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사원의 기억

L의 하이킥

by 헌드레드퍼센트

20년도 더 지난 L에 대한 기억.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그날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기억한다.


엄청난 IT 버블의 끝이었던 20세기 말, 20대였던 그때, 세상 물정을 모르고 이 회사 저 회사 면접을 보고선 어떤 IT 회사로 막 취업을 한 상태였다. 그때 그회사 또한 상장을 한지 얼마 안된 회사였고 IT 버블로 직원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그 당시 선배들이 이야기해주었는데 작은 벤쳐 규모였던 회사 입구에서 리셉션을 담당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고 그 여직원 또한 회사가 상장하면서 아파트를 구매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어서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이제 들어온지 갓 1년이 안된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신기루와 같은 꿈을 심어주려는 듯이 이야기를 했었다.


어찌되었던 그 회사에 입사한지 1년이 안되었기에 어떻게든 적응을 하고자 오로지 업무습득, 회사 분위기 적응을 위해 노력을 했었는데 9월 입사 후 얼마되지 않아 추석 연휴가 되었고 연휴 전날 주어진 미션을 달성하려고 퇴근하지 않고 남아서까지 하다가 그날 끝내지 못하고 회사 숙직실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음날 아침에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대치동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회사라는 곳에 들어가서 온갖 처음 다루거나 대면하는 업무, 기기, 사람들을 매일 매일 마주하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는가. 하루는 이전에 보지 못했었던 거대한 프린터를 다룰지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다른팀 직원이 웃으면서 도와주는 일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큰 일처럼 느껴졌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 회사는 코스닥에 막 상장한지 얼마 안되었던 회사로 직원의 대부분이 40대를 넘지 않는 초저령 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그런 젊은 회사였다. 팀 동료들과 선배들의 나이가 나보다 해봤자 겨우 1~2년 정도 많은? 그래서 일 이야기도 잘 되고 동호회? 같은 곳에서 함께 어울려서 재미있는 시간도 많이 보냈었다.




L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 L에 대해 아는게 많지가 않다. 단지 그날의 기억만 남아있을 뿐...


L은 모회사에서 사내 벤처로 그 회사를 시작해서 회사 설립으로 법인이 만들어진 후 연구소장과 같은 역할로 상무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필자가 입사 시 직접 면접을 보긴 했을텐데 기억에는 없다. L과 같이 회사 만들었던 대표와의 기억밖에..

L은 회사에서 양말도 안신고 슬리퍼만 신은채로 일을 하거나 슬리퍼 사이로 발가락이 보이는 채로 회사 복도를 돌아다니는 등 마치 자기 집에 있는 듯 자유로운 모습으로 나와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사무실에서 마주쳤었고 나에게는 별 다른 반응은 없었었다. 직원들은 L을 심하지는 않은 괴짜로 이야기를 하거나 개발자들과 격식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 정도로 평가를 했었다. IT 기업에서 사원/대리급 개발자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하는 C레벨 임원이라고 하면 어느정도 박하지 않은 평판이라고 생각했고 호감 정도는 아니지만 꽤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 L은 회사에서의 위치도 그러하고 외모도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라 꽤 나이가 많은줄 알았는데 지금 찾아보니 필자보다 겨우 5살밖에 많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겨우 과장 정도 나이에 상무 역할을 하고 있다니...


그 회사는 높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의 2,3층 이었던가... 3,4층이었던가... 하여간 두개 층을 사용하고 있던 상태였고 그 당시 다른 IT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수면실? 인지 숙직실? 인지 모를 마루바닥이 있는 그런 방도 있었다. 흡연실은 두개 층 사이의 계단 중단에 위치하고 있어서 직원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밖이 아닌 그 계단 중간층에 위치한 곳에서 길다란 은색 스테인레스 재털이를 사이에 두고 잠깐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 당시 흡연을 하고 있던 필자도 선배들의 눈치가 보이긴 했지만 업무에 영향이 없는 시간대에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정도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에서 흡연을 했었다.


그런 L에 대한 나의 평가는 그날 그의 기이했던 행동으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대신할 만큼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아직 주 5일제가 시작되지 않은 때였고 토요일도 격주로 근무를 하던 때였다. 근무를 하는 토요일에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출근 후 결혼식장을 가기 위해 조금 일찍 근무를 마친다거나 아니면 출근을 해도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놀토? 의 개념으로 동료들과 잡담을 하는등의 생산성 없는 토요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나도 토요일 출근을 했고 휴가를 내거나 일찍 퇴근한 사람들이 많았던 비어있던 사무실에서 나의 할일을 하고 있었다. 퇴근하기 전 담배를 하나 피우기 위해 3층과 4층 사이 계단 중간에 있었던 흡연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면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즈음 L이 4층에서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나는 보자마자 피우던 담배를 재털이에 내려두고 90도로 크게 인사를 했고 그는 계단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L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태권도의 앞차기 자세로 나의 머리쪽으로 닿을듯 날렸고 는 그 순간 당황을 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멍하니 그 발끝만 바라 보았는데 그 때의 장면은 마치 영화속 슬로우모션 화면이 펼쳐지듯이 천천히 시간이 흘렀었고 그 순간 L의 발끝에 양말이 없이 길다란 발톱을 가진 엄지와 검지가 내 눈쪽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순간 느끼게 되었었다.


다행이 그 발끝은 나의 신체 어느 부위도 건드리지 않았지만 L의 오른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다시 그의 오른팔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두르듯이 나에게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었고 그때는 약간 뒤로 물러서려고 뒷걸음질 쳤었던것 같다.


그 후 L은 3층으로 내려갔고 3층 입구 문을 여닫는 순간까지 나는 그 뒤를 멍하게 쳐다보았는데 막 입사한지 1년이 채 안되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후 회사를 빨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가속화 되었고 나는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다른 이유로 그 회사를 떠나게 되었었다.


나는 그가 지나가는 동선에 있지도 않았고 그를 화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할만한 그 어떤 일도 없었던 그냥 지나가는 찰라의 순간에서 발생한 일이었기에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자리에 몇 분간 서 있기만 했다. 그 후 사무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무슨 상황인지 여러가지로 머리속을 돌려봤지만 경험이 많지 않은 20대 후반이었던 나에게는 삶의 기억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일이었기에 해석하거나 매칭할 수 있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L의 나이는 고작 해봤자 30대 중반이 안되었을 것이다.. 나와는 업무상, 회식자리 등 그 어디에서도 대면한적이 별로 없었을 때였는데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L이 나온 대학교의 학생들에 대한 평판이 간혹 좋지 않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서야 그 이유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였다.


그 후 그는 그 회사의 대표를 몇년간 하다가 교체가 되었었고 시간이 지나 그 회사 이름을 들을때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L의 하이킥과 그 발가락 위에 얹어져 있던 누렇고 길게 뻗은 발톱 뿐이었다.




L의 본질이 어떤 사람이기에 회사에서 그런 일을 했을까? 17년 이상 회사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필자도 두바뀌 이상 차이가 나는 띠동갑 회사 동료에게 조차도 그런식의 대면을 하거나 언행을 보인적은 단한번도 없다.


그 이후 어딘가에 또 다른 L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회사생활을 해왔는데 그런 생각을 유지한다는게 상당히 피곤한 일이다. 이제 그런 생각도 떨쳐버리고 싶다.


L은 그날의 일을 기억할까?

아마 못하겠지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