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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달리기 Oct 26. 2022

언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언니에 관한 이야기(1)

<할 말 많은 편지>는 서로를 돌보고 싶은 두 20대 여성의 다정한 시선을 담아낸 교환 편지입니다. 네 번째 주제는 ‘언니’입니다.





안녕하세요 사하님, 키키예요.


저는 지금 막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탄 참이에요. 생애 처음으로 춘천에서 강연이란 걸 해봤답니다.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저와 같이 동업 중인 ‘황 언니’와 함께 했죠. 서울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서울로 버스를 두 번 탔는데요. 갈 때는 피곤하기도 하고 정신이 없었는데, 올 때가 되어서야 언니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긴장이 풀린 언니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과 안도감, 그리고 설렘이 엿보였죠. 언니의 얼굴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니가 있어 참 다행이라고요.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황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과, ‘언니’라는 존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것, 두 가지요. 실은 아까 강연을 마치고 언니를 보는데, 갑자기 황 언니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으로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정말 많은 언니들의 도움과 손길과 격려가 있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생각해보면 제 주변에는 늘 언니들이 있었어요. 2년이 넘도록 함께 라디오를 진행 중인 함 언니, 함께 카페에서 일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자기 가게를 한 번 꾸려보고 싶다며 독립한 지니 언니, 일하던 카페의 대표님이었지만 지금은 술이 마시고 싶을 때 연락하게 되는 최 언니. 최 언니는 제게 촬영 감각이 있다며, 카페 아르바이트 말고도 가게의 음료 영상을 찍어달라는 제안을 주기도 했는데요. 그때 처음으로 돈을 받고 영상을 찍어봤어요. 내 실력을 알아보고 기회를 준 건 전부 언니들이었죠.



황 언니는 인터넷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제가 유튜브랑 인스타그램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아무튼, 비건>을 읽고 비건 지향 선언을 시작한 저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대요. 자기도 육식을 하는 것에 이유모를 찝찝함을 느껴왔는데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니, 자기도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졌다고. 그와 동시에 나라는 사람에 호감을 갖게 됐다고.


그때부터 언니는 제게 꾸준히 DM을 보내기 시작했고, 2020년 1월 2일, 서울 합정역 3번 출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눴어요. 책으로 만난 인연답게 각자 책 선물을 준비한 채로요. 그때 황 언니는 <동물 해방>과 오은 작가의 시집을, 저는 잡지 <스켑틱>을 들고 있었어요. 처음 만났는데도 10년 지기 친구처럼 잘 맞았던 기억이 나요(절대로! 언니가 한라토닉을 잘 말아서가 아니에요). 무엇보다 이제 막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 서로에게는 큰 힘이 됐죠.


우리가 친구이자 동료가 된 건 두 번째 만남 때였어요. 비거니즘을 비롯해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뉴스레터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언니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죠. 그랬더니 언니는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괜찮다면 자기도 같이 하고 싶다는 거예요. 함께할 사람이 너무나도 필요했던 저는 덥석 언니를 물었죠. 그렇게 ‘에코티(지금은 ‘이엪지’로 이름이 바뀌었어요)’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의 기나긴 팀플이 시작됐어요. 절친한 친구 같기도, 동료 같기도 한 우리 사이가 가끔은 참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죠.


언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언니한테서 받은 게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저한테 없는 것들이 언니한테는 있었고, 그래서 저는 자주 언니에게 의지했죠. 제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폭주 기관차처럼 추진력을 불사 지를 때, 언니는 한 발짝 물러나 생각하는 통찰력이 있었고요. 이러다 우리 망하는 거 아니냐며 쓸데없는 공상에 불을 지피면, 언니는 어느새 다가와 물을 끼얹어주었죠. ‘에코티’에서 ‘이엪지’로 팀 이름을 바꿀 땐 불안감에 징징거리며 울기도 했는데요. 그때도 언니는 차분하게 저를 설득했어요. “어쩌면 지금 바꾼 게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몰라. 나중에 유명해졌을 때 바꾸는 것보다 낫지, 안 그래?”라면서요.



정상적 퇴행이라는 말을 아세요? 오은영 박사님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알게 된 건데요. 신뢰가 깊고 좋은 관계에서는 정상적 퇴행이라는 게 있대요. “나 아파써ㅠㅠ”하고 혀를 짧게 굴린다거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행동을 하는 것들이요. 겉으로는 이상해 보이지만, 오히려 스트레스를 낮추고 서로의 돈독함이 더욱 깊어지는 행위라고 해요. 생각해보면 전부 제가 언니 앞에서 하는 행동이더라고요. 언니 앞에서 저는 종종 철부지가 되거든요.


황 언니뿐만 아니라 친한 언니들 앞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아마 언니여서 그런 거 같아요. 사람 자체가 좋아서인 것도 있지만, 대체로 언니들은 참 든든하고 멋지잖아요. 의존적 욕구라는 건 연인에게서만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연애를 못 하는 건 언니들이 충분한 사랑을 줘서 아닐까…라고 합리적 의심을 해봅니다.


버스 안에서 옆에 황 언니를 두고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조금은 쑥스러운데요. 언니들 생각을 하다 보니 추웠던 버스 안이 어느새 포근해졌어요. 슬슬 졸리기도 해서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실은 이 편지를 왜 쓰게 됐냐면요, 다다음 주에 후배이자 1살 어린 동생을 만나요. 사실 1살인지 2살인지 나이도 잘 모를 만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데요. 어느 날 후배에게 연락이 와서 밥을 같이 먹기로 했어요. 참으로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집에서도 막내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언니들이 훨씬 많았어서, 동생이란 건 여전히 제게 어렵거든요. 제가 여태껏 봐온 언니들은 적당히 거리를 두되 듬직한 언니로서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었는데, 저는 그 멋진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할 거 같아 좀 두렵기도 하고요. 뭐, 망했다 싶으면 언니한테 달려가서 징징되면 되겠죠. 히히


그래도 언니가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언니들에게서 받았던 수많은 사랑 덕분에, 저도 언니로서 다른 동생들에게 내리사랑 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언니>라는 책에도 이런 말이 있잖아요. “내가 그에게 좋은 언니인지는 그만이 알겠지만,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언니들보단 동생들에게 더 마음을 쏟으라는 어느 언니의 말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고요. 언니들에게서 받은 사랑만큼, 좋은 언니가 되고 싶은 요즘입니다.


2022.10.26


키키 드림




*추신 : 그나저나 제게는 친언니도 있는데 정작 그에 관한 얘기는 없네요. 언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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