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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Sep 19. 2022

“여자들은 일을 잘해”라는 말

서투름에 관한 이야기(1)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서투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님, 키키예요.


최근 저는 오랫동안 다니던 알바를 그만두고 프리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사실 프리랜서라고 하기엔 수입이 불안정해서 쑥스럽지만, 그래도 저는 저 스스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알바 인생 6년, 저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고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요.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일해보고, 카페에서도 일해보고, 홀서빙도 해보고, 아이를 대신 돌보는 일도 해봤죠. 그런 제가 6년 동안 여러 곳에서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들은 말이 있어요. 바로 “여자들은 일을 잘해"라는 말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무척 뿌듯했어요. 내가 일을 잘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역시 여자들은 일을 잘하는구나!’ 싶어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죠. 혹시 <미스 슬로운>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경쟁자들이 치밀하게 세워 놓은 계획을 자신의 통찰력으로 뛰어넘어 승기를 거머쥐는 여성 로비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예요. 저는 그 영화를 보고 한동안은 진취적이고 완벽한 여성상에 취해, ‘나도 미스 슬로운처럼 능력 있는 여성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능력 있는 여성들을 마주할수록 저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어요. 주변에서 아무리 “키키 너는 진짜 대단해"라고 해도, 저는 제가 대단한지 모르겠더라고요. 객관적으로 보면 20대 중반에 프리랜서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부터가 멋진 일이잖아요. 수익도 벌어보고 모임도 진행해보는 등 꽤 좋은 성취를 거두었단 말이죠. 열심히 노력했으니 성취감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데도, 저는 그럴 시간에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했어요. 나의 서투름이 언제 들통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 쉬지도 않고 일했죠.


생각해보면 제가 미디어에서 보고 접하는 여성상에는 능력주의가 있었어요. 이상하게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여성 캐릭터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남성 캐릭터를 보면 별 감흥이 없는데 말이죠. 또 저는 능력 있는 남성보다 능력 있는 여성에게서 더 불안감을 느꼈어요. 그럴수록 제 서투름이 두드러져 보였고, 저는 서투름을 가리기 위해 더 열심히, 더 눈치를 보면서 일을 하게 됐죠.


문제는 서투른 내 모습을 숨기려고 하다 보면, 큰일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거예요. 대학교 때 친구들은 제게 리더십이 있다며 동아리 회장직을 권유했지만, 저는 회장이라는 거창한 역할을 맡기엔 아직 서투르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부회장으로 1년 동안 활동했는데, 막상 해보니 회장이든 부회장이든 별 차이는 없었죠(물론 회장이 심적으로 더 부담스럽긴 하겠지만요). 약 20년 동안 운영돼 온 동아리에서 여성 회장이 세 명이 채 안 된다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는 후회가 되더라고요. ‘회장 그까짓 거, 사회 나가면 하기 더 어려울 텐데 그냥 내가 해볼 걸..’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제 말은, 사실 누구나 처음인 순간이 있고 서툰 건 당연한 건데 왜 그게 유독 저한테는 어렵게 느껴졌냐는 거예요. 내가 왜 나의 서투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또 서투름을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이, ‘여성'이라는 젠더적 맥락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했고요.


“성공한 사람들조차 이런 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받고 타인 앞에 나서는 일이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은 여성들이 자주 겪는 감정 상태라는 것도. 언제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정받지 못하던 세월이 있고, 그러다 인정받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성공을 기쁘게 맞이하는 대신 두려움을 느끼는 식이다. (…) 왜 이전에 주어지지 않던 인정이 지금 주어지는지 공포 섞인 마음으로 돌아보는 사람만이 이런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한겨레출판


이다혜 작가의 저서 <출근길의 주문>에서 발견한 문장이에요. ‘여자들은 일을 잘한다'라는 말에 막연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가졌던 이유가 단지 내 성격 때문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제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답니다. 가정에서 차별 없이 자랐어도, 학교에서 차별 없이 성적으로 인정받았어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저는 몰랐던 거죠.


여성가족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고위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10%였다고 해요. 꾸준히 늘고 있지만 OECD 평균이 2020년 기준 37%인 걸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죠. 더 큰 문제는 '유리절벽'이에요. 입사할 때부터 소수였던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주위에 여성을 보기 어려워지는데, 그로 인한 고립감과 네트워킹에서 얻은 정보력의 차이로 인해 능률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결국 지금의 노동 구조에서는 능력이 월등하게 좋은 ‘독고다이형' 여성만 살아남게 되는 거예요. 실제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고위직의 사표 비율 중 여성은 약 38%, 남성은 9%였다고 해요.


제가 능력 있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큰 불안감을 느꼈던 이유는 어쩌면 단순해요. 여성에게 할당된 운동장이 지나치게 작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여전히 젠더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 구분되어 있어요. 부부가 함께 회사를 다닐 때, 분명 아내의 급여가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이 집안 살림을 맡고 남성이 회사를 다니는 가부장적 구조가 유리해집니다. 연차가 쌓일수록 주변에서 여성 동료를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적어지니까요.


“여자들은 일을 잘해”


언제부턴가 이 말이 더 이상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아요. 오히려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대체 어디까지 잘해야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얻게 되는 걸까 싶어서요. 언젠가는 나의 서투름을 당당하게 내보일 수 있을까요? 잘함과 못함에 상관없이, 그저 나로서 인정받고 일터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까요?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기꺼이 서투름을 내보이고 싶은 요즘입니다.


2022.09.19


키키 드림




*추신 : 저의 서투름 하나를 고백하자면, 저는 프리랜서지만 외주를 받을 때 비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아직도 몰라서 열심히 구글링을 한답니다. 아무리 검색해도 시원하게 알려주는 곳이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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