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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천권 Aug 31. 2023

깨진 꿈

밴쿠버의 헌 구장에서는 매 주일 저녁 축구를 한다. 나는 학생 때는 공격수였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수 점점 수비수 역할을 하고 가끔 공격도 한다. 함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빠르다고 한다. 물론 나이에 비해서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 뱉지는 않는다. 아주 오랜시간 코로나 때문에 게임을 할 수 없었다. 종종 게임이 허락되기는 하지만 불규칙적이었다. 축구가 허락되는 날이면 엄창 난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날 저녁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수비수를 보고 있는데 상대 공격수가 찬 공이 굴러온다. 그 공을 걷어내려고 공에 발을 데는 순간 놀랬다. 내 발리 공을 차기는 했지만 밀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발이 공에  밀리는 경험은 내 축구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아주 순간의 경험이었다, 함께 운동하는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내 내면에서 혼란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왜 내 발이 밀리지?‘ 문제는 축구를 한 다음날이었다. 걷는게 너무 힘들었다. 워낙 게임 때 많이 뛰는 스타일이다. 운동을 하러 왔으니 열심히 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게임에 임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뛸려고 한다. 일요일 저녁 축구를 마치고 뛴거리를 보면 7-8km 를 뛴걸로 나온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리가 아파서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패밀리 닥터를 만나자고 했고,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진단은 무릎 연골이 노화가 되어서 많이 닳았다. 그럴경우 무릎을 잡아주는 근육이 필요하다. 지금 할 수 있는건 물리치료를 하면서 근육을 늘려주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란다. 내심 ‘그래도 방법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무릎 근육에 도움을 주는 운동을 찾아서 조금씩 하면서 운동장에 축구하러는 자주 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운동을 자주 하지 못하니까 다리에 이상 신호가 더 많이 온다. 왼쪽 다리가 충분히 펴지지 않고 양치질 하느라 서 있으면 어느새 왼다리가 약간 접힌다. 결국 축구를 포기하고 요즘은 집에서 AB Slider 라는 도구를 이용 홈트를 하면 지낸다.


초등학교 2학년 시골에서 가죽으로 된 축구공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귀한 도구였다. 우리 같은 아이들은 고무공이거나 고무공에 실을 둘러서 본드로 6각형을 붙여서 만든 이상한 축구공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죽으로 된 축구공이 차고 싶었다. 일요일 새벽 아무도 깨워주지 않지만 어른 조기 축구회가 시작되는 시간에 달려 간다. 어른들이 게임 시작전에 골대로 슈팅을 하는데 안들어 가고 뒤로 흐르는 공을 주워서 앞으로 다시 보내는 볼보이를 자청해서 가는 거다. 이때가 유일하게 그 공을 차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어른들의 게임이 시작되면 남은 공을 가지고 놀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 정식으로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선수가 되었다. 이 때는 늘 연습을 하는게 아니고 게임 시즌이 되면 2-3달 전부터 선수들을 불러 모아서 연습을 시작했다.


내가 살던 시골 지역에 초등학교가 4개가 있었다. 그 학교들에서 나는 좀 유명한 공격수였다. 그래서 다른 학교 수비수와 경쟁을 붙이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 점점 축구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다. 비슷한 스타일로 학교 대표선수가 되었다. 그런데 중2때로 기억하는데, 88년 올림픽 꿈나무 육성을 한다고 선수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키가 작아서 아예 테스트도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큰형은 다른 여중의 체육 교사였다. 우리 부모님은 체육은 한명이면 되었다. 너는 다른걸 해라였다. 나는 이제까지 꿈을 축구선수로 두고 열심히 운동했다. 일요일이면 밥도 먹지 않고 운동장에서 살았다. 그런 내게 꿈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결정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그 당시의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겱국 포기를 해야만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청난 방황이었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축구 외에는 다른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그 무엇도 없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아, 그럼 그냥 아마추어로 축구를 즐기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더 이상 축구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았다.


축구 다음 나의 꿈

나는 만들기를 좋아한다. 보통 십대 아이들이 프라모델 조립을 좋아했다. 그 당시 유명한 회사는 ‘아카데미’라는 프라모델 회사였다. 이 회사 제품은 조립할 때 오차도 적고 정말 좋았다. 다만 가격이 다른 브랜드에 비해 비쌌다. 탱크도 조립을 하고 나중에는 모터와 배터리가 들어가서 전후 좌우 조정이 되는 탱크와 전차 같은 걸을 조립도 해 봤다. 그 다음은 물에서 모터를 이용해 가는 배였다. 그런데 이 당시는 리모컨 이런건 없었다. 방향키를 맞춰두고 연못 같은 곳에서 놀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 정도면 내가 살던 시골에선 엄청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축구 꿈이 무너진 그 즈음 나는 천체 망원경을 만들었다. pvc 파이프와 안경점에서 구입한 렌즈와 현미경의 접안 렌즈를 잘 맞추면 아주 먼데 산의 정상도 볼 수 있었고 달의 분화구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제대로 돈 주고 산 친구의 천체망원경을 하루 빌렸다. 그 날 밤 달을 보는데 내가 달 위에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1시간이 금방 갔다. 나의 다음 꿈을 천체과학자가 되기로 정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며 천체 물리학과를 바로 못가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듣고 그럼 물리학 과를 간 다음 천체물리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물리학과를 갔다. 전공이 시작되었을 때, 이제 내 갈길을 가야지 하며 수학과의 위상수학 수업을 신청했고 한 시간 참석하고 바로 드랍했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정말 갈데가 없었다. 막연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중,고, 대학때 들었던 음악들은 정말 마음을 흔든다. 안정된 때가 많지 않았던거 같다. 4시간 수면법 책을 읽으며, 내 시간을 조절하고 주말에도 부족한 잠을 채우고 다음주 영어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영어책에서 모르는 단어를 미리 다 찾아두고, 한 주 동안 열심히 외우고 했던 열심히 살았던 시간들이지만 내겐 안정감이 없었나 보다.  혹시나 하고 요즘도 가끔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을 유튜브에서 들어보면 마음이 아주아주 짠해진다. 이건 아마도 사춘기와 갱년기가 합쳐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때 내 꿈을 가지고 상의할 사람들이 있고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할 사람들이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내게 맞지 않는 꿈을 꾸었을까? 그래서 우리 애들에게는 천천히 직장을 가도 괜찮다. 제대로 하고 싶은걸 찾아라.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지 마라. 너의 길을 가라고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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