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꽃 상여
언제나 우리들은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은 따뜻하게 우리들을 키워 주셨다.
아버지 어머니가 농사일 외에 틈틈이 남의 일손을 거들어 주시며 잠시도 쉬지 않았고 또 겨울이면 서울 가서 돈을 버시고 열심히 사셨지만 생활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힘들어도 우리들한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셔서 우리 집에 빚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들이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를 제 때에 내지 못하고 교무실에 한두 번씩 불려 가서 복도에 서서 지나다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었고 언제까지 가져올 것인지 부모님께 확답을 받아오라는 담임선생님의 시선이 부끄럽게 따가웠었다.
이듬해 정월 체격이 좋은 젊은 아저씨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마침 아버지는 일하러 가셨고 어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 가셔서 늦게 오신다고 얘기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나가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았다. 가신 줄 알았던 그 아저씨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버지를 만나고 계셨다. 그 아저씨는 가지 않고 집 주변에서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아버지께 언성을 높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슨 죄인처럼 미안하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곧 마련해 갚겠다고 일을 하고 품삯 받으면 주겠다고 하셨지만 아저씨는 지금 당장 달라고 하면서 종주먹을 대며 아버지를 코너에 몰아붙였다. 거기에는 가을 추수한 볕짚이 겨울에 소여 물을 주기 위해서 쌓아 놓은 짚동가리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를 그곳에 밀어 넘어뜨리셨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뛰어가 우리 아버지한테 왜 그러냐고 그 아저씨를 나무랐지만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으셨는지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때서야 그 아저씨도 다음에 오겠다고 하면서 갔고 나는 아버지를 간신히 부축해서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 왔다. 어린 마음에 나는 아버지도 그 아저씨처럼 젊고 덩치가 좋았다면 그렇게 넘어지고 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니 내가 더 커서 돈을 벌었다면 좋았을 걸 그랬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불쌍해 보여 속이 상해서 울었다.
그 뒤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하시고 한 두 달 병을 앓다가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하고 집안 걱정이 많으셨는지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 병명은 화병이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에는 어수선해졌다. 동네어르신들이 많이 오셨고 바쁘게 움직이셨다. 안방 윗목에 있던 장롱도 치우고 짚을 추려 다듬어 짚단토막 세 개를 만들어서 윗목에 놓고 아버지를 그 위에 올려놓으시고 천으로 덮고 병풍으로 가려 놓았다. 친척분들도 오시고 나가 있던 오빠 언니들도 다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옷을 지었다. 아버지가 입으실 베옷과 우리들이 입을 상복을 여기저기서 짓고 있었다.
집안에 어르신들이 하는 대로 우리들도 따라서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상여에 꽂을 꽃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지를 적당한 크기로 십자모양으로 해놓고 실로 묶은 다음 맨 끝부분은 가위로 오려서 모양을 만들고 겹쳐 놓은 부분을 한 겹 씩 돌아가면서 가운데로 모아 세우면 예쁜 꽃 모양으로 변해 갔다. 그렇게 아버지를 지키며 밤을 지새웠고 아버지의 관과 상여에 장식할 꽃들이 새벽이 밝아 오면서 예쁘게 쌓여 갔다.
다음날 가족들이 다 모여서 아버지 염하시는 걸 지켜보았다.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엉엉 울었다. 아버지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시는데도 불과하고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면서 마구 울었다. 그때 어머니가 언제 나가 셨는지 들어오셔서 우리들은 다 울음을 그치고 말았다. 하나같이 놀라고 영문을 모른 체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는 아픈 큰언니를 데리고 와서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 얼굴도 보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버지 옆에 큰언니를 앉혀놓고 어머니는 아버지께 부탁을 하셨다. '얘네 아버지 우리 큰딸 아프지 않게 아픈 병 다 가져가세요. 가시는 길에 큰딸 병도 다 가져가서 하루빨리 애들하고 잘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힘들어도 당신이 가시는 길에 딸애 병도 꼭꼭 다 가져가 주세요'. 그렇게 엄마는 아버지께 큰 언니의 병을 다 가져가달라고 꼭 그렇게 해달라고 당부하면서 큰언니 손을 끌어다가 붙잡고 아버지 가슴에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면서 통곡하셨다. 우리들은 서서 엄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정말 그렇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빌면서 엉엉 울었다. 언니의 아픔이 늘 가슴 아팠던 부모님들이셨기에 어머니는 간곡한 마음으로 아버지께 애원하셨다. 언니의 병이 잘 낫지 않아서 좋다고 하는 것은 다 구하러 다니시던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얼마나 가슴 아프신지 누구보다 어머니가 잘 아시기에 그렇게 해서 행여 딸의 병이 낫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어르신들은 염을 시작하셨고 아버지를 베 옷으로 갈아입히고 얼굴도 가리고 꽁꽁 일곱 번을 묶어서 관에 아버지를 넣어 두시고 꽃들을 관 속에 넣었고 밖에도 붙여 두고 윗목에 다시 모셔 두었다. 언니들은 하얀 소청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머리에 하얀 리본으로 만든 핀도 꽂았다. 오빠들도 베로 만든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모자처럼 네모로 만들어진 큰 것을 쓰고 결혼 안 한 작은오빠는 또 다르게 해서 씌웠다. 그리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입히지 않았다. 그 옷이 뭔지도 모르고 나는 왜 없냐고 나도 치마를 입혀달라고 엄마한테 떼를 썼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너는 어려서 그런 것을 입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아버지를 태울 상여는 우리 집 작은 앞마당에서 밤새 만들어 놓은 꽃으로 장식하여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아버지관을 들고 나오면서 마루에서 땅바닥을 디딜 때 엎어 놓은 바가지를 있는 힘껏 발로 퍽 소리 나게 밟고 지나가서 아버지관을 상여 가운데 묶어서 고정을 시킨 다음 뚜껑을 덮고 우리들은 다시 아버지께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그런 다음 동네 어르신들은 빠르게 상여를 메고 떠날 준비를 하셨다. 하얀 소청으로 끈을 만들어서 양쪽 어깨에 대고 사이사이에 커다란 나무로 균형을 맞추어 잡고 맨 앞에 한 사람이 종을 울리면서 선창을 하면 상여를 짊어진 아저씨들이 합창을 하듯 구령으로 답을 하는 것이었다. 선창을 하는 아저씨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면 상여꾼아저씨들이 '어화 어화'하면 우리들은 더 큰소리로 울었다. 선창으로 '저승길이 멀다더니' '어화어화' '대문밖이 저승길이로다' '어화어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어화어화' 하면서 아저씨들은 천천히 상여를 메고 마당을 나서고 가족들은 울면서 그 뒤를 따라나섰다. 내가 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가니 어머니가 또 말리셔서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산도 멀고 어린 네가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힘들어서 안된다고 엄마도 너를 챙길 수가 없으니 집에서 친척 아주머니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엄마를 오래 붙들고 떼를 쓰고 있을 사이가 없었다. 아버지를 태운 상여는 이미 우리 집 마당을 벗어났고 엄마도 바로 뒤따라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아저씨들의 구호소리가 들리고 안 따라간다고 하면서 엄마가 보이지 않자 바로 따라갔지만 동네 입구도 가지 못한 채 돌아서 왔다. 아버지의 상여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시는 것을 동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을 찾아가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꽃상여를 바라보며 아버지를 부르며 울고 또 울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배웅해 드렸다. 공동묘지 산이 까마득히 멀리 있어 눈물이 가려서 보이지 않는데도 그곳을 바라보며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혼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텅 비어 있는 안방을 정리하시는 아주머니를 보며 나는 또다시 눈물이 주루루 흘러 아주머니가 볼세라 얼른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아버지는 꽃상여를 타고 우리들 곁을 영원히 떠나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