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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혁 Apr 15. 2024

하이라이트 더빙 캐스터

이제는 역사 속으로

야구 중계를 즐겨 보고 여기에 하이라이트 프로그램까지 섭렵하는 팬이라면 올 시즌 달라진 점을 이미 눈치챘을 거다. 이번 시즌부터는 모든 방송사가 캐스터·해설위원의 음성이 들어가 있는 중계 피드를 공유한다. 그동안은 타사에서 중계한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더빙 담당 캐스터가 목소리를 새롭게 입혀 방송했는데, 이제는 타사의 캐스터·해설위원 목소리를 그대로 튼다는 뜻이다. 이는 이번 시즌 개막을 앞두고 중계방송 4사가 합의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제 내 목소리를 우리 채널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베이스볼 S'뿐 아니라 타사의 '아이 러브 베이스볼(KBS N 스포츠)', '베이스볼 투나잇(MBC 스포츠플러스)', '스포타임 베이스볼(SPOTV)'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목소리를 다른 채널에서 듣는 것이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약간은 색다른 느낌이다. 


'하이라이트 더빙 캐스터'라는 개념은 2009년쯤 생겼다.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매거진 프로그램의 시초 격인 '아이 러브 베이스볼'에서, 타사가 중계한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하이라이트 더빙만을 담당할 캐스터들을 처음 선발했다. 그 이후 '베이스볼 투나잇', '베이스볼 S' 등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각 방송국에 생겨나면서 하이라이트 더빙 캐스터의 숫자는 더 늘어났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 정식 스포츠 캐스터가 되려면 자연스럽게 야구 하이라이트 더빙을 거쳐야 했다. 이때 방송을 시작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캐스터 상당수가 하이라이트 더빙 출신이다.


나 역시 2014년 XTM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었던 '베이스볼 워너B'의 하이라이트 담당 캐스터로 방송에 입문했다. 남들이 보면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하이라이트 더빙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 중계방송 못지않게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경기 전부터 하이라이트 편집을 담당하는 PD와 어떤 식으로 하이라이트를 구성해 나갈지 논의하고, 경기의 주요 포인트들을 파악해야 한다. 경기도 처음부터 꼼꼼하게 봐야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보통은 점수가 나는 상황 위주로 하이라이트를 만들지만, 경기의 흐름에 따라 점수와 관계없이 중요한 이닝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하이라이트에 넣고, 어떤 상황은 건너뛸지 역시 PD와 캐스터가 상의하며 결정한다.


하이라이트는 컷이 짧고 빠른 템포로 진행되기에 멘트가 너무 길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화면상 건너뛰는 상황들 역시 시청자들이 혼란스럽지 않게 충분히 설명해 줘야 하고, 말이 한번 꼬이면 하이라이트 전체가 꼬이는 경우도 많아서 굉장히 집중해야 한다. 여기에 경기가 막판에 뒤집히거나, 끝내기가 나오거나 하는 경우에는 미처 화면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바로 더빙에 들어가야 할 때도 많다. 하이라이트 더빙은 대부분 라이브로 진행되기 때문에 긴장감 속에 더빙을 마치고 나면 손에 땀이 흥건하다. 


하이라이트 더빙 캐스터의 이름은 이렇게 잠깐 자막으로 나오는 게 전부지만 이 10분 남짓의 하이라이트를 완벽하게 장악해야 한다.

이제는 따로 더빙을 입힐 필요가 없게 되었기에 하이라이트 더빙 캐스터도 아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듯하다. 물론 실제 중계의 음성으로 하이라이트를 보는 게 더 생생할 수도 있지만, 더빙 캐스터만의 개성 있는 멘트로 구성된 하이라이트를 보는 재미가 없어진 건 아쉽다. 각 채널마다 오랜 시간 하이라이트를 담당해 온 더빙 캐스터들이 갑작스럽게 물러나게 된 것 역시 아쉬운 일이다. 그래도 팬들에게 재밌는 하이라이트를 전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기억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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