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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에 생각한 것

‘장애인도 시민으로 살고 싶다’는 외침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



장애인 날인 오늘,
장애인들은 ‘우리도 시민으로 살고 싶다’고 외치기 위해 지하철로 나섰다. 시민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위한 그들의 투쟁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 장애인들이 이동의 자유를 가지는 사회, 낙인과 혐오에서 벗어나는 사회, 그들의 권리가 위로부터의 지지를 받는 사회, 그들의 삶 자체가 근거가 되는 사회가 되길 바라면서, 그리고 나의 마음을 움직인 다음 문장들이 누군가의 가슴도 뜨겁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아래의 글을 나눈다.


                                        ***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의 권리가 있습니다.
 아프다고 외치는 거죠. 소리치는 거예요.
 그런 외침에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겁먹지 마세요.
 우리 주변엔 멋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 개그맨 이동우, JTBC 뉴스룸 인터뷰(2024.4.20.) 중에서 -

                                        ***








이동, 낙인, 정치, 합리성
 -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바라보는 네 가지 키워드


귀한 자리에 토론자로 초청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한국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지켜보며 들었던 고민을 네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 키워드는 이동, 낙인, 정치, 합리성입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이동입니다. 이동권은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장애인에게 이동의 권리는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동할 수 없으면 교육받고 노동하고 건강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으니까요.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전국의 등록장애인 7,02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건강검진을 받지 못한 장애인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검진 기관까지 이동이 불편해서(18.4%)였습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지 못한 이유를 물었을 때도 "의료기관까지 이동이 불편함"(29.8%)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경제적인 이유(20.8%)"였습니다. 국토교통부에서 작성한 '2020년도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마을버스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0%였습니다. 설사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할지라도, 휠체어 사용자는 마을버스를 탈 수 없어 집을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투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박탈당합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낙인입니다. 휠체어 사용자인 제 친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저상버스를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상버스를 타려고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친구는 "운전기사님이나 승객들이 자신에게 뭐라고 할지 몰라서, '너 때문에 이렇게 모두가 불편해지는 것 아니냐'라고 할까 봐 두려워서"라고 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수십 년간 낙인을 감당하며 장애인으로 살아온 그가 저상버스 탑승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2017년 '장애정책연구'에 출판된 한 연구는 미국의 장애인 4,161명을 대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장애인이 정류장으로 갈 수 있는 접근 방법의 부재(26.0%)와 같은 물리적 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던 것은 "운전기사의 부적절한 태도(26.7%)"였습니다. 이 결과를 두고 운전기사 개인의 자질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운전기사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그 사회의 인식을 반영하는 지표일 테니까요. 이동을 막는 물리적 장벽이 사라지더라도, 낙인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장애인이 자신의 집과 시설에 갇혀 있게 됩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정치입니다. 작년부터 진행된 이동권 투쟁을 지켜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처음에는 그 불편함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던 시민들이 투쟁에 나선 장애인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탄 이들이 이동권 투쟁으로 인해 지각하는 일이 반복되자 "왜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느냐"라며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정치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2022년 3월, 대선에서 막 승리했던 당시 국민의힘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서울 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규정했고, 정부에서는 장애운동 자체를 적대시하며 처벌하고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운영해야 하는 국가 살림에서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마땅히 거쳐야 할 경청과 조율이라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장애인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장애인과 시민을 분리시키고 그들이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기를, 그렇게 여론의 불만이 점점 더 커져 장애인이 '존중받을 수 있는 시민'의 범주에서 멀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편견(The Nature of Prejudice)을 저술한 고든 올포트는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가 외부인과 만날 때,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서로의 삶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어떤 만남은 편견과 혐오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만남이 상호 이해로 이어지기 위한 네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그 만남이 위로부터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더라도 인종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교장이, 기업주가, 대통령이 없다면 그 만남은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의 확대로 이어집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가 지난 2년 동안 이동권 투쟁의 목소리를 방관했다는 몇몇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가장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싸우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악화시킨 적극적 개입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 키워드는 합리성입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두고 일각에서는 "생떼를 쓴다.", "억지를 부린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투쟁이 주장하는 변화의 내용과, 이를 요구하는 방식이 모두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상대측에서 고용한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놀라울 만큼 성실하게 일하며, 논리적인 문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서술하고, 생존자의 약점을 찾아 비난하고, 권위 있는 외국 대학에서 은퇴한 교수들과의 협업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만들어 가져오곤 했습니다. 근거의 무게로 주장의 합리성을 판단하는 법정에서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종종 승소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근거는 언어의 행태를 한 지식으로 표현되는데, 그 지식의 생산에는 자본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동권 투쟁에 나선 장애인을 비난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모습처럼, 공동체가 오랫동안 누적된 차별의 역사를 지워버리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부과할 때, 차별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당사자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와 기회를 빼앗깁니다. 그러한 조건 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이미지 출처 : unsplash.com

글 출처 : 김승섭,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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