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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안 May 25. 2024

원영적 사고하며 발리 여행하기









지금 시각은 4:29am. 발리 여행 7일 차. 귀국을 3일 앞두고 있다.

현시점 발리에서 가장 힙한 해안 지역 짱구의 새벽.

방까지 쿵쿵 울리던 숙소 바로 옆 클럽 디제잉 공연이 새벽 1시에서야 끝나, 겨우 잠든 지 2시간 만에 깼다.





메종 키츠네는 왜 발리에 클럽을 열었나




코가 막혀 맹맹하다. 이불 바깥으로 팔을 내밀어 자세를 바꾸어 본다. 에어컨 바람이 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여기에서 에어컨 설정 온도를 1도 더 올리면 그때는 더워서 깨게 될 것을.

이불 안으로 몸을 다시 웅크린다. 적도의 습기를 이기지 못한 이불이 살짝 눅눅하게 몸을 누른다. 더 북쪽에 위치한 정글 지대 우붓에서부터 발리 호텔의 이 눅눅한 이불과 함께했는데, 적응은 아직이다.

편안하게 자고 싶다. 하지만 편안하게 잘 때까지 이리저리 자세 바꾸는 습관이 있다. 돌아누울 때마다 호텔 침구 특유의 바스락거림이 방 안에 뒤척이는 소음을 만든다. 결국 남편까지 깼다.

아. 발리의 첫 3일을 보낸 다이빙 샵에서 이불 대신 지급했던 모포가 그립다.











이번 여행은 나와 남편이 오랫동안 알아보며 준비한 자유 여행이다.

관광지 전역에서 영어가 통하는 여행자 친화적인 발리섬. 신혼 여행지로도 인기이니 휴양만 즐길 수 있겠지. 여유롭게 쉬고 오리라 기대했다. 출국하는 비행기를 타며 바란 건 나중에 글쓰기로 남길 좋은 추억거리 하나 생기기를.

그 바람은 어쨌든 이루어졌다. 잠이 완전히 깨 버린 새벽에 폰을 붙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번 발리는 나랑 유독 합이 잘 안 맞는다.

화두에 오를 때마다 참 좋았다 되뇌는 스위스나 몰디브와는 다르다. 그때는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웠다. 이 행운이 갑자기 끝날까 봐 혼자 문득 불안해했는데.

지금은 마치 초월자가 애송아, 인생은 이렇게 희로애락이 쉴 새 없이 닥쳐오는 것이란다-하고 나에게 가르치듯 즐거움과 실망,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다시 감사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중.





바투르산에서 본 아궁산 일출



야심차게 가장 평점 높은 현지 여행사로 예약한 일출 투어가 시작이었다. 새벽 3시에 숙소를 출발해 목적지 바투르산으로 달리고, 다시 오프로드용 지프차로 갈아타 산중턱에서 일출을 보는 투어이다. 발리에서 가장 높은 아궁산 뒤로 떠오르는 태양이 장관이며 소위 인생샷 쏟아지는 스냅투어로 더 유명하다.





새벽 바투르산을 오르는 지프차



한국에서 멀미약과 마스크, 새벽이슬 이기는 담요와 경량패딩까지 단단히 준비했다.






바투르산에서 본 새벽별




기다렸던 아궁산 일출




날씨가 다 하는 투어인데 정말 날씨가 도와주었다.

깨끗한 새벽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이 참 아름다웠다. 하늘과 구름을 불태우듯 물들이며 빛나는 노른자처럼 뜬 일출은 경이롭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봐도 딱히 인생샷은 아닌




정작 (남편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스냅사진 대부분이 망하고 만 것이다.

이걸 하려고 찾아본 블로그와 유튜브가 얼마던가? 분명히 sns용 인생샷이 쏟아진댔는데.

어디 올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 잘 나오면 어디 올릴 수도 있지, 이왕이면 ‘남들 다 한다는’ 인생샷 나도 찍으면 좋잖아. 이렇게 노력했는데!





가장 망한 사진 대공개합니다(일출은 오른쪽 너머)




속상한 마음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애써 가린 채 연신 사진첩을 넘기다 다음 목적지인 낀따마니 카페 아카사에 자욱한 안개를 마주했을 때, 이 두서없는 억울함은 극에 달했다.

낀따마니 지역은 앞서 일출을 감상한 아궁산과 그 근처 호수를 함께 조망할 수 있어 소위 ‘뷰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가 많다. (인생샷 재도전이 가능함은 물론이다) 널린 뷰 맛집 중에서도 맛집만 찾느라 투어 할인 20%도 적용되지 않는 인기 카페로 향했는데 이렇게 또?





낀따마니 카페 아카사 도착 당시




원래 1시간의 자유시간 동안 산과 아침 호수를 보며 커피와 브런치를 즐기는 일정이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뭐가 보여야 보지. 이거 장마철 설악산 대피소 전망이잖아. 아빠랑 대청봉 오를 때 딱 이랬는데.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나를 남편이 달랬다. 해가 뜨고 있으니 조금은 안개가 걷힐 것 같다고. 커피까지만 마시고 정 별로면 일어나자고.

자욱한 안개를 두세 번 찍다 그것도 말았다. 희뿌연 시야 너머 태양 때문에 얼굴만 뜨거웠다. 바람막이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는 커피 나오면 깨워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이윽고 커피가 나왔다. 산미가 강하다. 발리는 음식이 참 맛있는 반면 맛있는 음료가 거의 없다. 커피는 산미가 너무 강하고 과일 주스들은 물탄 듯 밍밍하다.

어쨌든 설탕을 연신 털어 넣으며 모닝커피를 입에 맞추려 노력했다. 조금 안개가 걷힌 듯도 하다. 남편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면 지금이라도 한두 장 찍고 출발해야지.

그랬는데..?









적도의 태양이 무섭게 떠오르며 순식간에 모든 안개를 걷어냈다. 번쩍번쩍 빛나는 호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벌떡 일어섰다. 내 뒷줄의 다른 이용객들도 일어서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입이 댓 발 나와 웅크렸던 게 스스로 조금 민망하지만 뭐 어떠랴. 순간에 감사하며 계속 사진을 남겼다.








다음날은 발리 특유의 계단식 논을 구경할 수 있는 3단 수영장 알라스 하룸을 찾았다. 그렇게 부인 소원이라는 인생샷을 남기기 위해 남편은 예술혼을 불살랐다. 그날 오후 우리 부부는 (인생샷은 건졌으나) 더위를 먹어 숙소에서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 날 저녁에 전날 바투르 산 작가가 작업을 마친 사진을 받아본 후, 분노를 내려놓기로 했다.
















이후로도 예기치 못한 소소한 불운과 그를 뒤집는 행운은 계속되었다.

해를 등지는 우붓 숙소. 그늘 아래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어 좋았지만 정작 널어 둔 수영복이 잘 마르지 않아 축축한 채로 다시 입어야 했다거나,

온 세계 사람 모인 우붓 밤거리에서 감성에 젖어들었다가 너무 붐비는 인파에 기운을 쏙 뺐다거나.









카페 검색할 여유도 없어 보이는 대로 앉은 스타벅스 자리가 마침 우붓 사원 민속무용 공연의 1등급 좌석이었다거나.

유명한 인센스 매장이 휴무인데 마침 가까운 다른 매장에서 더 저렴하게 좋은 인센스를 찾은 것.

평점 높은 세탁소가 예약 마감이라 다른 세탁소를 향해 걸으며 적도의 땡볕을 받아낸 것. 그러나 무엇 하나 손상 없이 잘 세탁된 것.









숙소 바로 근처, 예능 방송까지 탄 유명 카페에 바로 입성했는데 에어컨이 없어 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견딘 것. 이후 백인 많은 인스타감성 핫플레이스를 (주로 에어컨 없는 것이 특징이다) 미련 없이 지나칠 기준이 생긴 것.









짱구의 비치 클럽에서 운 좋게 일몰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잡았는데 그늘이 하나도 없는 자리라 괴로운 2시간을 견디다, 그렇게 주문해 먹은 피자가 생각보다 맛있었던 기억.

저녁에 조명을 밝힌 비치 클럽이 명성대로 설레는 열대의 낭만이었던 것. 그러나 막상 그를 즐길 기운은 없어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온 것.









숙소 수영장이 공사 중이라 대체용으로 안내된 인근 수영장이 기대보다도 훨씬 좋았던 것. 그 한적함을 온전히 즐긴 이유는 바로 전날 북적이는 비치 클럽에서 부대꼈기 때문임을 되새길 수 있는 것.

이야깃거리는 예상 못 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 생겼다. 이번 여행은 그래서 이야깃거리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떤 일이든 긍정적으로 넘기는 원영적 사고가 유행이다. 신이 내 인생에 시고 아린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겠다는 서구의 마인드셋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름다운 말이다. 하지만 레모네이드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레몬이다.

원영적으로 사고할 때 필요한 준비물은 장원영으로 태어나는 것도, 금강불괴의 정신력을 갖는 것도 아닌 레몬일 뿐.

인생에 레모네이드가 꼭 필요한 것인지, 여행에도 레모네이드가 필요합니까? 거부권을 행사하고 싶지만 손에 계속 레몬이 주어지고 있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이제 내 몫이 되었다.

불운 자체를 바로 긍정할 여유까지는 없지만 대신 쉴 새 없이 감사할 일을 찾으며 발리를 여행 중이다. 이 여행을 레모네이드로 기억하고 싶기에.

아직까지 둘 다 크게 아프거나 다치지 않은 것도 감사할 부분이다.



해가 뜨면 마지막 여행지로 넘어갈 예정이고 또 체크아웃 투어가 남았다. 웬일로 한국의 집이 그립다. 이제는 다만 무탈히 돌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새벽에 얕은 잠을 깨 글을 시작했지만,

숙소 테라스(와 방)에서 최신 클럽 풀 파티를 몇 시간 즐긴 것까지 언젠가는 색다른 추억이 되기를 바란다. 대신 앞으로는 숙소 예약 때 더 주의를 기울여야지. 마이애미 클럽 같다는 찬사가 구글 리뷰에 있던데 그로 인해 마이애미의 환상을 정리하게 되었다.



지금은 6:50am, 새소리가 들린다. 여정을 반추한 지 벌써 2시간 반이 흘렀다. 열을 올리며 글을 써서인지 춥지 않다.

이제 슬슬 졸리다. 숙소 체크인 때 받은 귀마개를 끼우고,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짧은 잠을 청해 볼까.





짱구 숙소 멀리로 펼쳐진 오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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