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살아갈 삶이 충분히 남아 있다”라고 치매를
안내하던 그녀 웬디 미첼(Wendy Mitchell, 1956~2024).
웬디 미첼 , 사진 출처 Alzheimer's society
치매 진단 후 조기 은퇴를 하고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을 산책하며, 야생동물들을 찍는 일을 즐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녀의 치매 진단을 몰랐던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카메라 든 그 여자”라고 불렀던 사실을 그녀는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억을 잃어가는 것의 의미
어제의 자신을 잊어가고
내일의 자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 좌절과 공포를 글로 써 나갔습니다.
웬디 미첼은 20년 동안 영국국민의료보험(NHS)에서 비임상팀 팀장으로 일하던 중 2014년 7월, 58세에 조기 발병 치매를 진단받았습니다. 사회나 병원 모두 치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치매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진단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헌신적으로 하였습니다. 알츠하이머병협회의 홍보대사였으며, 2019년에는 치매 연구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브래드포드대학교에서 건강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
저를 포함한 제 주변 동년배의 지인들에게도 가장 두려운 것이 치매입니다.
2024년 2월 그녀는 마지막 글을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그 글은
"사랑하는, 제 이야기를 따라와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이 글을 읽으려 마음 써주신 여러분께…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아마도 제 딸들이 이 글을 대신 올렸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슬프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알리지 않는다면, 제 이메일엔 ‘괜찮으신가요?’라는 질문이 끝없이 들어올 테고, 그것은 제 딸들에게 큰 부담이었을 테니까요…
저는 결국 더 이상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마지막 한 잔의 차…
제게는 “머그잔 속의 마지막 포옹” 같은 그 따뜻함을 놓는 것이, 사실 음식보다도 훨씬 더 어려웠어요.
하지만 이 결정은 절망이나 자기 연민의 순간에 충동적으로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글을 계속 읽어가면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거예요.
치매는 정말 잔인한 병입니다. 존재 자체를 흔들면서 잔꾀를 부리죠. 저는 평생 “유리잔은 반은 차 있다”라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삶의 부정적인 부분을 뒤집어 긍정으로 바꾸려고 애썼지요. 그게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치매는 어쩌면 제게 주어진 ‘최종 보스’ 같은 존재였겠지요. 네, 치매는 아주 성가시고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하지만 그 병과 한 판 게임을 하듯, 한 발 앞서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제 삶은 참 대단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늘 회복력이 강했기에, 삶이 무엇을 던져주더라도 버틸 힘이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단을 받았던 그날…
누가 그때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 후의 제 삶이 이렇게 펼쳐질 줄을요?
..(중략)...
나는 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 왔다고, 혹은 그러길 바라왔습니다.
내가 선택한 죽음으로 인해 나는 사람들이 가진 희망을 빼앗아 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 역시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존재하거나,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일까요?
나의 삶은 ‘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입니다.
그러니, 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면,
부디 이 나라에서 조력 죽음이 합법화되도록 캠페인 해주세요.
치매와 함께 한 이 삶에 적응하는 일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치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부정적인 해석일 테고,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나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이건 내가 내 치매에게 종료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략)...... “
영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1995>에서 레드(모건 프리만)는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허황된 꿈”이라면서 탈출을 꿈꾸는 앤디(팀 로빈스 )를 설득합니다. 그의 말은 절망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던 인간이 ‘희망’이라는 말에 품고 있는 양면성을 정확히 찌르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희망을 버려야 하는 사람,
살아 있기 위해 희망을 붙잡아야 하는 사람—
영화는 두 부류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극명한 심리적 갈라짐을 보여줍니다.
이 대척점에 대해 미국의 심리학자 찰스 스나이더(Charles R. Snyder, 1944-2006)가 말한 ‘희망’의 구조는 중요한 해석의 틀을 제공합니다. 스나이더는 희망을 감정적 위안이나 추상적 낙관이 아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심리적 능력으로 설명했습니다. 그가 제안하는 희망이론(Hope Theory)은 ‘희망은 감정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능동적 사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기화된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정의하며, 희망은 목표, 경로사고(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과 전략을 생각해 내는 능력), 주도사고(목표를 향해 동기부여되고 노력을 기울이는 추진력 또는 의지력)의 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그가 주장하는 이론에서 높은 수준의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다양한 대안 경로를 탐색할 수 있어야 하며, 열정과 의지로 계속 전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레드가 희망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희망 자체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경로 없는 희망, 즉 막힌 희망이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반면 앤디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감옥은 그의 마음을 가두지 못했습니다.
희망이 살아 있는 이유는 그가 뛰어난 경로사고와 주도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웬디 미첼의 마지막 글은 다른 자리에서 희망을 다시 정의합니다.
그녀에게 희망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을 지키기 위한 결단의 힘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희망을 미래에 대한 맹목적 낙관이 아니라 자신의 남은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삶의 형식으로 끌어올립니다.
레드가 말한 희망은 인간을 감옥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무너뜨리는 ‘위험한 환상’이었다면,
웬디가 말하는 희망은 인간이 질병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자기 존재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내적 주권’이었습니다.
웬디의 희망은 ‘기적을 믿는 힘’이 아니라 ‘내가 나로 남기 위해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태도’입니다.
레드가 말한 “희망은 위험하다”는 경고는 분명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희망은 인간을 파괴하니까요...
그러나 웬디의 글은 이 경고의 끝에서, 또 다른 문장을 덧붙입니다.
“희망은 위험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희망은 삶을 끝까지 인간답게 한다.”
웬디 미첼은 마지막까지 ‘희망의 심리학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나이더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웬디 미첼은 단순히 병과 싸운 사람이 아니라 희망을 구조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니까요.
“치매가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꺼냈다.”
이 문장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희망의 완성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웬디 미첼의 삶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희망은 살아남는 기술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