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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공 Apr 15. 2020

[서평] 김기창 『방콕』

훼손된 존엄과 악의 순환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오랜 기간 음지에서 자행되던 성 착취와 비윤리적 행위가 밝혀졌고 가해자에 대한 무관용의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해자들의 범행 사실이 너무나 가학적이고 끔찍한 것이었기에 사건이 가져온 파장은 국민적 공분을 샀다. 사건의 피해자가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N번방 사건은 젠더의 문제로 확장되기도 했다. 사건을 범죄의 프레임에서, 가해자의 가해 행위와 피해자의 피해 사실로만 바라보는 시각과 젠더의 프레임에서,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공존했다.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만큼 각각의 입장에서 표출된 분노가 향하는 대상도 달랐다. 범죄 프레임에서 분노는 가해자들을 향했고, 젠더 프레임에서 분노는 가해자를 포함한 남성을 향했다. 젠더 프레임의 시각은 사건에 가담한 가해자만 특정하는 것을 넘어, 일반 남성도 문제시한다는 비판과 함께 성 갈등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범죄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측에도 남성과 여성이 있었고, 젠더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측에도 여성과 남성이 있었다. 그만큼 N번방 사건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숨겨졌던 진실들이 하나, 둘씩 밝혀졌다. 하루가 다르게 추악하고 끔찍한 사실들이 추가되었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N번방에 대한 내막을 확인하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도 분노이고,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안타까움이지만 세상에 대한 환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한 인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이고 있던 악행.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의 밑에 더러운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생각에 신물이 올라왔다. 물질의 세계에 타락해버린 채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괴물들. 아, 그건 정말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괴물을 잉태하는 사회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충분히 먹고 즐길 정도의 물질을 희망하는 속마음. 그 괴리감 속에서 만난 책이 김기창의 <방콕>이다. 




김기창 <방콕>,  민음사


  김기창의 소설 <방콕>은 ‘존엄’과 ‘악’, 그리고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불법 이주노동자 ‘훙’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겪는다. 사고 후 인간적인 위로 없이 쓸모를 다한 부품처럼 쫓겨난 ‘훙’은 존엄을 짓밟히고, 짓밟힌 존엄은 ‘악’의 형태로 변질된다. 그렇게 자신을 해고한 ‘윤사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가 가장 아끼는 딸에게 행해지는 훙의 복수. 그리고 같은 시각, ‘벤’과 ‘와이’가 있는 태국, ‘섬머’와 ‘정우’가 있는 미국에서 행해지는 또 다른 존엄에 관한 이야기.  

    

  한국, 미국, 태국이라는 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소설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모두 ‘태국’으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인다. 소비와 낭비의 도시. 무책임과 자유의 도시. 그래서 천국이라고 불리는 도시 ‘태국’. 하지만 물질의 도시 ‘태국’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삶은 비극적이고 불안하다. 인간의 존엄이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 버려지고 사용되는 존재들. 존엄이 인정받지 못한 세계에서 신뢰와 믿음은 신기루일 뿐. 불신과 증오는 곧 악을 잉태하고 한번 불 붙은 악의 순환은 복수의 띠를 타고 계속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엄을 훼손하는 것일까. 그 중심에는 ‘돈’이 있다. 

“많이 벌려면 많이 잃어야 돼.”
“뭘 잃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존엄.” 
(김기창, <방콕>, 민음사, 2019, 182-183

  돈의 논리에 많은 것들이 무너져가는 세상이다. 인간으로서 잃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팔아버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본의 논리에 부서져버린 존엄 속에 살아가는 비극적 삶의 모습이 김기창의 <방콕>에는 잘 나타나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파편화된 삶을 인지하지 못한 채 찬란한 불빛의 도시 방콕에서 그곳을 천국이라 믿으며 환호하는 군중들. 과연 이러한 삶이 진정 우리가 원하던 삶일까. 무언가에 잠식당한다는 것의 가장 큰 위험성은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진정 자신이 꿈꿔오던 모습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존엄을 생각 해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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