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아름다우니 서행하세요

by 박수현

제가 '한별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어요.

이 천사가 한별인데, 그냥 그 주인도 '한별'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한별이는 어떤 재료를 쥐어줘도 '행복'으로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어요. 근데 그 듣도 보도 못 한 재주를 가지고 회사를 차렸다는 거예요. 그러더니 지난가을에 탄소 어쩌구 하는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면서 글을 써달라고 전화가 왔어요.


한별이: 사람들을 우르르 무리 지어 걷게 하면서 글을 읽히고 싶어.
나: 잘도 읽겠다.
한별이: 딱 보면 기분 좋아지고, 우와하게, 막 걷고 싶어지는 그런 거 몬지 알지? UX라이터 화이팅^.~



세상에서 제일 느린 마라톤 대회



이렇게 제목부터 달고, 몰 쓸까 마음 가는대로 기획을 해봤어요.


한별이 디렉션: ① 딱 보면 ② 기분 좋아지고 ③ 우와하게 ④ 막 걷고 싶어지는


① 딱 보면

움직이면서도 시선이 닿았을 때 망막에 딱 맺히려면 '이정표' 수준의 가시성이 되어줘야 해요.

답: 글 한 편당 두 문장 내외, 큰 폰트.


② 기분 좋아지고

감정의 환기가 일어나려면 '관성적인 생각'에서 꺼내줘야 해요. 그리고 cliche 하지만 공감과 위로. 모두가 겪고 있을 만한 범사회적인 고통은... 경쟁

답: 경쟁에서 자유로워지는 영감이 떠오르는 카피


③ 우와하게

익숙한 것에 변주를 주면 '우와' 하게 돼요. 예를 들면 '어린이 보호 구역이니 서행하세요'를 '주변이 아름다우니 서행하세요'로 바꾼 것처럼.

답: 익숙한 카피 개사하기


④ 막 걷고 싶어 지는:
사용자에게 어떤 행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상태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 돼요. 그럼 머리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은 몸을 출발하게 해요.

답: 현 지점 거리 안내



그렇게 흙냄새 쿰쿰하게 비가 오던 토요일날 행사가 열렸어요.

참가하신 분들은.. 걷는 내내 이런 대자보(?)를 읽음 당하셨죠:


ㅇㅏ 글씨는 '서예가 이정화'님 작품이에요. @injoongmaobi


200m 지점마다 글을 놓았어요. 200m짜리 행간이랄까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긴~ 책.


200m :

뒤처져도 돼요.

지금 내 발바닥에 닿아 있는 지구를 느껴보세요.


400m :

이욜~ 벌써 500보나 걸어왔네요.


600m :

서두름은 사실 불안이 원천이래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 봐요.


“모든 것이 빨라질수록 중요한 건..

느리게 움직이는 법을 아는 것이다”


800m :

슬슬 왔는데 벌써 1,000보나 걸었어요 : )


1km :

느린 게 나태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1.2km :

벌써 1키로 넘게 왔어요.

230g 탄소만큼 지구가 조금 더 숨을 쉬게 된 거예요.


1.4km :

너무 느린 것 같아 어색하세요?

세상에서 제일 느린 뚜벅이 대회 취지에 아주 딱 맞아요!


1.6km :

느림 속에서 진짜 나의 리듬을 찾는 대회예요.

나는 몇 분의 몇 박자 호흡을 가졌나요?


1.8km :

뒤를 돌아보세요. 꽤 왔죠?


2km :

2키로 지점 : )

지구도, 나도 숨통이 트이고 있어요.


2.2km :

멀리 가야 할 땐 느리게 가야 한대요.

그래서 ‘느림’도 실력이래요.


2.4km :

주변이 아름다우니 서행하세요.


2.6km :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두 배로 일하게 된다.”

니체도 잘 쉬는 걸 참 중요하게 생각했나 봐요.


2.8km :

3,500보 정도 걸으면서 250칼로리를 썼어요.

감자튀김 하나만큼 불태웠네요!


3km :

산책을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고 한대요.

명상이랑 비슷한 효과가 있어서

아인슈타인도 영감이 필요할 땐 걸었다고 해요.


3.2km :

‘아님 말고’ 식의 마인드는

할 수 있던 걸 할 수 있게 해 준대요.

간절하게 원하는 것들에는 여백을 더 주어볼까 봐요.


3.4km :

3.4km를 걸으며 탄소 680g을 저감 했어요.

이 발걸음이 지구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어요.


3.6km :

느릿느릿

기록 세우기 말구 기록 새기기


3.8km :

하늘의 별을 쫓다, 발아래 꽃을 보지 못했어요.

제 마음의 시력이 문제였겠죠?


4km :

4km 지점,

400칼로리 정도 썼으니까 햄버거 하나 먹어도 0칼로리예요 : )


4.2km :

와 5,500보나 걸었어요.

숫자가 틀릴 수도 있는데,, 아무렴 어때요~


4.4km :

서두를 땐 감상할 시간이 모자라서

아름다운 것들은 찬찬히 봐야 보이나 봐요.


4.6km :

가만히 서 있기에도 전력의 힘이 드는,

삶의 중력이 아주 많이 강한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무력감을 무능하다 오해하진 말아요.


4.8km :

지방과 탄수화물을 연료로 6,000보나 걸어왔습니다 : )

이제 심장과 뇌에도 새로운 산소가 채워졌어요.


5km :

완주를 축하합니다 : )

발길이 닿는 길마다 꽃은 피어있을 거예요.

주변이 무척 아름다우니, 서행하세요.




이 중에는 제 메모장에서 나온 글도 있고, 즉석에서 적은 글도 있고, 리서치해다 매만진 글도 있어요.

개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이거:


느린 게 나태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우수함 보다 고유함이 더 칭송받는 세상이었다면

세상에 사랑이 더 많았을 텐데 싶어요.


저는 오늘 슬픈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슬프기 때문에 기쁨을 알아볼 수 있고

기쁘기 때문에 슬픔이 더 아프기도 한

여느 살아있는 날들 중 하루죠 뭐..


UX 라이팅은 사실 그냥.. '나보다 상대를 더 많이 생각한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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