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전구처럼 예쁘게 반짝이는 장면들을 망막 속에 가득 품고 공연장 밖으로 나오는 발걸음이 행복하다. 처음으로 본 발레 공연인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한 날이었다. 당시 지인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호두까기 인형'을 본다길래 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같은 공연을 연례행사같이 보는 건지 궁금했던 나는 재작년말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예매했고 그렇게 발레에 폭 빠지게 되었다.
'호두까기 인형'은 내가 좋아하는 발레 작품 TOP3에 들어갈 정도로 취향을 저격하는 작품이다. 마리의 꿈속에서 살아서 움직이게 된 인형들이 크리스마스 랜드로 함께 가는데 등 뒤에 늘어선 인형들을 보고 있으면 내 편이 잔뜩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하다. 나도 인형을 살아있는 친구처럼 대하며 밤마다 가지고 놀다 잠들던 아이였던 때가 있어서 그런지 극에서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보면 괜히 뭉클해진다. 마치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판타지와 추억을 아름답게 모아놓은 쿠키 상자를 열어 본 기분이다.
'호두까기 인형'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댄스(각 나라의 민속무용을 발레화한 춤)를 볼 기회가 많아서 좋다. 스페인, 러시아, 중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인형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데 특히 인도 인형의 춤은 고대 유물로 발굴된 토기 장식같이 안무가 신비로워서 제일 좋아한다. 또 어떤 버전에서는 아기 양들이 나와서 너무 귀엽다.
'호두까기 인형'은 음악도 매력적이라 겨우내 돌림노래처럼 들어도 질리지않는다. 그럴 때면 차이콥스키는 진정 멜로디 장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비로운 '사탕 요정의 춤'은 말할 것도 없이 좋고 힘차고 신나는 '행진곡'과 우아한 '꽃의 왈츠'도 너무 좋다. 사실 나는 '꽃의 왈츠'를 전화 연결할때 나오는 클래식 음악으로만 알고 있었던 터라 처음으로 봤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서 '꽃의 왈츠'에 맞춰서 춤을 출 때 너무 익숙한 노래가 나오길래 기함했다. (나랑 같이 흙 파고 놀던 친구가 알고 보니 이웃 나라 공주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기분이려나) 이렇게 좋은 음악을 그간 전화 연결음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나의 무지를 안타까워하며 앞으로는 차이콥스키를 좀 더 많이 들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발레 공연의 매력 중 하나는 언어가 달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레는 마임으로 하는 예술이기에 내한 공연을 보더라도 번역을 거치는 과정 없이 보여주는 그대로 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어떤 동작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전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아직 발레 입문자라 발레 용어를 익혀가는 중이지만 그 와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동작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리를 찢으면서 커다란 원을 그리듯이 점프하며 도는 ‘마네즈’(manège)이다. 180˚에 가깝게 뻗은 다리가 공기를 휘감으면서 주변 공기를 부드럽게 휘핑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무대 위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무용수의 다리는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반죽하고 중력을 잠시 잊은 듯한 점프를 보여준다. 시간을 멈추는 투명한 블랙홀을 무대로 불러내는 의식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순간이다.
공연 때 마네즈를 꽤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속도감이 엄청나서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졌다. 같은 공연에서 마네즈보다 더 다리를 휘감듯이 도는 ‘540°’(아오야라고도 부르는 듯 하다)이라는 동작도 볼 수 있었는데, 달리의 녹는 시계처럼 부드럽게 늘어진 다리가 일으킨 바람이 관객석까지 닿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듯해 감격스러웠다.
누군가가 빛나며 반짝이는 순간을 지켜보는 게 좋다.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인 나에게도 감동이 고스란히 전파된다. 공연에서 한없이 여리고 가벼워 보이는 발레리나가 뒤돌았을 때 잔뜩 갈라진 등 근육이 보일 때 뒷모습만 봐도 그 노력과 수고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멋있다. 무대에 서기까지 얼마나 자신을 갈고닦아왔을지 내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혹독한 노력을 상상해보게 된다.
또 수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리허설에서 완벽했더라도 본 무대에서 혹시나 실수하게 된다면 관객들은 실수만 보게 될 터이니 공연 전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은데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고 최고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순간적인 예술을 하는 분들이 존경스럽다.
이제는 인형이 살아 움직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엔 너무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호두까기 인형'을 보는 순간에는 나도 잠시 어린 아이가 되어 마리의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 랜드를 여행하는 기분이다. 나에게는 호두 병정을 선물해 줄 드로셀마이어 같은 멋진 대부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표를 선물할 수 있는 작고 깜찍한 어른의 재력은 생겼다. 연말마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가는 일은 어느새 나에게도 특별하고 행복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