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의 종전 구상을 중심으로 - 와다 도모유키(和田朋幸)
<일본논문>
태평양 전쟁 후반기의 전쟁 지도 - 육군의 종전 구상을 중심으로
(太平洋戦争後半期における戦争指導 - 陸軍の戦争終結構想を中心として)
【요약】
제1차 및 제2차 전쟁지도대강은, 육군과 해군의 서로 다른 전략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던 반면, 제3차 전쟁지도대강에서는 대미(對美) 결전이라는 사상에는 일치가 있었다. 다만 문제는, 작전 계획이 먼저 수립되고, 그에 따라 전쟁지도대강이 뒤따르는 방식—즉, 정책과 전략의 순서가 뒤바뀐 과정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항복과 독일의 전황 악화 등으로 인해, 유럽전쟁과 분리된 틀 안에서 태평양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일소(일본-소련) 중립 관계의 유지·강화와 육해군 전력의 통합적 운용이라는 문제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전쟁 지도(指導)의 요체에 대해, 『중국사변 전쟁지도사(支那事変戦争指導史)』를 저술한 호리바 카즈오(堀場一雄, 중국 파견군 참모, 전 전쟁지도반장)는 "전쟁 목적의 확립, 진군 한계의 규정, 그리고 전쟁 종결의 파악"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쟁 종결의 파악’은 전쟁 지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전황은 끊임없이 변하게 되고, 그 속에서 정확하게 전쟁을 끝낼 기회를 포착하여 종결로 이끄는 일은 전쟁 지도자들이 가장 고심하는 지점이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당일, 참모본부 전쟁지도반이 업무일지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전쟁의 끝맺음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것이 본 전쟁의 최대 난제"라고 쓰여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개전 당시 일본의 전쟁 종결 구상은 「대미영란장 전쟁 종결 촉진에 관한 복안(腹案)」(이하 ‘복안’이라 함)에 묘사되어 있었고,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수립된 「향후 취해야 할 전쟁 지도의 대강」(1942년 3월, 1943년 9월, 1944년 8월, 1945년 6월) (이하 ‘전쟁지도대강’이라 함)은, 이 복안이 제시한 구상을 구체화하거나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작성되었다. 각 전쟁지도대강에는 당시의 전황 및 국제 정세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향후 취해야 할 군사정책과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에 본 연구는 육군의 전쟁 종결 구상에 주목하면서, 전쟁지도대강의 핵심이었던 군사정책과 대소(對蘇, 대소련)정책의 결정 과정을 정부와 군부, 또는 육군과 해군 간의 전쟁 수행 요구를 둘러싼 대립과 타협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책 결정 과정의 특징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책 결정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태평양전쟁에 관한 선행연구의 흐름을 살펴보면, 연구자들의 관심은 개전(開戦) 및 종전(終戦) 과정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태평양전쟁 기간 중의 대외정책이나 군사정책에 대해서도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호소야 치히로(細谷千博)의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대소 외교 ― 환상의 외교 ―」 (『변용하는 국제사회의 법과 정치』, 유신당, 1971년),
도베 료이치(戸部良一)의 「대중 평화공작 1942-45」 (『국제정치』 제109호 「종전 외교와 전후 구상」, 1995년 5월),
하타노 스미오(波多野澄雄)의 『태평양전쟁과 아시아 외교』 (도쿄대학 출판회, 1996년)
등은 전시기의 외교정책을 분석한 대표적인 연구들이다. 또한,
이마이 세이이치(今井清一)의 「전쟁지도와 종전책과의 연관」 (『태평양전쟁 종결론』, 일본외교학회 편, 도쿄대학 출판회, 1958년),
이케다 키요시(池田清)의 「일본의 전쟁지도 계획 ― 개전 시의 전쟁 종결 구상을 중심으로 ―」 (『법학』 제43권 제2호, 도호쿠대학 법학회, 1979년 7월),
노무라 미노루(野村実)의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전쟁지도」 (『태평양전쟁 ― 개전에서 강화까지 ―』, 근대일본연구회 편, 야마카와 출판사, 1982년)
등의 연구 성과들은 태평양전쟁의 군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 중에서도, 전시(戰時) 하에서의 전쟁지도대강의 수립과 대소 정책의 전개를 정부와 군부, 또는 육군과 해군 간의 대립과 타협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책 결정 과정의 특성을 명확히 밝힌 연구는 드물다. 특히, 연구자들의 관심이 개전 및 종전 과정에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개전 이후 도조 내각(1941년 10월 ~ 1944년 7월)이나 고이소 내각(1944년 7월 ~ 1945년 4월)에서의 전쟁지도대강 수립 과정을 분석하고, 그 특성을 밝혀낸 연구는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상의 점을 바탕으로 본고는, 육군의 전쟁 종결 구상에 주목하면서, 고이소 내각 하에서 수립된 제3차 전쟁지도대강(1944년 8월)에 있어서의 군사정책 및 대소 정책의 결정 과정을, 도조 내각 하에서 수립된 제1차 및 제2차 전쟁지도대강(1942년 3월, 1943년 9월)과 비교함으로써, 그 특징을 밝히고자 한다.
(1) 전쟁지도반의 정세 인식과 새로운 전쟁 종결 구상
1944년에 들어서면서, 참모본부가 전쟁 지도에 있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유럽 전선의 추이였다. 왜냐하면 전년도 유럽에서는, 스탈린그라드 함락에 이어 독일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이 철수, 그리고 1943년 9월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는 등, 유럽 전세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43년 말에 전쟁지도반이 기록한 『기밀 전쟁일지』에는 “유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독일의 상황은 결코 낙관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엄중한 인식이 나타나 있으며, 이후 전개될 정세의 초점은 1944년 중반경으로 예상되는 연합군의 제2전선 형성과 독일군의 전황 전망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현재의 ‘드네프르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지 여부가 독일의 운명을 좌우하며, 나아가 일본 제국의 전쟁 지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쟁지도에 있어서 이 “중대한 영향”이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먼저 이 점부터 명확히 해보자.
일본 방위연구소 도서관에는 「독일의 전쟁 지도에 관한 관찰」이라는 제목의 문건이 남아 있다. 이 문건은, 독소전쟁의 전황이 독일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정세 속에서, “독일의 급변 사태를 가정한 일본 제국의 전쟁 지도에 관한 연구”를 준비해두자는 취지로, 1943년 11월 5일 전쟁지도반이 작성한 연구안이다.
이 연구안에서 말하는 “독일의 급변”이란, 독소전의 전황 악화, 국내 정세의 불안정, 점령지의 이탈 등에 의해, 갑작스럽게 유럽에서 평화(즉 독일과 영미 간의 강화 협상)가 성립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한 데 이어 독일의 열세가 알려지면서, 독일과 영미 사이에 단독 평화 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은, 과거 독일이 일방적으로 조약을 파기하고 대소전을 개시했듯이, 결코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오히려 앞서 언급한 독일의 상황을 보건대, 독·영미 간 단독 강화 혹은 히틀러 정권의 붕괴는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일본은 유일한 추축국으로서 영미와 단독으로 전쟁을 지속해야만 한다. 이런 경우, 연합국 측이 일본에 제시할 강화 조건은 다음과 같이 예상되었으며, 일본에게는 극히 가혹한 조건이었다:
영토 병합 금지 및 배상금 면제,
개전 전 미·일 협상 시에 미국이 제시한 ‘헐 4원칙’의 수용,
삼국동맹 폐기,
중일전쟁 이전으로의 회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남의 1940년 9월 이전 상태로의 복귀,
내남양(南洋)의 비무장화 등.
더 나아가, 이 “독일의 급변”과 관련하여, 참모본부가 매우 중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사안이 바로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였다. 이 연구안에서도 “독일이 급변할 경우의 소련의 [대일] 태도”에 대한 항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고,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4년 1월 4일, 전쟁지도반이 작성한 「쇼와 19년도(1944년) 위기 극복을 위한 전쟁지도 방책에 관한 설명」(이하, ‘전쟁지도 방책 설명’)이라는 문건에서는, 일본의 전쟁 지도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은 ‘소련의 대일(對日) 동향’이라고 명확히 규정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만일 1944년도에 독일이 탈락하고 소련이 대일 참전하게 되면, “더 이상 독자적인 전쟁 완수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고,
나아가 “1945년 중반에 독일이 항복하고, 소련의 참전이 1945년 말 혹은 1946년 초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도,“극히 우발적인 정세 변화(僥倖的情勢의 변전)”가 없는 한, “독자적인 전쟁 완수를 확신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1944년도에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소련의 대일 참전을 유발하게 되어, 국체(國體)의 유지조차도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상의 정세 분석을 바탕으로, 일본이 자주적으로 전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력과 전력의 추이, 장기전에 대비한 전략적 지도, 국내 체제 정비 및 전쟁 종결의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소련의 대일 참전”을 최악의 경우에도 1945년 봄 이후, 가능하다면 1945년 말 이후로까지 지연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독일이 1944년 말까지는 건재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렇다면 독일의 건재를 위해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 전장에서 가능한 한 많은 미·영 세력을 견제·흡수하여, 독일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일본이 태평양 전선에서 오히려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그로 인해 대소 전쟁 준비가 소홀해질 경우, 오히려 소련의 대일 참전을 자극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던 것이 바로,
태평양 전선에서의 “대미·영 전세(戰勢)의 철저한 돌파” 방책과,
동시에 “대소전 준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극동에서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던 관동군에서는, 이미 1943년 하반기부터 남방 전선 배치를 위한 병력 추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44년에 들어서자 미국군의 잇따른 반격으로 인해 그 추출 병력은 예상치를 상회하게 되었다. 또한, 중일파견군의 ‘제1호 작전’(대륙 관통 작전)을 위한 병력 증강이나, 남서 제도·대만 및 조선을 대상으로 한 전쟁 대비 강화 등을 위해, 다수의 병단 및 부대가 관동군으로부터 추출되었다.
그 결과, 1944년 4월경에는 관동군의 전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배치 병력 12개 사단의 실전 능력은 9개 사단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관동군 직할의 포병·독립 공병·방공 부대 등 병력은 1942년 당시와 비교해 절반 이하로 감소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후에도 병력 추출은 계속되었고, 1944년 9월 말 시점에서의 관동군 지상 주력 병력은 6개 사단, 1개 전차 사단 정도에 불과했으며, 대소(對蘇) 전쟁 대비의 약화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소전 대비’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태평양 전선에서 대미·영 전세를 철저히 돌파하려는 시도는, 당시 일본의 국력과 전력으로 보아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전쟁지도 방책에 관한 설명』에서는, “쇼와 19년도(1944년)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대미·영 전쟁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1944년 3월 15일, 전쟁지도반은 『쇼와 19년 말까지를 목표로 한 전쟁지도에 관한 관찰(제3안)』(이하 ‘전쟁지도에 관한 관찰(제3안)’이라 함)이라는 연구안을 작성하였다. 그 요지에서, 1943년 9월 30일의 어전 회의 결정에 따른 제2차 전쟁지도 대강을 견지하고, "일본 제국이 자주적으로 희망을 갖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절대국방권의 확보
국력의 유지 및 육성
국민의 전쟁 지속 의지 확보
일본 영향권 하의 국가들의 전쟁 협력 확보
독일의 건재
일소(日ソ) 중립 관계의 유지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제2차 전쟁지도 대강이 결정될 당시(1943년 9월)에는 “실현 가능성이 확실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세계 전황 및 정세의 상당한 변화가 예상되는 오늘날”(1944년 초)에는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며, 전쟁지도 방침의 변경·수정 여부 및 그에 따른 대응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특히 위 조건 중에서 가장 우려된 것은, (1) ‘절대국방권 확보 전망’을 전제로 한 (2) ‘국력 유지·육성’과 (6) ‘일소 중립관계 유지’였다.
먼저 전제조건인 (1) 절대국방권 확보의 전망에 대해, 중부 태평양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도서(섬)들의 연쇄로서 더는 지역적으로 깊이가 없으며, 적의 압도적인 해공군 전력의 집중 투사가 가장 용이한 지역’이라고 지적되었다. 여기에 더해, ‘적의 반격 속도에 대한 오판(약 반년)’과 ‘해군의 전방 거점 고수(固守) 사상’으로 인해,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이제 적은, 일본의 작전 준비가 미완성이라는 점을 틈타, 이르면 1944년 4~5월, 늦어도 6~7월경에는, "일본 국방권 중에서도 치명적인 요충이자 가장 약점인 중부 태평양 지역"에 대해 본격적인 결전형 반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따라서, 절대국방권의 핵심 지역이 일본과 적국의 전쟁 수행에 미치는 가치, 적의 의도, 양국의 전력 격차, 일본의 방위 준비 결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더 이상 ‘배치된 병력만으로 지속전을 통해 반격을 저지하는 사고방식’만으로는 국방권을 유지하기 어렵고, 앞으로는 '전력을 순차적으로 투입해 이를 보강'하거나 '전력을 집중시켜 적과 일거에 결전을 치르는' 둘 중 하나의 상황으로 귀결될 것"이라 판단되었다.
전자는, 1943년 9월 30일 어전 회의 결정에 따른 제2차 전쟁지도 대강을 기반으로 하여, 추가 전력 투입을 통해 절대국방권을 강화하려는 방식이며, 후자는, 지속전 개념만으로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결전을 통해 승리를 획득하려는 방식이다. 하지만, 전력을 순차 투입하여 지속전을 고수하든, 전력을 집중시켜 결전을 시도하든, 국력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2) ‘국력 유지·육성’의 전망이다. 이에 대해 본 연구안은, 일본의 국력은 “쇼와 18년도(1943년) 중반을 기점으로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물적 전력(주로 항공기와 선박)은 1944년 7~8월을 정점으로 점차 하락 추세를 보일 것”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전망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국력과 작전 모두 대체로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국력과 전력이 최고조에 도달할 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 시기에 무언가 주도적인 전력 발휘를 꾀하지 않으면, 결국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한편, (6) 일소 중립 관계의 유지에 관해서는, 이는 전적으로 소련의 대일 태도에 달려 있으나, 그 결정 요인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대미·영 전세’와 ‘독소전(獨-蘇戰)의 전황 추이’가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 이래 큰 기대를 걸어온 독소전(獨蘇戰)의 전황도, 더는 독일군이 반격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며, 이제 향후 1944년 6월에서 7월경에 결성될 것으로 보이는 유럽 제2전선에서 독일이 건재할 수 있을지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전년도 말 작성된 『기밀 전쟁일지』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대미·영 전쟁 전황에 대해서도, 불행히도 일본이 중부 태평양 지역의 절대 국방권에서 패퇴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일본의 실력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소련의 대일(對日) 태도 결정에 있어 자유 재량의 여지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1944년 중 소련의 대일 참전은 작전 준비 등의 이유로 인해 곤란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 대신 “대미(對美) 기지 제공”이나 “중국 국민당 정부(중경)의 지원을 통해 점차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행위” 등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면, (6)번 항목인 「일소 중립관계의 유지」에 대한 기대는, “일본과 독일의 전세가 호전되지 않는 한”, 아무리 길어도 1944년 말까지가 한계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즉, 일본이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의 태도에 구속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전쟁을 지도할 수 있는 기한은 대체로 1944년 말까지라고 여겨진 것이다.
이상의 (1) 절대 국방권 확보, (2) 국력의 유지 및 육성, (6) 일소 중립관계 유지의 각각에 대한 전망을 바탕으로, 본 연구안에서는 올해 중, 즉 1944년 중에 전세의 대세를 결정짓는 것을 목표로 삼고, 주적(主敵)인 미국에 대해 대체로 여름에서 가을 무렵 결전을 기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황 악화, 국력의 한계, 그리고 유럽 전장에서의 이탈리아의 항복과 독일 전황의 불리함 등이, 대미 결전에 대한 명확한 전략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된 것은, 이듬해인 1945년 4월 조약 연장 통고 기한이 도래하는 「일소 중립관계 유지」였으며, 동시에 소련의 대일 참전 시기에 대한 예상이었다. 그리고 국력의 한계로 인해 대소(對蘇) 전쟁 대비와 대미 전쟁 대비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적어도 소련과의 중립 관계가 유지되고 북방의 안전 보장이 담보되는 1944년 내에 대미 결전을 벌이는 구상이 도출된 것이다.
또한, 태평양 전선에서의 대미 결전이 유리하게 전개될 경우, “소련을 일본·독일 측에 끌어들여, 나아가 영미 측으로부터의 타협적 평화 제의로 이어질 수 있는 정세 전개”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대소(對蘇) 정책은, 「일소 중립관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전쟁 전략 방책의 성패와 더불어 국운(國運)을 좌우하는 최대 요소로 간주되었으며, 나아가 전쟁 전략 방책과도 맞물려, "대체로 올 여름에서 가을의 호기를 보아 독소(獨蘇) 평화 중재를 도모하고, 이를 위해 특파 대사를 파견할 것"이라 명기되었다.
한편, 전쟁 지도의 중심축으로 간주된 「전략 방책」에 대해서는, 본 연구안의 『결전을 필승으로 이끄는 전략 방책』이라는 제목 아래, 결전 주 작전 구상이 명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제1기는 1944년 6월에서 9월 무렵까지, “해군(항공을 주력으로 하는)을 주체로 하여 중부 태평양의 절대 국방권 주변에서 파상적인 반격 작전”을 통해 결전의 서막을 형성하고, 이어 제2기는 1945년 봄 무렵, “다시 중부 태평양 절대 국방권 인근에서 해군에 의한 미 해공군 요격 작전”을 통해 결전을 확실히 하려는, 이른바 추격 작전 구상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안의 「결론」에서는,
"과거 수많은 흥망의 전쟁사를 돌이켜보건대, 전쟁 말기 전략적 전환점을 포착하는 데에 실패한 국가는 항상 패자가 되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며,"전쟁 종결 방안을 대본영(大本營)과 정부 수뇌부 간에 논의하기 시작할 시기는, 6~7월 이후 전쟁지도 방책 결정 시점이어야 한다"고 제언하였다.
1944년 6월 23일, 사이판섬 탈환 작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날, 전쟁지도반은 상기 연구안 『전쟁 지도에 관한 관찰(제3안)』(3월 15일 작성)에 이후의 정세, 특히 추축국 측의 급격한 전황 악화를 반영하여, 구두로 관계 상급자들에게 설명을 진행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동서 양 전선 모두에서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패배하는 쪽이다. 이제부터는 이 전쟁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독일이 붕괴할 경우, 일본 역시 종전을 모색해야 하며, 그 조건은 '타협적 평화'와 '굴복적 평화'로 나뉘며, 전황이 최악의 경우에는 국체(國體) 유지만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 전 전쟁지도반장 마츠타니 마코토 대좌의 전후 회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쟁지도반의 업무일지에 따르면, 본 연구안은 먼저 마츠타니 대좌로부터 제1부장·제2과장, 하시모토 소좌로부터 제2과의 세시마 소좌의 의견을 청취한 후, 제1부장의 동의를 얻었으나, 인쇄 배포에 대해서는 비동의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후, 하타 참모차장에게 본 연구안을 설명하자, 참모차장은 그 내용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지금 이 안건을 고급 참모차장이나 참모총장에게 제출하더라도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으므로, 당분간 시기를 기다리며 절대 외부로 유출하지 말 것”이라 명령했다고 한다. 아직 절대 국방권 확보를 위한 노력이 한창이던 당시, 이를 부정하거나 일본의 패배를 예견하는 듯한 연구안은 조직 안팎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된 것이다.
결국, 1944년 3월 15일에 작성된 『전쟁지도에 관한 관찰(제3안)』에 기반한 전쟁지도 방책은, 육해군 수뇌부 간에 충분한 논의 없이, 해군 주도의 ‘아(あ)호 작전’이 발동되고 만다. 여기에 바로, 아호 작전 실패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기밀 전쟁일지』는 지적하며, 또한 "황국(皇國)의 존망을 결정할 중대한 작전이 전쟁지도적 관점에서 전혀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