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로 예측하는 일자리의 미래
다음 몇 가지 예시를 한 번 냉정하게 감정 이입 없이 생각해 보자.
(1) 수 천 명의 직원 가운데 대부분이 일주일에 사흘 이상 원격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원격근무의 편의와 효율을 위해 대량 구매한 최신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원하는 모든 직원에게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한 직원들이 사무실에 들르면 두 명의 “IT" 직원이 그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자재 창고에서 헤드셋을 꺼내 전달한다. 이들은 거의 매일 사무실 근무를 하면서 입사, 퇴사하는 사람들의 업무용 랩탑을 초기화하는 작업도 한다. 1, 2, 3년 후에도 이 두 직원의 일자리는 존재할까?
(2) 공항에서 수하물 처리 직원 두 명이 여행객들의 가방을 던지기도 하고 번쩍 들었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고의로 내리찍으며 키득거리는 장면이 CCTV에 찍혔고 이 소식이 각종 매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들을 고용한 항공사는 즉각적인 진상 조사를 약속했고 이틀 뒤 해당 직원들을 해고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좀처럼 예전의 효율과 질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항공업계에 대한 냉소적인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만 가져왔다. 철저한 감시, 무관용적인 인사 조치가 최선일까?
(3) 기업에서 직원들의 급여(payroll)와 더불어 외부 컨설턴트들이 청구하는 시간당 보수를 처리하는 업무를 맡은 한 경리 직원이 실수로 특정 컨설턴트의 은행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매주 정산하게 돼있는 보수의 지급이 3주 이상 지연됐다. 계속되는 문의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밝히는 데만 일주일 이상 소요됐다. 어떤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할까?
(4) 정형외과 수술 후 경과를 살펴보는 상담을 예약한 환자가 예약 날짜, 시간에 맞춰 클리닉을 방문했다. 그런데 접수창구의 직원 A는 확인해 봤는데 해당 환자의 예약은 돼있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환자는 이전 방문 때 다른 창구 직원 B가 다음 예약 날짜와 시간을 적어주었던 쪽지를 갖고 있었다. 환자는 분명히 예약이 돼있다고 했고 직원 A는 그런 예약은 없으며 환자 본인이 착각한 거라 주장했다. 한참의 실랑이 후 밝혀진 사실은 애초 직원 B가 환자의 다음 예약 날짜와 시간은 정했지만 정작 시스템에는 입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 같은 해프닝의 근본 원인과 개선책은 무엇일까?
(5) 대규모 과수원을 운영하는 C 씨는 3년째 오렌지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수확 시즌 인력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상시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높은 수준의 시급을 제시해도 일하러 오는 사람은 없고 어떤 이유에선지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은 더디기만 하다. 저절로 떨어져 쌓여가고 썩어가는 수많은 금빛 과일들을 보면서 한숨만 쉰다고 하소연하는 C 씨의 비즈니스는 문을 닫는 것 외에 어떤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이상은 내가 호주 시드니에서 2022년 하반기 동안 뉴스와 지인들을 통해 전해 들은 실제 사례들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글의 끝부분에 첨부하기로 하고, 먼저 본론인 책 리뷰를 시작한다.
2022년 9월, 호주 마이크로소프트의 시드니 본부에서 있었던 자동화에 관한 워크숍에 참석한 나는 강사로부터 책 몇 권을 소개받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The End of Lawyers (“변호사들의 종말“, 리처드 서스킨드 저)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의 책인데 수년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서 반가웠다. 공교롭게도 이날 워크숍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나를 포함한 절반 정도가 법무법인에 근무하고 있었다. 함께 소개된 책들 가운데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A World without Work (대니얼 서스킨드 저)였는데, 저자들의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이 둘은 부자 관계이면서 둘 다 경제학 교수라는 점이 흥미롭다.
[완독한 후 알게 되었는데 A World without Work는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사용한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는 노동과 일자리의 미래를 예측하는 책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기계, 나아가 인공지능이 발전해온 역사적 배경 지식이 첫 부분이고, 이어서 일자리 감소, 노동이 가져다주는 소득의 양극화, 불평등, 교육 체계의 한계 등 지금의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여러 문제점의 진단과 분석이 나온다. 마지막은 노동의 시대가 끝난 미래 사회에서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을까, 라는 철학적 질문에 저자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내놓는 제언(proposal)이다.
미래를 궁금해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에 대한 내 총평은 이렇다: 역사 수업과 문제 진단이라는 면에서는 탄탄한 지식과 깊은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하지만 마지막 제언 부분에 가서는 과연? 정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저자인 서스킨드 교수가 제시하는 것들을 독자 스스로가 비판적인 사고로 해석하라는 과제 내지는 도전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더불어 자연스럽게 이런 리뷰를 생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훌륭한 책이다.
책의 앞부분을 관통하는 핵심 포인트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노동의 미래”라는 것을 논할 때 “일자리”(job)와 “업무”(task)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통상적으로 보도하는 실업률 통계와 “앞으로는 이런 직업들이 사라지고 인공지능으로 대체된다”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제목의 기사들은 모두 일자리라는 단위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일자리(직업/직함)는 사실 업무라는 단위가 여럿 합쳐진 것이고 그들 업무의 구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비즈니스 환경이 바뀌면서 계속 변화하는 게 정상이다. 무언가 자동화되고 신기술이 기존의 행위를 대체한다는 것은 업무 단위의 변화이지 한 사람 또는 집단의 일자리를 통째로 한날한시에 없애는 게 아니다. 또한, 같은 업종 안에서도 특정 업무의 자동화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사업장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업무의 구성이 변하지 않는 정체된 상태에서 신기술 또는 인공지능의 도입이 특정 일자리의 모든 업무를 순차적으로 대체해 나간다면 결국 인간이 맡아 온 그 일자리는 소멸하게 된다. 어찌 됐건 관찰하는 단위를 일자리에서 업무로 바꾸는 순간, 노동의 미래는 더 이상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것이 돼버린다. 고소득자들과 저소득자들의 일자리는 어찌어찌 살아남지만 반복 작업이 많고 비교적 정형화하기 수월한 중간 소득자들의 일자리는 크게 위협받는다는 식의 일반론적 이론은 이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면 곧바로 반전이 뒤따라온다.
두 번째 핵심 포인트: 인공지능 세계에 이미 불어닥친 “실용주의 혁명”(the Pragmatist Revolution)을 이해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진화해 온 과정을 보면, 초기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목표였고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후, 기계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엄청난 양의 과거 기록과 예시를 엄청난 속도로 학습하는 방식으로 지능을 쌓아나가는 게 그다음 세대의 인공지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더해 인공지능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러니까 인간이 친절히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결과물을 생산해 내는 경지에 다다랐다. 책에는 당연히 이세돌과 알파고 그리고 그 후손인 알파고 제로에 대한 언급이 수도 없이 나온다. 이미 수년 전의 사건인데, 참고로 스포츠/레크리에이션 산업으로 분류되는 바둑에서는 현재까지도 인간 프로 기사들, 지도자들의 일자리는 없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인공지능 덕분에 양질의 연구 자료가 넘쳐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무튼 얼핏 생각하기에 인공지능의 “끝판왕”이라고 하면 모든 작업을 인간과 동일한 지능으로 수행하는, 영화에서 본 듯한 친근한 모습의 다목적, 다기능, 범용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을 떠올리기 쉽다.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는 한 가지 목적을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뽑으며 달성하도록 디자인된 좁은 의미의 단일 목적 인공지능(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 ANI)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형식의 문서 수 천 장을 순식간에 스캔해 특정 패턴의 일련번호들을 오류 없이 인식하고 추출, 저장하는 기능이다. 바둑에서 이기는 게 유일한 목적인 여러 브랜드의 바둑 인공지능, 인간이 던져주는 키워드를 이용해 작문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내는 특화된 인공지능 등 현재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의 대다수가 ANI로 분류된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어쨌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시받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어찌 보면 혁명과도 같은 사실이다. 그것의 형태가 고도로 발달한 AGI든 아니면 수많은 기계 부속과도 같은 ANI들의 조합이든 관계없이, 또 인간이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지 여부와도 관계없이 그저 스스로의 방법으로 수요가 있는 곳에 결과물을 공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산업혁명 이후로 이어져 온 인간과 기계간의 상호 보완적 관계 따위는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이 힘들어하고 하기 싫어하는 작업을 골라서 기계가 대신 수행하고, 그 결과 인간은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것에 집중하면서 인류 발전의 선순환이 생겨나는 낭만적 공생 관계, 그리고 그것을 설명해 온 학문적 이론들을 죄다 뒤엎어 버리는 현실이 바로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기술의 발전 또한 일방통행이기 때문에 기계가 담당하는 업무의 범위는 경계를 모르고 팽창하게 돼있고, 인공지능을 넘어 초지능(superintelligence)과 특이점(singularity)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도 점점 빨라진다. 이 때문에 경제 활동 전반에 인간의 입지가 점차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다시 말해, 실용주의 혁명 이후 기계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수준을 구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앞뒤 사정 봐주지 않고 실행에 옮긴다.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떤 순서로 실행될까도 예측 불허다. 레스토랑의 메뉴판이 나도 모르는 사이 테이블 위 QR코드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아냐 아냐 이런 고차원적이고 고귀한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어, 라는 외침은 소용없게 되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함이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도 남아도는 일자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같은 업무를 인간이 수행했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기계의 그것보다 (아직은) 저렴한 경우다. 따라서 기계와 저임금 노동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동반자 관계가 형성되는데, 이 또한 실용주의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We can already see that a lot of the tasks that technological progress has left for human beings to do today are the 'non-routine' ones clustered in poorly paid roles at the bottom of the labour market, bearing little resemblance to the sorts of fulfilling activities that many imagined as being untouched by automation.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e future will be any different."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덕에 <자동화>는 기계에게 맡겨두고 인간 스스로는 성취감 가득한 업무에 집중할 거라 상상했지만, 오늘날 실제로 인간이 떠맡게 된 건 노동 시장의 밑바닥, 다시 말해 정형화할 필요가 없는 저임금 노동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현실이 미래에는 다를 거라 예상할 근거는 없다.” (원문 번역)
책은 이어서 실용주의 혁명에서 파생하는 사회 현상들과 문제점들을 짚어 나간다. 경제 활동 전반에서 인간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건 한마디로 정리하면 “노동의 시대”(the Age of Labour)가 저물고 있다는 얘기다. 시간이 갈수록 기계가 인간의 업무 자체를 대체해버리는 효과가 인간이 수행하는 업무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보완 효과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새로운 “21세기형 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가 전체의 0.5 퍼센트에 불과했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잠깐, 노동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2022년 현재 대부분의 선진 경제에서 보고되는 실업률은 완전 고용 상태나 다름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반문할 수 있다. 실업률이라는 건 대표적인 후행 지표다. 다른 경제 현상들을 최소 6개월 이상 차이를 두고 따라가는 것인데, 이것도 단순히 하나의 퍼센티지를 볼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뜯어보고 고용과 관련된 뉴스를 종합적으로 쫓으며 판단해야 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웃돈을 줘가며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앞다퉈 채굴하듯 긁어갔던 최첨단 산업의 중심 빅테크 기업들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들을 사정없이 내치고 있다. 갑자기 모든 매체에서 전 세계를 집어삼킬 어마 무시한 불황, 시쳇말로 “큰 놈”이 오고 있다고 아우성치는 지금, 테크 업종이 아닌 기업들도 속속 신규 채용 계획을 철회하고 있고, 당장 2023년에는 거의 모든 사무직 화이트칼라 업종에 감원의 칼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책으로 돌아가서 - 기계가 기존의 업무 하나하나를 잠식해가는 현상(task encroachment)은 결국 사람이 담당해야 하는 일자리 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일자리라는 파이 자체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과 더불어 저자는 지금 현직에 있는 모두가 앞으로도 사이좋게 경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는 이유로 첫째, 요구되는 기술(skill)과 보유한 기술 간의 불일치 / 둘째, 정체성(identity)의 불일치 / 셋째, 거주하는 곳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달라서 생기는 공간(place) 상의 불일치를 꼽는다.
특히 공간상의 불일치라는 포인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일단, 원격 근무가 가능한 업종은 그 자체의 특성 때문에 고용주 입장에서 직원들의 거주 이전을 요구하거나 지원할 필요를 어차피 느끼지 않는다. 반면, 물리적 출퇴근이 필수인 나머지 업종들에서는 문제가 복잡하다. 시간이 갈수록 어떤 식으로든 기계가 담당하는 업무의 비중은 높아지고 비용은 낮아지는 현실에서 고용주는 굳이 과거와 같은 노력을 들여 최고로 적합한 인력을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요즘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어서 난리라고 하소연하는 업종, 특히 일부 제조업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공장 또는 농장에 공간적으로 사람이 몰리지 않는 (못하는?) 이유와 사정이 저마다 있는 것인데, 어쨌거나 이런 어려움이 극한으로 치닫는다면 최종 결과는 둘 중 하나다. 폐업하거나 아니면 인력을 대체할 기계를 도입하는 비용이 충분히 낮아질 때까지 어떻게든 “존버”한 다음, 전체 생산 프로세스의 기계화를 이루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같다.
여기에 더해, 팬데믹과 봉쇄를 겪고 난 이후의 세계에서는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 과거보다 어려워지고 그 필요 또한 점점 줄어들 거라는 게 내 예상이다. 2022년 현재 유럽연합,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속속 자국의 자원을 무기화하는, 그러니까 보유한 핵심 원자재를 이전처럼 내다 팔기보다는 이를 이용해 자국 내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강제 또는 유도하는 방향으로 법을 바꾸고 있다. 물류를 제한하는 이 같은 자원 이기주의에다 일자리의 감소를 불러온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이 더해진 현실에서 과거처럼 인적 자원 충원을 위해 대규모로 기술 이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은 (각 나라 정부의 표면적 입장이 어떻든 간에) 앞으로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팬데믹 후 엔데믹 시대가 되니 세계화라는 말도 쑥 들어갔다. 미래에는 어딘가에서 수혈해 오는 인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노동력의 부족을 채우게 되고, 그 결과 국경을 넘어 보금자리를 옮기는 이민의 문은 극소수의 특출한 개인, 소수의 특수 업종, 그리고 특권층에게만 열릴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가져 본다.
거주하는 곳과 일자리가 있는 곳이 맞지 않아 생기는 공간상의 불일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래에는 국가 간의 이동뿐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의 이동, 나아가 거주 이전도 제한될 수 있다. 책에는 없는 2022년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의 얘기다. 세계 여러 곳에서 추진되고 있는 스마트 시티 사업들 가운데 영국 옥스퍼드와 호주 멜번에서는 친환경적인 방법, 즉, 도보 또는 자전거로 15-20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경계 안에서 시민들이 각자의 일상생활을 누리게 한다는 계획이 있다. 특히 옥스퍼드는 시민들이 자신의 거주 구역을 자동차를 이용해 벗어나는 행위가 1년에 100회를 넘으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방침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스마트 시티인 만큼 카메라로 차량의 번호를 인식하며 통제한다는 얘기인데, 단기적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미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에서는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라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한 지역에서 생산하는 자원을 모두 현지에서 소비, 폐기, 재생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는 것으로, 이 또한 탄소 배출 억제 등 환경적인 이유를 들어 물류와 인적 자원의 이동을 제한하려는 그림으로 보인다.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가 다루는 또 다른 문제는 인적 자본과 전통적 자본 간의 격차, 그리고 이로 인한 불평등과 양극화다. 책에서는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 경험, 기술의 총합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자본(traditional capital)은 금융 자산, 부동산, 법인에 귀속된 지적재산권, 영향력 등이다. 과거에는 전통적 자본 없이도 스스로의 인적 자본만을 의지해 취업과 경제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 이후에는 대체로 불가능한 얘기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반면, 전통적 자본이 가져다주는 수익은 인적 자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결과적으로, 현재 갖고 있는 인적 자본으로는 더 이상 소득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재교육을 받을 의사나 능력 또한 없어서 인적 자원으로의 기능을 영구적으로 상실하는 개인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A world with less work, then, will be a deeply divided one: some people will own vast amounts of valuable traditional capital, but others will find themselves with virtually no capital of either kind."
“노동이 줄어든 미래의 모습은 극심한 양극화다. 일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통적 자본을 축적해 그 가치를 늘려가겠지만 다른 한쪽은 전통적 자본, 인적 자본 모두 실질적으로 거덜 난 상태다.” (원문 번역)
불평등, 양극화 - 미래에는 해소할 수 있을까? 아니 인류가 진보하려면 반드시 해소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불평등과 양극화의 본질은 “격차”인데, 이 격차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해 온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 아니라, 기술 발전과 시장경제의 원동력이 바로 격차를 만들고 또 극복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격차가 없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은 그 원래의 목표 대신 하향평준화와 그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계급을 만들어 낼 뿐이라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과 양극화의 시스템 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 발전하려는 의지를 품은 개인에게 도전의 기회가 주어지는가 아닌가인데, 책의 저자는 이마저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어찌 됐건 미래가 지금보다 평등한 사회일 거라는 생각은 장밋빛 환상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불평등과 양극화는 이미 손 쓸 수 없게 커져 버린 지 오래다. 노동의 미래는 지름 10킬로미터짜리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지는 것처럼 한날한시 모두에게 들이닥치는 충격이 아니라 지역, 산업, 사업장별로 시차를 두고 야금야금 잠식해 오는 거라고 서스킨드 교수는 분명히 일러둔다. 잘 알겠다. 하지만 선진 경제의 학자가 예상하는 - 그리고 뒤에서 다루겠지만 강력하고 거대한 정부가 주도해 나가야 하는 - 이 “노동의 미래”라는 것이 과연 스리랑카, 레바논, 파키스탄, 캄보디아, 벨리즈, 몰디브, 잠비아, 페루, 이집트, 튀니지, 라오스, 베네수엘라, 튀르키예, 에콰도르, 우간다,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수리남, 케냐,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등 나라 살림이 거덜 난 곳(failed state)에서 작동할지, 정말 이들 나라에서도 단순히 시차를 두고 똑같은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양극화의 함정이라 할 만한 건 또 있다. 지구 전체의 인구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에만 절망적인 인구 절벽이 닥쳐서 나라가 수 십 년 안에 소멸할 운명이라는 뉴스는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공포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 인구의 총합이 우상향 커브를 그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저개발 국가에서 아직까지도 평균 5, 6, 7을 넘나드는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진 경제라 불리는 나라들에 초점을 맞추면 이와는 정반대로 하나같이 인구 유지에 필요한 출산율을 크게 밑돌고 있다. 한마디로 “도긴개긴”이고, 사실상 어디서 무슨 정책을 시도하든 간에 미래에는 어차피 같이 움직이는 운명공동체라는 얘기다. 그나마 한국은 인구 절벽의 시작점이 5천만인데, 출산율이 1.0대 초반으로 내려앉은 다른 OECD 국가들은 현재 인구가 백만 단위인 곳이 태반이라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아무튼 노동이 줄어드는 현실에 발맞춰 인구도 줄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일까, 자연 현상일까, 아니면 누군가 설계한 큰 그림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책에서 다음으로 짚고 가는 문제는 “교육 체계의 한계”(limits of education)다. 산업혁명부터 초기 인공지능 시대까지 기계의 발전에 보조를 맞춰 인간이 할 수 있었고 마땅히 해야 했던 건 교육, 특히 고등교육(higher education)이다. 저자는 고등교육과정을 끝도 없이 고도화, 전문화하는 방법으로 기계에 앞서 나가려는 전통적 해법은 벌써 한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길어야 인생 초반 십수 년간 유아-초등-중고등-대학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남은 생 내내 우려먹는, 그러는 와중에 이미 승부가 나버린 기계와의 경쟁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 기존의 교육 모델이다. 당연히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 시대엔 맞지 않다. 미래에는 최고학부까지 한 번의 일방통행, 하나의 간판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와 의지에 따라 학생 신분으로의 재진입, 재교육, 재검증이 평생 동안 언제든 몇 번이든 이뤄져야만 가치 있고 경쟁력 있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가방끈이 긴 사람들은 발끈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가 OOO 학위를 따는 데 들였던 시간, 금전적 비용, 기회비용, 땀을 생각하면 투자한 걸 회수하기에도 바쁜데 그런 수고로움을 처음부터 몇 번이고 되풀이하라는 건가 인생 수백 년 사는 것도 아니면서, 라는 외침이다. 그렇지만 교사, 교수 등 연구와 교육 자체가 업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학교”라는 간판은 사회에서의 첫 직장이라는 문턱을 넘기 위한 일시적 도구일 뿐이라고 일반화해도 솔직히 무리가 없다. 일단 현업이라고 하는 경기장에 입장한 다음에는 실력과 실적으로 승부할 뿐, 학위 또는 출신 학교가 뭔가를 좌우할 여지는 1도 없다. 내가 어느 학교에서 뭘 공부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커리어를 시작하는 데 있어 대학 졸업장 자체가 필요 없는 업종이 태반이다.
결정적으로, 학교라고 하는 교육기관(institution)은 가뜩이나 일자리가 감소하는 미래에 살아남을 만한 인재를 생산해 내기에는 너무나 비대하고 느리고 소모적이고 관료주의적이다. 따라서 평생 동안 재교육, 직업 변경, 취업 준비, 재취업이 당연시되는 노동의 미래에서는 저렴하고 진입 장벽이 낮고 트렌드에 빠르게 대응하고 긴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 형태의 교육이 대세가 되는 건 당연하다. 대표적인 예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커뮤니티 수업, 현업에서 요구하는 좁은 범위의 특정 기술을 최단시간에 전수하는 부트캠프식 교육, 그리고 비대면 온라인 플랫폼이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가장 빨리 업데이트되는 커리큘럼을 그것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교육기관은 유튜브다. 어떤 특정한 주제의 심화 과정이나 실무에 당장 필요한 기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고품질의 강의는 Coursera, edX, LinkedIn Learning, Udemy 등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에 널려 있다.
바꿔 말하면, 간판(status) 역할의 교육은 앞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다. 차별화와 학생 유치에 실패한 수많은 종합대학교와 전문대학교가 문을 닫거나 통폐합될 운명이다. 살아남으려면 아카데미아라고 하는 담장 안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문턱을 낮추고, 온라인 플랫폼을 위협이 아닌 제휴와 협업의 대상으로 보는 전향적인 마인드가 있어야 하겠다. 물론 의학, 법학 등 면허제로 운영되는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느리고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노동의 미래에서 펼쳐지는 고용 수요와 공급의 현실이 닥치면 “라이선스”라는 것은 점점 세분화되고 대학 졸업장과도 분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저자의 본업이 교육이기 때문일까 - 책에는 교육이라는 주제 안에서 급진적으로 비칠 수 있는 주장이나 제안은 없다. 대신 무난하고 말랑말랑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먼저, 미래의 교육은 능력 있는 일꾼 양성을 넘어서 훌륭한 인성(outstanding character)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낼 책임이 있다. 또, 앞서 말했듯 경제 활동에서는 개인이 보유한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역할이 쪼그라든다 하더라도 교육이라는 채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자본을 두루 공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의 학교는 지식, 숙달, 효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학생들에게 가치(virtue) 중심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다음 네 가지다: 도덕성 moral (정직, 친절) / 시민의식 civic (지역공동체에 기여함) / 지성 intellectual (호기심, 창의성) / 실행력 performance (부지런함, 인내심). 줄이면 “인간다움의 극대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 지금부터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의 결론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세상은 사실 “유급” 일자리가 줄어드는 세상(a world with less paid work)을 말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기계가 담당하는 영역의 팽창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기계가 결과물을 생산하는 건 작동이지 노동이 아니다. 인간이 해오던 업무를 기계가 하나하나 잠식해 나가면 경제적으로 유효한 노동은 줄어들게 된다. 여기서 유효하다 함은, 기계가 실행하는 그것보다 아직까지는 저렴하거나 우월한 결과물을 내는 것을 말한다. 노동의 감소는 당연히 일자리의 감소로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게 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실용주의 혁명으로 촉발된 이 현상은 과거의 불황형 실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자리는 줄었지만 경제의 총생산은 줄지 않고 오히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와 비례해 늘기 때문이다. 대량 실직이 생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경제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래에도 인적 자원으로써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자리를 통해 계속 소득을 올리겠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로 간주된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노동의 미래에는 원하는 사람 누구나 다시 취직할 수 있다. 단지 그 일자리가 소득의 원천이 아닐 뿐.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는 직업이 주는 보람, 사명감, 소명의식, 공동체 의식을 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희망했던 또는 관심 있는 분야로 언제든지 재교육, 재취업이 가능하다. 비유하자면 2022년 현재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에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직장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을 생각하면 된다. 노동의 미래에는 거의 모두가 그런 모습이 된다는 얘기다.
"For most of us, work is the new opium."
“이제 우리에게 일자리라는 것은 아편과도 같다.” (원문 번역)
책에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강력한 권한과 법 집행력을 가진 거대한 정부(Big State)가 원천 인공지능 기술을 보유한 빅테크 기업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기술 발전을 조율, 관리하는 체계로 갈 것을 제안한다. 이와 더불어 기본소득을 도입해 실직자들과 무급 근로자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청사진이 사회주의의 본질과 닮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정부가 기업을 완전히 통제(control)하는 것이 아닌 지분 취득(partial ownership)이라는 수단으로 협조를 이끌어낸다는 점, 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급하는 포괄적 기본소득이 아닌 조건부 기본소득(conditional basic income)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주장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공유주의(capital-sharing) 체제라는 설명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기-승-전-기본소득 구도로 단순화해 넘기기에는 뭔가 잔상과도 같은 여운이 남는다. 왜일까. 이유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이미 다 연습해 봤기 때문이다. 팬데믹 당시 출근을 하지 못하거나 실직한 사람들에게 지급된 각종 생활 보조금, 계획에 없던 쉬어 본 경험, 위치 추적 기술의 일상화, 방역이라는 이름의 통제와 봉쇄, 여러 단계로 적용됐던 이동의 제한, 최신 기술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온갖 앱과 서비스에 망설임 없이 제공한 개인 정보, 그리고 익숙해진 원격 근무와 온라인 수업 덕분에 사람들은 “순한 맛” 노동의 미래를 벌써 체득해 알고 있다. 마치 단체로 백신을 맞은 것처럼 말이다. 놀라운 것은,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원문이 분명 팬데믹 이전에 출간됐다는 사실인데 이쯤 되면 이론의 검증은 끝났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책의 결론에 나는 여전히 갸우뚱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이 단지 “쉬어도 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쉬거나 소득과 연결되지 않는 일을 하는 모습이 솔직히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도 기본소득이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면 각 사람의 소득 수준, 다시 말해 그의 생활이 얼마나 윤택하거나 궁핍할지는 누가 결정하는지 궁금하다. 팬데믹 당시 나온 정부 보조금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그 액수를 정했었던가? 게다가 “조건부” 기본소득이라 함은 경우에 따라 아예 주지 않거나 차등을 둔다는 얘기인데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받을, 또는 더 받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는 지역공동체에 봉사 또는 기여하는 정도를 가늠해 결정할 수 있다는 예를 드는데, 아무튼 그러한 조건 자체가 소득을 위한 노동이 된다면 노동의 미래가 애초에 제시했던 유급 노동의 실질적 종말은 어떻게 되는 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통적 의미의 경제 활동에서 배제된 채 생산 없이 평생 소비만 한다면 결국에는 경제 주체로써의 역할을 상실한 “잉여” 인구(residual population)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물론 이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기계의 눈으로 봤을 때는 일자리가 아닌 소일거리일 뿐이다. 실제로 필요한 생산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박성웅 배우가 내뱉은 명대사 “살려는 드릴게”가 떠오른다면 지나친 디스토피아적 해석일까.
지금 2022년은 그림, 인물사진, 작문, 대화(챗봇) 등 새로운 인공지능 기반 서비스가 하나씩 공개될 때마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재미 삼아 시도해 보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학습 데이터가 쌓이고 서비스의 정확도와 “인간스러움”은 빠르게 향상된다. 그렇게 고도화된 인공지능이 어떤 모습과 목적으로 다시 활약할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인공지능을 만든 인공지능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결과물이 사람의 것인지 인공지능의 작품인지 구분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날이 정말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1년 후가 될지,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아주 가까운 미래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십수 년을 공부해 마침내 학위를 따고 지금 막 사회에 야심 차게 발을 내딛으려는 MZ세대 인간 청년은 자기 분야에서 존재감을 새길 사이도 없이 사람인지 인공지능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 경쟁자들에게 압도당해버린 채 바늘구멍 같은 구직의 관문을 뚫지 못하고 성냥갑 만한 공공주택 원룸 렌트비보다 조금 더 나오는 기본소득을 받아가며 하루 종일 인공지능이 제작한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인공지능이 쓴 웹소설을 읽고 인공지능 게스트들이 출연하는 예능을 시청하면서 낄낄거리고 인공지능이 작곡한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끼니때마다 본인의 현재 기본소득 잔액과 실시간으로 보고되는 영양 상태를 인공지능이 분석해 일방적으로 선정한 메뉴의 도시락을 배달 로봇이 문 앞에 갖다 놓자마자 흡입하는 일과를 되풀이하며 연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소설 “1984”에 나오는 프롤 계급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데?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결국 “인간다움의 극대화”다. 인공지능이 초당 오억 번씩 연습하는 인간스러움(being human-like)이 아닌 인간다움(being human) 말이다. 이 말은 위에서 서스킨드 교수가 내건 “가치 중심 교육”을 설명할 때도 나왔다. 도덕성, 시민의식, 지성, 실행력, 다 좋고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인간이 갖고 있는 최후의 필살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요 창출”이다. 한마디로 기계가 (인공)지능적으로 떠먹여 주는 걸 거부하고 내가 진정으로 소비하고 싶은 것을 똑 부러지게 표현, 요구하면서 미래를 주도해나가는 거다. 이것을 “기획”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어로는 generation of demand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어차피 경제학 책 리뷰로 시작한 거니까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언제나 수요와 공급,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다 아는 얘기다.
수요 > 생산 > 공급 > 소비
인간이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였던 게 과거의 경제였고, 오직 인간이 편하려고 기계에게 생산을 맡긴 결과가 지금의 인공지능인 것이다. 하지만 수요와 소비는 항상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이 갤러리에 미술전을 관람하러 가는 일은 없다. 보고 싶은 작품들(수요)을 감상(소비)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다. A라는 장소에서 B까지 이동하고 싶은 소비자는 언제나 인간이고, 인공지능은 생산자로서 운전이라는 서비스를 공급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인공지능과 마찰을 빚고 인공지능을 위협으로 인식했던 이유는 어리석게도 생산자의 역할을 놓고 누가 우월한 결과물을 공급하는가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생산자의 역할을 맘 편히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그 대신 소비자로서 무엇을 요구할 건가, 다시 말해 끝없는 수요 창출에 집중하면 된다.
수요 창출이 중요한 건 왜일까. 확인되지 않은 채 물음표로 남아있거나 부정확하게 전달됐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그대로인 수요(주문, 요구)는 소비자에게 최대 만족을 주는 최상 품질의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조, 서비스, 컨설팅 모두 해당된다. 무능한 소비자는 생산자가 떠먹여 주는 결과물에 의문과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제공된 스탠더드에 스스로를 맞춘다. 깨어있는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똑 부러지게 요구하고 생산자의 결과물이 그 요구사항들을 만족시키는가를 데이터와 논리에 근거해 판단한다. 가장 똑똑한 소비자는 여기에 더해 전에는 없던 새로운 수요를 만들거나 발견하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함량 미달의 생산자를 갈아치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인간다움의 극대화라는 것을 바꿔 말하면 인간 고유의 역할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다. 노동의 미래에서 핵심은 똑똑하고 만족스러운 소비를 가져다주는 수요 창출이다. 이걸 할 줄 아는 개인은 미래에도 경제 활동의 주체로 남아 스스로의 소득을 책임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앞서 소개한 MZ세대 청년의 모습처럼 기계가 서포트하는 잉여 인간으로 남게 된다. (한편, 기계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인구가 줄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 빨간 약? 파란 약?
그러나 - 사람들이 막상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 그리고 그걸 논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과거에도 어려웠고 현재에도 어렵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점심으로 뭘 먹을지, 썸녀와의 데이트 장소는 어디가 최선일지를 두고도 결정 장애가 오는데 말이다. 사고력, 관찰력, 이해력, 표현력, 상상력,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접근법, 직관, 그리고 스스로가 찾은 판단 근거를 갖고 과거와 미래를 보는 분석력 같은 것들을 학교에서 길러 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왕도도 지름길도 없다. 데이터 애널리스트 되려면 OOOO 배워야 하나요? 와 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 스스로 답을 찾고 행동에 옮기는 인간이 많아질수록 인공지능은 피곤해진다. 결론적으로, 나중에 인공지능이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너 뭔데?라고 물었을 때 나 이런 인간이요, 하며 보여줄 게 있는 이들은 모두 빨간 약을 삼켰던 거다.
[일러두기] 이상은 번역봇(bot), 독후감봇, 사상주입봇이 하나로 합쳐져 곧 정식 서비스를 앞두고 있는 최신 인공지능 <바닐라 프로 맥스>가 책 이름과 다섯 개의 편집 지침 키워드를 입력받아 생산한 글입니다.
농담이다.
아직까지는.
끝으로, 처음에 나열했던 예시들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본다.
(1) 헤드셋 나눠주는 IT 직원들: 헤드셋을 다 나눠주고 나면 당연히 없어지는 업무다. 사실 이들 직원의 주된 업무는 랩탑의 초기화다. 하지만 분실, 도난의 위험이 있고 구입한 지 3-4년 만에 폐기물로 전락하는 사무용 랩탑은 머지않아 사라지게 돼있다. 공용, 개인용, 사무용 하드웨어를 가리지 않고 업무에 필요한 앱과 데이터를 순수하게 온라인 서비스로 제공하거나 가상 머신 안에서 다루는 기술은 이미 도입이 가능하게 된 지 오래다. 사무 환경 초기화라는 작업도 랩탑이 아닌 가상공간 안에서의 설정으로 바뀌게 된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IT 직원들의 머릿수는 줄어든다. 이들이야말로 사무실에 나와서 근무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딱 걸린 공항 수하물 처리 직원들: 수화물의 흐름을 모니터 하는 목적과 함께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상시 녹화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시킨다. 그 사이 수화물 처리 로봇의 도입을 서두른다. 당연히 항공사의 입장에서는 인간 직원들에게 나가는 시급이 로봇보다 당장은 싸게 먹히겠지만 선제적 투자를 하고 그렇게 구축된 시스템을 다른 업체와 업종에도 보급하면서 비용을 회수하는 안목이 경영진에게 있다면 회사의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한 경리 직원: 잘못 입력된 계좌번호를 자동 검증하지 않고 지급 단계까지 가도록 내버려 둔 것도 모자라 분쟁 중이거나 다른 외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는 결과를 낳고, 또 이를 자체적으로 발견해 바로잡지 않았을뿐더러 원인 규명에 일주일 이상 걸렸다는 것은 회사가 도입한 회계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이자 직무 태만이다. 사람 손을 거치는 프로세스를 없애거나 간소화하거나 자동화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4) 환자의 예약을 확인하지 못하는 클리닉 창구 직원: 다음 예약을 시스템에 입력하는 프로세스를 시작은 했으나 완료하지 않은 직원 B의 잘못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키오스크(kiosk) 기반으로 환자 스스로가 다음 예약 날짜와 시간을 정하게 하고 시스템에 입력된 내용을 그 자리에서 종이, 문자, 이메일 등 가능한 모든 채널로 확인하게 하는 세팅을 갖추는 것이 오류와 시간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체크인 절차도 키오스크 기반으로 바꿔서 두 번째 방문부터는 창구 직원의 필요를 최소화한다.
(5) 수확을 하지 못해 애가 타는 과수원 경영자: 본문에 썼듯이 두 선택지가 있다. 폐업하거나 수지 타산이 맞을 때까지 버틴 후 수확 로봇을 도입하거나. 중장기적으로는 임시 취업 비자와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수요도 감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