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먼프릭 Aug 12. 2022

텅 빈 눈동자

죽어가는 이와 살아가는 이의 눈동자는 닮은 구석이 있다.



오후 6시 49분 OOO님
사망하셨습니다. 

의사의 한 마디에 조금 전만 해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소란스러웠던 상황과 대비되는 정적이 맴돌았다. 죽어가는 사람은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특유의 눈동자가 있다. 동공은 풀리고 초점이 맞지 않는 텅 빈 눈동자. 깜빡이지도 않는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소리쳐 부르고 꼬집고 때려도 반응이 없다.


오후 5시 49분

 

환자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병동이라 함께 격리되었던 아들이 놀라서 간호사를 불렀다. 30분 전만 해도 변비는 괜찮아졌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안부 인사 나눈 사이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색전이 심장이나 뇌, 폐혈관을 막은 것일까. 갑자기 장기에서 출혈이 생긴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기저질환도 없이 건강했는데…. 놓친 징후들이 있었을까. 조금 더 세심하게 환자를 관찰했다면, 조금 더 빨리 달려갔다면 살 수 있었을까. 순간적으로 수백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도 두 팔은 자동으로 심장의 중앙을 누르고 있다. 겹친 손바닥 사이로 갈비뼈 으스러지는 느낌이 난다. 장기를 보호해주던 뼈는 거슬리는 구조물이 되었다. 심장을 뛰게 만들어 혈액을 온몸에 보내기 위해 손목이 부러질 듯 힘을 실었다. 몇 분 내 의사와 간호사들이 몰려와 기도 확보를 위한 튜브를 삽입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약물을 때려 부었지만 환자의 맥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주세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아들을 위해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한 시간 이상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의 설득 끝에 소생술을 그만두기로 동의했고, 마지막 예의를 다하기 위해 임종 간호를 시행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도에 넣었던 튜브, 수액, 소변 줄 등을 제거했다. 처참하게 찢겨있는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환의를 입혀드렸다. 벌어져 있는 눈과 입은 닫아 드렸다.


평범한 날 오후 2시

슬픈 일도 기쁜 일도 특별한 일도 없이 무난했던 날 우연히 거울 앞에 서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죽은 자들의 눈동자가 겹겹이 쌓여 나를 바라보고 있다. 원망하는 눈빛, 체념한 눈빛, 두려운 눈빛, 삶을 갈구하는 눈빛, 도움을 원하는 눈빛… 온갖 눈빛들이 나를 짓눌러 일어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혐오감이 몰려왔다. 두려움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할 구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고 나조차도 날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런 날이면 찾아가는 곳이 있다. 요가원이다. 직사각형의 한 몸 누이면 딱 들어맞는 요가 매트는 좁지만, 안정감을 준다. 죽은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관 같다. 이 영역 안은 온전히 내 공간이다. 다른 사람 관 안에 들어가는 것이 실례인 것처럼 동의 없이 내 매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은 자들의 눈동자나 자기혐오도 마찬가지다. 매트 위에는 오직 근육의 수축과 이완, 호흡과 시선만이 허용된다.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고, 혼자 오롯이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한 시간이 나머지 스물세 시간을 견뎌 낼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텅 비어있다. 하지만 내 눈은 초점을 맞추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깜빡이기도 하고 눈물도 나온다. 분명 생명 활동을 하는 눈이다.   텅 비어 깨끗해진 눈동자에는 비로소 내가 보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