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인문학
건강 염려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을 종종 진료한다. 며칠 전에도 그 환자가 다시 내원했다. 처음에는 이런 염려증이 있는 줄 몰랐다. 초진 때 열심히 치아 관리를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내 말이 화근이 됐다. “현재 구강위생 상태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나름 괜찮다고 얘기한 것인데 환자는 되물었다. “나쁘지 않다는 것은 좋지도 않다는 거지요? 그럼 분명히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는 건데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안 그래도 요즘 입안이 텁텁하고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무슨 나쁜 병이 생기려고 하는 거 아닌가요?”
만약 내가 “나쁘지 않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구강위생 상태가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두 가지 표현은 사실 의미상 그렇게 차이가 있지 않다. 우리는 두 표현의 속 의미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자는 부정형 표현이고 후자는 긍정형 표현일 뿐이다. 하지만 듣는 환자에 따라서는 그 뉘앙스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부정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의사의 습관
의사가 사용하는 부정적인 표현은 “근거가 없습니다.”,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글쎄요,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상태가 더 나빠질 겁니다.”,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월등하게 더 많이 이런 부정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 이유가 따로 있을까?
의사들이 늘 고민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고지의 의무’다. 환자에게 병에 대해서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 예후, 주의사항, 합병증 등 사실 물 샐 틈 없이 모든 것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지 사항을 수십 페이지에 써 놓고 읽어보라고 하고 동의서를 받아도 의사가 ‘적극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요즘의 실상이다.
사정이 그렇다고 하니 의사로서는 최대한 ‘고지’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고지’라는 것이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고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입만 바라보면서 희망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일 텐데, 막상 의사의 머릿속은 ‘부정 표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어 습관 중 일부는 제대로 진단을 하려고 하는 의사의 태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환자도 알아야 한다. 정확한 진단을 위한 방법론 중 ‘감별 진단(Differential diagnosis)’이라는 의학적 판단 과정이 있다. 쉽게 말해서 환자의 증상과 검사 결과로 보았을 때 예상되는 병명이 여러 개가 있다고 했을 때, 확실하게 아닌 질병을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다. 객관식 시험을 생각해 봤을 때, 확실히 아닌 답을 하나씩 지우면 최종 남은 것이 정답이 된다. 그리고 최종 진단명의 개수를 줄이는 과정은 최종 진단을 위한 중간 과정이다. 이런 중간의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은 질병에 대해서 환자에게 알려야 할 의무는 의사에게 있다. 즉 ‘배제할 수 없다’라는 표현이다.
경험이 많은 의사의 소견이 아무리 무게감이 있다고 해도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는 ‘경험’은 신뢰도가 가장 낮은 근거로 취급된다. 가장 신뢰도 높은 근거는 ‘이중 눈가림 무작위대조연구(Randomized Controlled Double Blind Studies)’결과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다양한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가짜 약과 진짜 약을 나눠주고, 복용 후에 경과를 대조하는 연구 방식 같은 거다. 누가 진짜 약을 받았는지 모르는 채 진행해 ‘눈가림’이 연구 결과에 미치는 편향(bias)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 과학적 연구는 계속 진행되지만 이런 신뢰도 높은 근거로만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연구에 의해서 기존의 지식은 갱신된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분야도 수두룩하다. ‘근거가 없다’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한다. 신뢰도 높은 연구 결과, 즉 과학적인 근거를 명확하게 알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면 확신해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 환자가 원하는 것은 정답이 아닐 수도
5살인데 넘어지면서 전치부 젖니가 빠져서 잃어버린 환아와 보호자가 찾아왔다. 깨끗하게 잘 빠져 있어서 특별하게 할 치료는 없었다. 그저 앞니 하나 없이 1~2년을 지내야 한다는 것 이외에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크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앞니가 좀 일찍 빠져서 그렇지 따로 다른 치료를 당장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구치는 잘 나올 겁니다.” 하지만 엄마는 불안하게 말했다. “인터넷을 찾아서 봤더니 나중에 교정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교정을 하지 않게 할 수는 없나요? 그리고 언어에 민감한 나이인데 앞니가 없어서 발음이 새면서 애가 말이 어눌해질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앞니에 이를 미리 해 넣거나 구멍을 메워줄 방법은 없나요?” 도대체 왜 그런 걸 검색하고 왔을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습관에 길들여진 여느 의사처럼 대답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가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는 것은 궁금한 것이 그만큼 많고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에서 알게 된 내용이 전부 거짓이라는 의사의 말을 직접 듣고 싶어서 병원에 왔을까? 생기지 않아도 될 일이, 생기지 말았으면 한 일이 자기 자식에게 생긴 것이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나고 왠지 미안하기도 한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어쩌면 같은 부모로서 의사에게 그저 진정한 위로를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런 마음을 헤아린다면, “에구, 얼마나 속상하셨어요. 예전부터 1년에 몇 번씩 이런 아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별문제 없이 영구치도 잘 나오고 이것 때문에 교정 치료를 받은 예는 없었습니다. 거의 문제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뼈도 부러지지 않고 얼굴에 흉이 안 졌으니까 이만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혹시나 아까 말씀하셨던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 어렵지 않게 해결해 드릴 수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정도는 말해줬어야 했다.
진단명이 정확하지 않거나, 배제할 수 없는 것들이 많거나, 근거가 될 만한 학문적 뒷받침도 없어서 “글쎄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가 정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는 정답만 말해주면 안 된다. 충분한 위로와 공감을 전해야 하는 것도 의사의 의무다. 고지의 의무에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내용이 더 들어 있어야 옳지 않을까? 합병증을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세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