다. 고드워드의 'Dolce far niente'를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엔 단순히 느긋한 긴 오후의 장면이 다가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투명한 막처럼 얇아져 손끝으로 밀면 쉽게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부드럽고 주름이 풍성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이 수련꽃 피어있는 분수 앞에서 포근하고 따뜻한 가죽털 위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녀의 등에는 햇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마치 오래된 대리석처럼 빛을 부드럽게 흩어놓고, 주변의 공기는 하루 전체가 늘어져 있는 것처럼 고요합니다. 로마 제국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사치스럽고 이상화된 배경에서, 그녀는 동물 가죽 위에서 순수한 여유와 풍요로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해야 할 일을 잠시 잊어도 된다는 듯,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포즈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곁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정적입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죽어 있는 적막이 아니라, 살짝 미소를 머금은 고요함입니다.

몸을 맡기고 있는 가죽의 질감, 분수대의 차가운 돌기운, 허리선을 타고 흐르는 온기의 곡선이 느리게 살아 움직이며, 나른함 속에서도 세계는 여전히 맥박을 칩니다.


“괜찮아. 오늘은 조금 쉬어도 돼.”라고 그림 속 여인은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한마디를 들은 것만으로도 마음 가장자리의 단단히 굳은 부분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하네요.

뭉친 어깨 근육이 풀어지는 듯도 하고요.


이 그림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도 사람을 품어주는 위로의 휴식 같습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소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면, 이 그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을 되찾는 태도에 더 가까워집니다


고드워드 특유의 매끈한 붓질과 절제된 색채는 인물의 피부를 유약처럼 매끄럽게 만들면서도, 주변의 대리석과 모피, 물의 질감을 섬세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인물이 잠시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징적 장면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녀가 엎드려 있는 모피는 현실의 촉각을, 분수대는 차가운 물성을, 그리고 그녀의 피부는 민감한 생명성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세 질감의 만남은 마치 “당신의 삶에도 이런 복합적인 층위가 늘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Dolce far niente'는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구성도 없지만, 그녀가 엎드린 채 조용히 쉬는 그 순간이야말로

아기의 자세처럼 우리가 가장 원초적 인간답게 존재하는 순간임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존 윌리엄 고드워드(John William Godward, 1861-1922)는 영국 런던의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성향이었으며,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아카데미 교육보다는 개인적 학습과 사설 교육을 통해 실력을 다졌으며, 알마-타데마(Sir Lawrence Alma-Tadema, 1836-1912)의 제자로 고전 양식을 익혔습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이상화된 세계, 대리석, 꽃, 옷감의 질감 표현, 햇빛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정적(靜的) 장면 등의 표현에서 스승의 영향이 뚜렷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모더니즘 예술가들로부터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미술’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그는 1910년대 이후 점점 세상과 단절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미술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던 고드워드는 1922년 12월 13일, 6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피카소와 같은 새로운 화가들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이상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이 시대에 뒤처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유서에는 “세상은 나와 피카소 두 사람을 담기엔 충분히 크지 않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사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Dolce far niente'는 그의 커리어가 가장 활발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고전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이런 그림을 몇 개의 버전을 그렸습니다.



만일 “세상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 삶이 원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그림 속 여인에게 건넨다면,
그녀는 아마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 고요함”이라고 속삭일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흩어지는 집중력,

쉽게 지워지는 마음의 결,
타인의 속도에 삼켜질 뻔했던 나의 리듬.

그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잠시 멈추는 것.
그 멈춤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작은 반항이자 조용한 복원력입니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은 잠시 멀어지고,

나 또한 잠시 dolce far niente-달콤한 게으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제니 오델의 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How to Do Nothing』의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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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오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How to Do Nothing』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일입니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세상은 끊임없이 “주의를 내놓으라”라고 요구하고, 우리는 쓸려가는 마음을 부여잡으려 애쓰다가 어느 순간 지쳐 버립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빨라지는 능력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사람들은 그 속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게 됩니다. 할 일 목록은 줄어들지 않고, 스마트폰의 알림은 하루를 통째로 집어삼키기도 하지요. 오델이 말하는 ‘하지 않음’은 외부 세계가 요구하는 효율, 생산성, 즉각적인 반응을 잠시 중지하고 자기 삶의 리듬을 되찾는 행동인 것입니다.


제니 오델은 그녀의 저서에서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요점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터에 복귀하거나 더욱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작가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실제로는 매우 깊은 관찰과 주의의 전환을 요구하는 과정이라는 것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휴식—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단순한 자기 계발서도, 철학서도 아니지만 읽어 나가기에는 다소 불친절한 책입니다.
이 책은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멈춤의 가치”를 다시 묻는,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자기 고유의 목소리,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를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무엇인가 충분하지 않다고, 뭔가 더 해야 한다고, 결과와 성과가 더 중요하다고 조급해하며 타인들은 어찌 사는지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분들에게 달콤한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 시선을 두어 보면 어떨지 생각합니다.


고드워드의 여인이 가만히 기댄 시간,
오델이 되찾고자 했던 주의(attention)의 주권,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은 비워지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이 차오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림 속 고드워드의 여인이 보여주는 “근심 걱정 없는 달콤한 게으름”은 거부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의 온기를 다시 채우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빛과 색 사이에서 가만히 시간을 통과시키며,
의도적으로 세상의 호출에 대답하지 않는 선택.
그 선택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