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일자리
시골에서의 생활은 하루가 똑같았다. 그리고 놀고먹는 사람들이 없었다. 매일 같이 바쁘게 일하고 움직였다. 나와 친했던 친구도 공장에 가서 집에 없었고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고 나는 학교도 같이 안 다니고 또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윗집미숙이언니가 공장에 다니다가 쉬는 날 집에 왔다. 그곳에서 직원을 뽑는다고 여럿 언니들을 동원해 데리고 갔다. 나는 나이가 어려서 괜찮은지 물어보았고 언니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 괜찮다고 해 거기에 끼어서 따라갔다. 그곳은 목동에 있는 작은 양말 공장이었다. 공장이라기보다는 가정집에 조립식 창고를 지어서 기계를 몇십 대 놓고 양말을 짜는 것이었다. 기계는 주로 기술자 언니들이 보고 나는 다 짜인 양말을 날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실도 떨어지면 갖다주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다 맡아서 하는 일이 주어졌다. 양말이 다 짜아지면 다른 창고로 가져다가 양말 앞발가락 부분을 다시 언니들이 기계바늘에 양말 코를 넣으면 나머지 실밥을 내가 자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면 기계가 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꿰매는 것이다. 한 줄에 양말이 쭉 실에 매달려 있는 것을 쪽가위로 잘라서 손으로 일일이 뒤집어 코가 빠졌는지 잘못 꿰매졌는지 확인 작업을 하고 다시 다른 데로 가서 기계로 한번 더 확인한 다음에 출하를 하는 것이었다.
식당은 주방언니가 밥 해놓으면 방에 가서 상을 펴고 반찬을 한 두 개씩 날라다가 밥을 먹고 치우는 것도 똑같았다. 야근할 때는 해 놓은 밥을 일하는 언니들이 챙겨서 먹는 것이었다. 화장실은 공중화장실이었고 욕실도 없고 수돗물 나오는 곳에서 새 수하고 양치질을 했다. 방은 공장 안을 걷쳐서 지나가야 했고 밤에도 기계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사장님과 사모님 공장장님도 다 좋으시고 가족 분들이 일을 하셨다. 사모님 댁 아이들도 우리들이랑 같이 놀면서 지냈었다. 공장이 작아서 그런지 회사라기보다는 가족 같았다. 그러나 오래 있기에는 너무 불편한 게 많았다.
추석명절을 보내기 위해서 내려와 다시 친구가 있는 공장으로 옮겼다. 이곳은 거여동에 있는 골프장갑 만드는 회사다. 기숙사는 남한산성 아래쪽에 있었고 서울과 광주사이를 오가며 일을 다녔다. 기숙사도 형평 없는 판잣집 쪽방이었다.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 수돗물이 있어서 세수하고 빨래는 손으로 빨아서 줄에 널었다. 셋방살이도 이런 셋방살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양말 공장보다도 더 안 좋았던 것 같았다. 회사에서 먹는 밥도 주방을 보면 밥 먹기가 싫어지는 곳이었다. 식당 앞에 줄을 서서 주는 데로 배식을 받아서 먹었다.
공장에서는 각 부서로 나누어져 일을 했다. 처음에는 실밥 자르고 청소만 했었지만 몇 달 지나서 한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순서는 이러했다. 가죽을 갖다가 늘려서 손바닥모양으로 된 판을 손바닥면과 손등면을 찍어내고 엄지손가락 모양도 찍어낸다. 또 찍어 낸 손바닥면에 엄지손가락 색깔을 맞추어서 박음질할 수 있게 갖다 주면 박음질을 해서 또 다른 부서에 가서 손바닥앞면과 손등면을 박음질로 붙이고 찍찍이 달고 고무줄 박고 마지막으로 라벨과 손목 마무리 작업을 한 후에 확인하고 손모양의 열선으로 장갑모양을 자리 잡게 해 주고 균형 맞추면 끝이었다. 골프장갑 만드는 것에서 제일 중요한 게 엄지손가락을 박음질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쪽가위로 일을 하면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손가락이 뻣뻣해서 펴지지가 않을 때가 많았다.
공장에 있으면서 대모도 하고 하루 이틀 파업도 해서 일을 안 가기도 했었다. 월급 때문에 파업을 했지만 정확히는 잘 알지 못했다. 그 일로 공장장한테 불려 가서 이것저것 물으면서 대답하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입이 무거웠지만 그 일로 언니들 둘은 그만두었고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있는 부서는 엄지를 다는 대로 수당이 붙는 것 같았다. 분량을 채우면 일찍 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 오게 되는 날이 있었다.
그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일이다. '바바리맨'이라는 새로운 범죄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장에는 여자사원들이 많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았다. 정문을 나와서 조금 큰길로 올라가면 그 바바리맨이 있었다. 그전에 언니들이 말로 해줘서 알게 되었지만 듣는 것하고 실제로 마주치는 것하고 상황이 달랐다. 조금 무서웠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혼자 오게 되었는데 그때 나타났다. 난 무서워서 '엄마야!'를 소리치며 기숙사까지 한 걸음에 달려서 갔다. 자주등장을 해서 언니들이 그 아저씨를 놀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지만 혼자 갈 때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이고 걸어서 가다가도 그곳을 지나칠 때면 달리기를 해서 가야 하는 곳이다. 공장에서 어렵고 힘든 것은 다 있지만 정말 힘들고 무서운 일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는 길이었다. 그 뒤로는 혼자서 더 다니지 못했다.
연말에는 송년회도 했었다. 처음으로 구경하는 자리었다. 다 같이 모여서 밥 먹고 장기자랑 대회도 했다. 누구나 노래든 춤이든 무대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었다. 먼저 한 언니들보다 노래를 잘할 수 있었지만 앞에 나가서 부를 용기가 없어서 나가지는 않았다.
기숙사에서 이불을 아랫목에서 태워 하마터면 큰일이 일어날 뻔했었다. 어머니가 새 이불을 갖다 주러 오셨는데 공장기숙사 다니는 길도 멀고 위험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던 모양이었다. 다른 데로 옮기기를 원했지만 친구가 소개해주어서 가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는 나의 안전을 위해서 꾸준히 권유를 했었고 나중에는 나보다도 어머니를 위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것이 어머니를 위하는 것이고 또 나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