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립다. 내 마음속에도 집을 짓고 들어앉아 향수를 느끼게 하는 공간이 있다. 부산 대신동의 골목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조용한 주택가가 나온다. 누가 사는지 궁금할 정도로 커다란 단독주택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의 회색 길을 따라 몇 번의 코너를 돌면 노랗게 칠해진 따뜻해 보이는 카페가 저 멀리서부터 보인다. 노란색 담벼락이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점점 두근거린다. 나의 추억이 담긴 그 카페의 이름은 홍차왕자이다.
홍차왕자는 고등학생 때부터 나의 최애 카페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나를 가슴 뛰게 했던 노란 벽과 푹신한 소파가 놓인 따스한 실내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카페를 너무 좋아했어서 타지에서 살게 되었어도 부산에서 친구 만날 일이 생기면 오로지 홍차왕자에 가기 위해 딱히 놀거리가 없는 대신동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카페에 가는 문화가 그렇게 발달한 느낌은 아니었고 카페의 수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그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카페는 어른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홍차왕자를 방문하면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홍차왕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창가 자리는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길보다 살짝 낮아 아지트같이 아늑한 느낌이었는데 그 자리를 내 마음속 지정석으로 두고 갈 때마다 거기에 앉아 친구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홍차는 우릴수록 수색이 옅어졌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더 깊어졌다. 친구가 자신의 남자친구를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고, 같이 갔던 여행의 추억을 나누기도 했으며, 학창시절의 일화를 떠올리며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그 뒤로 수많은 카페를 방문했지만 아직까지 애틋하게 느껴지는 곳은 홍차왕자가 유일한 것 같다. 아마도 그 공간에서 만든 추억이 많아서인 것 같다.
홍차왕자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같은 이름의 만화책의 광팬이었던 친구가 적극 추천해서였다. 만화책과 이름만 같을 뿐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가게였지만 홍차 전문점답게 시중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홍차들까지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홍차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서 선택의 폭이 넓었고 소분으로 파는 홍차들도 있어서 새로운 홍차를 시도해 보기에도 좋았다. 거기서 마리아쥬 프레르의 마르코 폴로 소분 홍차를 사서 집에 와서 엄마와 함께 마셨는데 향이 그윽하고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커피보다 홍차를 더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발견하기도 했다.
홍차에 눈을 뜬 이후, 나는 많은 브랜드를 거쳐왔다. 구하기 쉽고 저렴한 축인 트와이닝, 아마드에서부터 시작해서 요즘은 마리아쥬 프레르를 직구로 주문해서 마시기도 한다. 홍차로부터 시작한 차 여행은 우롱차, 보이차까지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홍차로 다시 돌아왔다. 홍차는 밀크티로 마셔도 맛있고 사이다에 냉침해서 마셔도 맛있지만 결국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
베르가못, 꽃향기, 캐러멜 등 홍차마다 다양하게 가미된 향기를 좋아한다. 우릴 때마다 미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다채로움과 수색을 구경하는 즐거움, 그리고 쌉싸름하게 혀에 감기는 뜨거움도 좋다. 홍차의 이름이 주는 문학적인 상상과 맛을 연결 짓는 매력, 차가 담긴 패키지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도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면 유리 티팟에 홍차를 5분간 우린 뒤 워머를 켜둔 채 오래오래 마신다. 뜨거운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면 따뜻한 피의 담요가 갑자기 나를 덮는듯한 후끈한 느낌이 든다. 따뜻하게 잠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근사하다. 아무래도 티백이 간편하긴 하지만 역시 잎으로 우리는 게 개인적으로는 더 진하고 맛있게 우려지는 것 같다. 또 투명한 티팟에 우리면 홍차의 그윽한 빨간 수색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뱀파이어가 피를 마시듯 매일 홍차를 마시는 내 피도 얼마쯤은 붉고 뜨거운 홍차로 이루어져 있을지 모른다.
홍차왕자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오래된 친구나 평생 보고 싶은 친구의 손을 잡고 찾아가고 싶다. 소중한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저 멀리부터 홍차왕자의 노란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내 볼은 설렘으로 빨갛게 물들 것이다. 마치 처음 그곳에 도착한 고등학생일 때의 내 모습처럼. 잠시 그 푹신한 창가 소파에 앉아 햇볕을 쬐는 상상을 하다가 기억의 모퉁이를 돌아 나와 오늘 아침에도 뜨거운 홍차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