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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공 Aug 08. 2020

고향, 채움의 공간

고향의 의미

  기차는 지금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며칠째 계속되는 장마로 하늘은 우중충하다. 몸피를 부풀린 구름은 다락 같은 비를 쏟아내다가도 금세 잠잠해졌다가, 다시 톡톡 빗방울을 떨군다. 싫증이 잦은 아이 같다. 기차는 허리를 곧게 편 채 안개비 속을 나아가고 있다. 전진하는 기차의 진동이 다리를 타고 골반으로, 허리로, 가슴으로 전해진다. 창가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그 불규칙의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다. 기차는 곧 나를 고향에 내려줄 것이다. 고향... 순천. 내가 나고 자란 도시.




  서울에 도착했을 때, 대도시가 지닌 화려함과 수많은 인파에 압도당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상경한 내게 솟아오른 빌딩과 그 틈으로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은 진귀한 풍경이었다. 새로운 도시에서 나는 하나의 바람개비가 되어 걸음마다 고개를 빙글빙글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더불어 이제 대도시의 생활인이 되었다는 심사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한동안은 세련된 도시의 생활을 즐겼다. 서울은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알전구인 마냥 밤늦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대로변 양쪽에는 지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각종 브랜드의 상점이 늘어서 있었다. 밤이 되면 나는 상점들이 발하는 불빛을 저벅저벅 걸어 다니곤 했는데, 그럼 그 현란한 브랜드들이 꼭 나를 위해 도열한 것만 같은 우쭐함을 느끼곤 했다.


  새로운 도시에서 낯선 것이 주는 흥미에 취해 지냈던 서울 생활 초창기. 그때 나는 서울에서 거주인의 심정이라기보다는 여행객의 심경으로 지냈던 것 같다. 여행지를 찾은 사람의 마음이 흔히 그렇듯, 단지 도보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채로운 감흥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하지만 대학교 수업이 시작되고, 내게도 수행해야 할 일과가 생기자 서울은 여행지의 티를 벗고 거주지의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명절에 본가 어른들이 모이면, 모처럼 찾은 고향에서 그들이 고향 이야기를 멈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술잔이 여러 순배를 돌도록 그치지 않는 그들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몇 시간이고 술안주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고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것이 정말 어른들의 얼굴을 저토록 상기시킬 만한 것인지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러던 것이 서울 생활은 내게도 고향을 떠올리게 했으니, 고향은 타향을 가져본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나는 몇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서울 사람들의 어법과 내가 20년 동안 사용해오던 어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다소 거친 표현이 곧 상대방에 대한 애정으로 여겨지던 고향의 어법은 서울에서 공격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의도치 않게 입이 험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나름의 친근함을 표하다가 몇 차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보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해, 그동안 세련되고 눈부시게만 느껴지던 서울의 도시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곳은 어쩐지 메마르고 스산한 데가 있는 도시였다.


  내가 가진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을 실로 비감하게 만들었다. 서울에 갓 올라왔을 때, 대도시의 감성이라며 동경했던 다소 차갑고 무신경한 서울의 분위기는 비감한 심정 속에서 매정하게 느껴졌다. 타지에서 정을 붙이고 산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살아나가야 했다. 나는 서울의 어법과 태도를 배우는 데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굴곡이 심한 말투를 표준 억양에 근접하도록 평평히 다지기 시작했다. 적나라한 표현보다는 완곡하고 격조 있는 표현을 고심했다. 오랜 기간 짙게 배어 있던 정체성에 새로운 것을 덧입히는 과정이었다. 사람이 보호색을 취할 수 있는 도마뱀이 아닌 이상, 본래의 성질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내적으로 많은 불안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김숨 작가의 <뿌리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심기 위해 뿌리째 나무를 뽑아내는 대목이 나왔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안착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나는 이식되는 나무에 큰 동질감을 느꼈다.


  서울 생활이 지속되는 만큼 본래의 내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한 시간도 길어졌다. 사람이 자연스러움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론 수척해지는 과정이었다. 내 마음은 마치 각질이 일어난 듯 자꾸만 거칠어지고 주위의 자극에 무감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에 여러 갈래의 금이 생겼을 때 나를 잡아끄는 것이 고향이었다. 불안은 안정을 추동하는 습성이 있는 것일까. 작위로 얼룩진 서울살이에 지쳐 가만히 누워있자면 내 마음은 연거푸 고향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럼 나는 고향의 정취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말 못 하는 도시가 전해주는 평온함이 못내 그리워졌다. 잠깐 그곳으로 돌아 갔다 온다면 왠지 다시 이곳, 서울에서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아, 나는 귀향길에 올랐다.




  기차가 순천을 향한 막바지의 여로에 접어들었을 때, 기차에는 이미 타지에서 순천으로 돌아가는 고향 사람들이 여럿 함께였다. 고향의 기운이 웃돌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내 마음은 노글노글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기차에서 내려 고향 땅을 밟으면 온몸에 맥이 탁 풀리고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그 웃음을 가운데에 두고 고향의 온갖 정겨운 말투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봉봉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나와 아귀가 들어맞는 곳에 왔다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에서 항시 지니고 다니던 긴장과 꾸밈을 내려놓고 휘적휘적 고향의 산천을 돌아다니면, 나는 예전처럼 다소 웃음을 되찾았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엄마는 간혹 당신의 고향 여수를 방문할 때면 여수 앞바다에서 유난히 소녀와 같은 얼굴이 되곤 했다. 여수 앞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엄마의 눈은 바다를 한 꺼풀 들춰내 그곳에서 뭔가를 음미하는 듯했다. 그때, 엄마가 여수 앞바다에서 건져 올렸던 것과 유사한 소녀의 표정을 나는 순천의 산천에서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럼 이상하게 말도 많아지고 안 쓰던 감탄사를 툭툭 내뱉기도 했다. 


  서울에서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처음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그 발걸음이 부적응자의 회피 내지는 도피의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회피와 도피는 주로 사람의 부정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에 고향으로 향하는 내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순천에만 오면 여유랄지 자신감이랄지 생활에 필요한 자산들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한 나는, 기왕에 사람이 만들어 놓은 단어라면 살기 위해 회피와 도피, 두 단어와 붙어먹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임을 느꼈다. 나아가 진정한 내가 된다는 것은 곧 무언가로부터 도망침으로써만 가능한 것은 아닐지. 때에 따라서는 두 단어를 긍정하는 정도까지 나아갔다.


  서울은 나에게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인 것 같기도 하고, 내게는 타향이기에 치열함만이 유독 부각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서울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조금씩 퇴색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럼 여지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것인데,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거두고 내 자연의 모습으로 마음을 든든히 채운다. 그렇게 나는 옛날 본가 어른들이 고향 이야기 앞에서 그토록 달뜬 표정이 되었던 것을 점점 이해했다. 그분들도 나도, 우리는 고향에서만 나타내는 모습이, 고향에서만 얻어가는 기운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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