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of Kims Oct 30. 2022

귀사의 무궁한 발전은 이제 그만 기원합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링크드인의 한국어 사용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한국어로 올라오는 컨텐츠도 늘고, 자연스럽게 링크드인이라는 플랫폼 안에서 인플루언서라 칭할 만한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성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팁에서부터 자신이 쌓아온 내공이 묻어나는 경험담 내지는 간증, 그리고 직장생활의 고민이 많은 이들에게 힘과 동기부여가 되는 말씀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내용을 공유하는 고마운 분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상당수가 링크드인 포스팅을 올리는 스타일을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관찰된다. 전체를 보면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분량인데도 한 두 문장씩 끊어서 짧은 문단들을 만들고 거기에 순차적으로 번호를 붙이는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각 숫자가 하나의 독립된 포인트라고도 딱히 말할 수 없을뿐더러, 이 글이 무슨 목록인지 맥락도 없이 처음부터 ”1. “을 찍고 들어간다. 보통 이런 스타일로 쓰인 문서의 종류라고 하면 레시피, 조작 매뉴얼, 계약서, 법조문, 법학 교과서 정도를 꼽을 수 있겠는데 여기서도 번호가 매겨진 본론은 맥락(context)을 설명하는 소개글 이후에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무튼 주로 조언 내지는 경험담을 공유하는 짧은 링크드인 포스팅에도 숫자가 매겨진 초미니 문단들이 처음부터 등장하는 건 왜일까? 궁금해하며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숫자가 매겨진 목록은 바로 이런 때 쓰는 게 일반 상식이 아닌가 한다.)


1. 독해력,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요즘 욕을 먹고 있는 “MZ" 세대를 위한 배려다. 트윗 하나 분량, 즉, 세 문장만 넘어가도 스크롤의 압박에 신음하는 난독증 호소 세대에게 친절히 한 번에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씩만 떠먹여 주는 것이다. 거기다가 숫자를 곁들이면 논리가 전개되는 순서를 헷갈릴 이유도 없다.


2. 댓글 또는 다른 글에서 원문을 참조하기 쉽게 하기 위한 배려다. “잘 읽었습니다만 3번 포인트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충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와 같은 피드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3. 글쓴이가 기관 대 기관으로 소통하는 공문의 형식에 익숙해서다. “문의하신 내용은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우리 회사/부처/학교는 이렇게 조치하겠다”라는 공적 메시지에 등장하는 번호들이다.


답이 뭘까 조금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정말로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 차원이라고 한다면 딱히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이 번호들이 글쓴이가 창작 단계에서 스스로의 기억과 기록을 위해 붙였던 레퍼런스였다면 그것을 결과물에까지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건축물을 완성한 이후에도 공사 단계에서 설치했던 거푸집을 철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사실 이보다 더 합리적인 의심은, 글쓴이가 글의 무게감과 공신력을 더하기 위해 공문의 형식을 빌어 쓰는 게 아닌가, 이에 더해 본인이 팩스(facsimile)가 주류이던 시대 기관 대 기관으로 주고받았던 공문 또는 보고서의 형식에 가장 익숙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거다. 만약 그렇다면 별로 바람직한 전달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메일과 소셜 네트워크 시대에도 한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공문의 표준 형식을 살펴보면,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아무 의미 없는 문구가 필수로 1번으로 들어가고 본론은 2번부터 나온다. 기원도 불분명하고 서구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랜 관습의 잔재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을 가장 미래지향적인 플랫폼인 링크드인 포스팅에까지 굳이 적용할 이유는 1도 없어 보인다.


더불어, 논문도 외교문서도 보도자료도 아닌, 비교적 캐주얼하게 생산하는 포스팅이라면 습관적으로 써온 문어체와 어휘를 글의 소비자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로 다듬는 작은 노력을 인플루언서들께서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표적인 예로: “금일”을 “오늘”로 바꾸는 것, 글의 흐름을 흩트리는 지나친 괄호 사용 자제를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캐주얼하다고 해서 띄어쓰기 같은 맞춤법을 등한시해서는 곤란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인용할 거라 희망하는 글일 경우에는 더더욱. (한국어에서 가장 어려운 게 띄어쓰기인 것은 맞다.)


작은 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간결하게 그리고 타깃으로 삼은 소비자의 일상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무슨 어마 무시한 장벽 또는 기술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됐건 생산자가 있어야 소비자도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젊은 인플루언서들, 젊은 인식을 가진 인플루언서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연륜이라는 이름의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