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ton Museum of Fine Arts
장해림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로도 분류되는 보스턴뮤지엄(Museum of Fine Arts, MFA)은 1876년 개관 이후 미국에서 처음 아시아관을 만들었을 정도로 수준높은 동양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 중 한국 소장품은 대영박물관, 메트로폴리탄뮤지엄보다 낫다는 평이 있으며 고려청자, 나전칠기, 불화의 수준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곳에 케케묵은 고미술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 가지수는 적지만 꽤 알찬 컨템포러리 컬렉션 또한 소장 및 전시 중이다.
아시아의 메가시티들 사이에서, 기획전으로 만난 한국 컨템포러리 아트
2016년, 바야흐로 코로나가 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았을 때. 본디 동양컬렉션으로 유명했던 보스턴미술관은 떠오르는 아시아 작가들을 모아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름하야 아시아의 메가시티들(Megacities Asia). 4월부터 7월까지 석 달간 서울, 베이징, 상하이, 뭄바이, 델리를 거점으로 활동중인 작가들을 초청하는 전시였으며 BBC, 월스트리트 저널 등 유수 언론들 또한 주목했다. 주 전시 대상은 거대 설치 조형물 위주의 작품들이었다. 약 4년의 조사를 걸쳐 치밀하게 기획된, 가히 MFA 설립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동시대미술 전시라고 하겠다. 나의 사수이자 동남아/ 남아시아 미술 큐레이터인 로라 와인스타인(Laura Weinstein), 그리고 알 마이너(Al Miner)가 직접 해당 도시를 방문하고 아이웨이웨이(Ai Weiwei)를 포함한 총 11명의 굵직한 아시아 작가들을 발굴하여 초청했다. 당시 초대된 한국 작가는 최정화(b. 1961~), 한석현(b. 1975~), 그리고 전용석(플라잉시티, b. 1968~). 이들 셋이 묘사한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
기획자였던 로라 와인스타인은 전시오프닝에서 언급하길 최정화의 작품세계는 ‘메가시티’의 주제로 기획하는 모티프가 되었다고 했다. 거대조형물 속에 보이는 누적, 중첩은 그 자체로 도시를 상징한다. 메가시티란 본디 인구 천만의 도시를 의미하는데, 해당 전시에서 언급된 도시는 아시아의 급성장한 도시로 불과 반세기만에 화려한 마천루를 쌓아올린 곳들이다. 정도야 다르겠지만 으레 급성장한 곳이 그렇듯 낙후된 지역이 존재하고,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 또는 판자촌 속에서 천만명이 와글와글, 아득바득, 우악스럽게 뭉쳐서 유기적으로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 집, 도시가 중첩되어 어지러이 삶을 형성하는 아시아의 대도시 5곳. 전시 작품들 또한 (주로 버려진) 물체를 켜켜이 쌓아 중첩의 내러티브를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정화 작가의 Fruit Tree는 보스턴 다운타운의 퀸시마켓 한가운데 설치되기도 했다. Fruit Tree가 무엇인지 갸우뚱한다면, 코엑스 9호선 봉은사역 방향에 설치된 과일나무 작품을 생각하시면 된다. 알록달록한 과일나무가 보스턴 시내 한복판을 채우고, 이 사진을 찍어가면 MFA 입장료가 무료일 정도로 최정화는 일견 당시 전시의 스타였다고. MFA 정문에는 최 작가의 <숨쉬는 꽃(Breathing Flower)> 가 설치되었는데, 강렬한 붉은색,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꽃잎이 주는 생명력에 관객들은 도취되었다.
한석현(b. 1975~) 작 <슈퍼 내츄럴(Super Natural)>은 바닥부터 갤러리 벽면, 심지어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이 쌓인 초록색 소비재들의 집합이다. 소비재라 하면 낯설겠지만, 연두색 빗자루에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박스, 비닐봉투, 칠성 사이다, 초록매실, 쿠크다스 기본맛, 깡소주 병.. 친근한 한국의 일상 오브제가 한 데 모여 거대한 녹지를 이루었다. 보스턴 시민들에게서도 초록색 오브제를 기부받기도 했는데, 두 도시의 소비재 차이를 비교해보는 즐거움도 쏠쏠했을 것으로 보인다. 바닥을 다닥다닥 채우고 있는 막걸리 병을 보면 “참 많기도 하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한석현은 바로 이렇게 대량생산한 제품들을 긁어모아 환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기업체가 초록색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쳐보이고, 친환경적일 것 같은 착각을 소비자에게 부여하는 이 색상은 거짓된 패키징을 통해 도시의 ‘슈퍼마켓’에서 소비자를 현혹시킨다. 또 천장까지 징그럽게 매달려 있는 초록색 과자봉지와 수세미 묶음을 보면 현혹을 먹고자란 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가 초자연적인(슈퍼내츄럴한) 힘을 갖게 된 괴물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6년이 지난 지금, 한석현은 현재도 주로 자연, 조경, 폐목재 물질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플라잉시티 소속의 전용석(b. 1968)은 ‘고철’에 주목했다. 2001년 9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 사업에 따라 결성된 플라잉시티 크루는 현대도시문화와 도시지리적 현실문제에 주목해 “도시주의”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 급격한 성장을 하는 도시는 철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도시는 철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철은 고철이 되며, 철골구조를 떠올리게 하는 고철 덩어리는 디스토피아의 상징일 수 밖에. 전용석의 키네틱 조형물은 바로 이렇게 과도한 생산(Mass production)이 도시에서 생장하고 쓰레기로 변모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전 작가는 또 MFA에서 “포스트-휴먼, 도시의 삶과 창의성(Post-Human Urban Living and Creativity)”이라는 주제로 현 아칸소 CACHE NWA 큐레이터 루카스 코웬(Lucas Cowen)과 대담을 나눈 바 있다. 이들은 25년에 걸쳐 지난 2007년 완성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인 ‘빅딕(Big Dig)’과 이를 참고로 하여 진행된 한국의 청계천 복구 프로젝트를 비교하며 공공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의견을 보스턴 시민들과 나누었다.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버내큘러 오브제(Vernacular Object)를 통해 도시와 도시 속 인구의 흔적을 거대 설치미술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로써 약 700만의 매사추세츠 주 인구로 하여금 이국적이고도 현실적인 시각적 충격을 주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이미 한국에서는 공공미술의 실천, 도시환경, 지역에 관한 담론이 휩쓸고 지나간 뒤라 한국에서 진행했다면 시시하고 진부하다고도 볼 수도 있고, 상기된 타국의 도시들과 같은 카테고리로 묶기에 인구 말고는 선뜻 공통점을 찾기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뮤지엄에서 한국실이나 중국실이 아닌 특별기획전으로 아시아 정예작가들의 설치미술을 선보였다는 것은 아시아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벌써 뭐라도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유물 출장도 활발해지고, VIP 투어도 증가하는 것을 보니 (오늘도 중국 외교부 시찰단이 다녀갔다.) 곧 한국에도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싶다.
상설전에서 볼 수 있는 보스턴미술관 소장 컨템포러리 컬렉션
그렇다면 상설전에 내놓는 컨템포러리 컬렉션은 어떨까?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영국박물관 출신의 큐레이터 제인포탈(Jane Portal)이 헤드체어로 재직하며 한국 전근대 유물부터 현대미술품 컬렉션이 크게 재정비되었다. 포탈은 뉴욕 등지의 한국미술 딜러들, 작가들, 소장가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한국 수장고를 넉넉히 채워두었고, 2012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후원으로 한국관이 재개장하면서 한국 컨템포러리 작품 또한 미국 동부의 관람객들에게 노출되는 기회를 얻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국미술의 정수는 고려청자, 그리고 (고려) 불화로 여겨졌는데, 그로 인해 당시 형성된 보스턴미술관의 한국실 컬렉션 또한 그 두 맥락과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현대미술 컬렉션 또한 도자기류와 회화류로 나뉜다. 특히 유서깊은 청자 컬렉션의 미감을 반영하듯 도자기 작품이 많은데, 이수경(b. 1963~)의 <번역된 도자기(Translated Vase, 2011)>가 대표적이다. 도자기에 금이 갔을 때 이를 접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드러나지 않게 붙여 수리하는 방법과, 옻으로 메우고 금(金)으로 붙여 접합 선이 티나게 붙여 수리하는 방법이다. 후자는 일본의 방식으로 ‘킨츠키( きんつぎ)’라고 하는데 이수경에 따르면 킨츠키 방식은 본인 작업을 시작한 이후에 알게된 것이고, 시작할 당시에는 금 간 곳에 금(金)을 붙인다는 언어유희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이수경의 작품에서 몇 걸음 떼면 이 킨츠키 식으로 수리된 고려 청자가 실제로 있어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청자 파편을 에폭시와 금으로 접합했고, 66 x 64 x 97cm 사이즈로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 김익영(b. 1935~) <백자(White Dish)>는 이수경의 화려한 청자 옆에서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백자의 미감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그녀의 작품은 매끄러운 표면에 각진 귀를 달아 독특하고도 우아하게 ‘조용한 화려함’을 자아내고 있다.
하버드대 한국학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부인이자 하버드 옌칭도서관 사서였던 김남희 여사는 2010년, 도예가 조정현(b. 1940~)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작품 두 점과 본인이 직접 도예가로서 빚은 분청 매병 한 점을 보스턴미술관에 기증했다. 그 중 조정현 작가의 옹기는 투박하고도 삼국시대, 특히 신라-가야의 굽다리 접시를 연상케 하는데, 붉은 색 고대 토기 - 백자 - 금칠을 한 청자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색의 대비를 자아내는 동시에 토기에서 도기로, 청자로, 백자로 발전한 인류기술의 진보를 목도하게 된다.
이외에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낸 신상호(b. 1947~)의 분청사기그릇(1990년 작)과 매병(1992년 작), 재독도예가 이영재, 홍대 교수를 지낸 도예가 이인진의 도자기도 소장돼 있다. 이영재는 2012년 보스턴 뉴버리 스트리트에 소재한 Pucker Gallery를 통해 처음 보스턴에서 전시를 시작했으며 지난 2월에도 전시를 개최한 바 있는데 아마 이것이 작품의 소장경위가 아닌가 한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담은 이영재의 도자기는 ‘쓰임’을 강조하며, 조선 도자기를 중국, 일본 자기와 비교대조했을 때 그 장점은 쓰임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가하면 회화로는 강익중의 <해피붓다>도 있다. 삼라만상을 즐기듯 가운데에 그려진 부처의 모습이 익살스러운데, 보스턴박 소장의 기타 고려-조선 불화와 비교하며 불화의 전통이 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관람객이 고민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뉴욕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 강익중은 본인의 작품이 2012년 11월 재개관 전시 때 내걸리자 직접 보스턴에 방문하여 현지 한인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가운데 부처의 그림을 중심으로 만다라처럼 총 84개의 작은 부처를 배치하고 색색별로 묘사한 것은 마치 백남준의 비디오 화면 픽셀을 연상케 한다. 강익중이 스승처럼 모셨던 백남준과 그의 친분은 익히 알려져 있다.
또 주목할만한 것은 1970년에 판화가 황규백(b. 1932~)으로부터 직접 구입한 20호 가량 크기의 음각 목판화다. 제목은 <Escorte De La Voi Lactéé>로 대략 ‘은하수의 호위’ 정도로 해석되는데, 우주공간처럼 까만 바탕에 파랑, 초록, 보라, 분홍빛의 파스텔 칠을 해 은하수를 나타낸 초기작이다. 노르스름한 연두빛과 파란색의 조화가 눈에 띄는 이 작품은 검은 바탕이 일반적이던 구미권의 판화기법 유행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본인만의 맑은 회색 바탕의 메조틴트 기법을 구현해내기 직전의 것으로 보인다. 좌측 하단에 E.A.(Epreuve d’Artiste, 불어로 Artist Proof 라는 뜻), 중앙에는 제목, 우측에는 서명 K.B. Hwang이 친필로 적혀 있다.
놀라운 것은 작품의 구입시기이다. 1970년 12월 16일 구입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가 뉴욕으로 건너간 지 고작 5개월이 지난 후였다. 유럽-미술의 판화 전성기가 막 시작되던 60년대 말, 그는 파리의 판화공방 ‘아틀리에 17’에서 작업에 매진하던 중 미국의 거물 화상(畵商) 휴 맥케이(Hugh Clifford Mackay)의 스카웃에 의해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당시는 이미 김환기, 백남준 등이 막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기지만 한국의 지명조차 명확하지 않던 때다. 도미한 지 5개월도 채 안된 작가의 판화를 - 심지어 판화가 원화에 비해 그렇게 뒤쳐지지 않던 시기에 - 눈여겨보고 구매했던 뒷배경이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평가 및 제언 -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외에도 갈물 이철경(b. 1914~1989)의 친필 한글 서예 등의 귀한 작품들이 더 있지만 이쯤에서 그만 늘어놓겠다. 소장된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바로 미국에 기반을 둔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 구입 또는 기증 경로는 단순히 미국화랑이나 작가와의 직접 교류 외에도 여러 개다. 이것은 한국미술계에 미국 네트워크가 깊게 포진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네트워크가 없는 구주권 또는 한국의 작가들은 미주 뮤지엄의 주목을 받을 기회가 적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작품 구입시기가 상대적으로 특정 시기에 몰려 있다. 2008년부터 2014년 사이에 소장한 작품은 대부분 당시 한국미술을 전공했던 였던 제인포탈(Jane Portal, 현 대영박물관 큐레이터)에 의한 것. 한국국제교류재단 덕분에 꾸준히 펠로우 인턴이 공급되고, 제인포탈 직후에는 한국 스페셜리스트 연구원이 재직하기도 했으나 그 이후에는 정규직 한국미술 큐레이터가 존재하지 않다보니 구입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펠로우 등 하급 인력으로 유물을 관리할 정도는 충당하고 있으나 갤러리, 딜러, 작가와의 커넥션을 장기적으로 만들고 작품 구입까지 투자할 수 있는 인력은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이 힘든 상황이다. 대다수의 영미권 뮤지엄의 실태가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실제로 필자가 아시아 위크 당시 뉴욕 아트씬에서 연속적으로 들었던 푸념이다.
아무리 강익중, 이수경 등 내로라하는 작가진을 포진시키고 있다해도, 향후 수준높은 컬렉션을 위해서는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박물관 측에서도 갤러리와의 접촉면을 늘려야 할 것이지만, 갤러리 또한 한국미술 큐레이터가 해당 뮤지엄에 없더라도 꾸준히 담당자 또는 한국미술을 포괄하여 관리할만한 헤드체어, 동남아 미술 스페셜리스트 등과 커넥션 유지하고 한국미술의 성장, 그리고 투자 필요성을 제기하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미국과 네트워크 기반이 없는 한국 신진, 중견 작가들을 발굴하여 꾸준히 재미 갤러리 및 뮤지엄에 선보이고 한국미술 스페셜리스트 자리 보전의 필요성을 역설해야 할 것이다.
2020년대 한국은 소프트파워의 힘을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김치와 부채춤으로 상징되는 전통문화만을 들이미는 것도 문제지만, 언제까지나 방탄소년단만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와 현재를 함께 보여주어야 미래도 상상할 수 있는 법. 한국 현지의 컨템포러리를 해외에 전달할 수 있는 매개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