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이 도왔습니다.
내게는 늘 숙명처럼 '역마살'이란 말이 따라붙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운명을 지칭하는 역마살의 의미 그대로 '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집에 있기보다는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새롭고 낯선 곳에 가는 것을 설레며 기대하곤 했다. 또한 여러 직업을 거치고 잦은 이사와 이직을 반복하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마살을 슬쩍 끼워 넣기도 했다. 사실 '살(煞}'이 붙는 말은 좋은 뜻이 아니지만, 근래에는 '역마살'이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동과 변화가 잦은 운명이라고 해석해서, 유학이나 여행, 객지살이를 해야 할 때는 오히려 역마살이 있어야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 역시 역마살을 긍정적인 의미로 처음 인식한 것은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했을 때였다. 처음엔 '나 홀로 호주행'을 크게 반대하던 엄마가 어느 날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이유를 물어보니 지인과 같이 간 점집에서 엄마에게 '삼재 든 큰 딸은 역마살이 있어서 물 건너가면 오히려 더 좋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점집에서 해 준 말 덕분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잘 다녀왔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역마살이란 말이 나에게는 고맙고 긍정적인 단어가 되었다.
역마살 덕분에 돌아다니는 것이 주된 업무인 직업들도 나와 잘 맞았다. 방문 교사나 보험설계사, 여행 코디네이터 등의 일을 해 보았는데, 그중에서 누가 봐도 가장 많은 역마살이 끼었다 하는 일은 단연코 여행 코디네이터였다. 지금이야 여행 코디네이터 혹은 여행 플래너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전에는 그냥 여행사 직원으로 통칭해서 직업 소개를 했다. 최근엔 여행사 직원도 직무별로 세분화되어 있어서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는데, 내 경우에는 소규모 여행사에서 거의 모든 일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여행 코디네이터 정도가 맞는 것 같다.
여행업도 여러 종류인데, 나는 주로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테마 여행사의 직원이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회사 규모가 꽤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여행 작가이신 사장님과 사모님이 운영하는 영세한 사무실 하나였다. 사장님은 여행 작가가 본업이라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썼다. 단순히 글만 쓰는 게 아니라 책으로도 출판하느라 매우 바빴다. 기업 미팅 후 영업에 성공하면 사장님은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거나 결재만 하는 정도였다. 점잖고 선한 인상의 사모님은 경리 업무를 보면서 그 외의 나머지 일들을 나와 나눠하곤 했다. 원래는 사장님도 잡일까지 함께 했지만 내가 일을 빨리 배우다 보니 점점 내게 일을 던지고는 사라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장님의 일까지 배우게 되었고, 1년 조금 못되어 회사 문을 닫을 때 내게 회사를 양도할 뜻도 비추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면접 때의 사장님은 내 이력서가 들어 있는 파일을 세 번이나 덮었다는 점이다. 즉, 처음부터 채용을 하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오기였는지, 열기였는지, 사장님이 덮은 파일을 세 번 모두 다시 펼치게 만들었다. 채용 후에도 사장님은 몇 번이나 그때 나를 뽑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뽑아서 다행이라며 즐겁게 회상하곤 했다.
세 번이나 덮었던 이력서 파일을 다시 열게 만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해당 업종 경력도 없이 여행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에 대한 답변이었다. 아마 사장님은 이 질문을 하는 시점에서 나를 채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 홀로 호주 반바퀴'를 돌면서 사전에 어떤 준비를 했고 어떻게 돌아다녔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행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어필했다. 또, 여행 준비를 여행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함께 일정을 짜고 실제 일정을 진행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도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여행 상품을 기획해서 답사하고 행사를 진행하는 일련의 과정과 비슷했다. 아마도 결정적인 부분은 내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스스로 정한 테마별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테마 여행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정답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 버렸다.
사장님에게 열심히 어필한 워킹홀리데이는 일해서 번 돈으로 여행도 하는 것인데 나는 여행 내내 나만의 테마를 정해서 돌아다녔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뭐라도 하나 건져야 한다'라는 생각에 일단 호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위주로 여행을 다녔다. 그중 하나가 호주 남부에 위치한 3대 와이너리 지역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 - 애들레이드 근교), 야라 밸리(Yarra Valley - 멜버른 근교), 헌터 밸리(Hunter Valley - 시드니 근교)를 각각의 인접 도시에 머무르면서 하루씩 다녀왔다. 덕분에 와이너리 역사와 함께 와인을 만들고 숙성하는 과정, 와인을 마시는 법,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했던 와이너리 투어는 이러한 것들을 알아보고 와인 등의 제품도 구매할 수 있게 하는 테마 여행인 셈이었다.
물론 상품을 기획한다는 것은 테마만 그럴싸하게 잡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 고객에 맞게 난이도를 조절하고 시간과 예산을 적절하게 배정하는 일도 들어 있다. 여기에 식사나 숙박이 들어가면 장소 섭외와 시설 관리 현황까지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특히 숙박의 경우는 고객의 일탈을 막는 것도 큰일이다. 내가 진행했던 행사 중에 모 기업의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적한 바닷가에서 1일 숙박한 적이 있었다. 몇 분이 저녁 식사 때 기분 좋게 한잔하시고는 늦은 밤 시간대에 바닷가 산책을 하겠다고 나섰다. 가로등조차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인 데다가 마침 밀물 때가 가까워 올 때였다. 미리 밤 시간대 외출을 삼가 주십사 공지도 여러 번 했는데 일상에서의 일탈자들은 아랑곳 않아서 말리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결국엔 원만하게 해결을 보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답사 때면 주변 환경을 더욱 꼼꼼히 살펴보고 돌발 상황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다행히 나에게 있는 역마살은 이동뿐만 아니라 변화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획에 없는 일이 생겨도 잘 대처할 여력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여행사 일을 그만두고서도 한동안은 1인 여행사를 꿈꾸기도 했다. 호주에서 내가 체험했던 것처럼 오전과 오후를 나눠서 반일만 소규모 투어를 하는 것 말이다. 안타깝게도 인연이 닿지 않아 이루지는 못했지만, 썩어 없어지는 재주는 아닌지라 개인 여행이나 가족 여행 때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는데, 일정과 예산은 당연히도 내 담당이 되었다. 여러 변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일정대로 움직였고, 가족 모두 만족스러운 경험을 해서 '갓벽한 여행'이라 감히 평가해 보았다. 심지어 별생각 없이 지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산보다 지출이 적어서 금전적인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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