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허튼말을 하면 안되고, 몇번 반추해서 스스로 검증한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일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어도 이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하지는 않겠군. 하는 묘한 안도감과 보호받는 느낌과도
닿아있다.
가끔 우버를 타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기사들이 있다(마치 우리나라의 카카오 택시에서 '조용한' 기사를 원한다고 선택하면 침묵의 시간을 보낼수있는 것처럼, 이곳 우버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조용하지만). 그런데 South Korea 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하거나, 젊은사람들일 경우에는 한국문화가 유명하지 않냐는 반응을 보일때도 있다.
10년도 더 전에, 미국에서 일할때는, South Korea냐 North Korea냐 묻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때마다 기분도 언짢았었는데, 10년 사이에 North Korea가 도발을 많이해서 유명해진건지,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10년 사이에 내가 느낀 반응들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론, 브뤼셀에 외국인들이 그만큼 많기때문에 그들의 원소속, 그러니까 국적이 별로 안궁금한것일 수도 있다. 벨기에 거주자들은 150개 이상의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단 EU 회원국 27개국 소속 공무원들과 각종 씽크탱그, 기업들 소속의 유럽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벨기에가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을 식민지로 삼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아프리카 대륙에 유럽이 갖고있는 심적인 부채와 오래된 경제적 유대 때문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돈벌러 와서 많이 살고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경제적 어려움이든, 유럽을 동경해서이든간에, 중동에서,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도 많다.
매우 동질적인 구성원으로 구성된 집단에서라면 외모나 행동이 주류와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보고, 어디서왔을까 궁금해 하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브뤼셀에서는 원소속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게 개방적이고 오픈마인드의 도시였어! 하기에는 차별적인 시선이 없는건 아니다. 일본 인구가 꽤 많아 일본인학교까지 있는 브뤼셀이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사람은 별로 없고, 그냥 동아시아 사람으로 인식되기 쉬울텐데, 솔직히 말하면 중동이나 아프리카 출신에 대한 더 노골적인 차별만큼은 아니어도 어느정도의 차가운 시선이 없다고 하기에 힘들다.
가까운 예로, "마담, 무슈! 모든 문을 다 잠궈줬으면 좋겠어!" 라고 밑도 끝도 없이 불어로 휘갈긴 A4 용지가 퇴근하고 현관을 여니 바닥에 끼워져 있은 적이 있다.
집에 종종 소매치기가 드는 브뤼셀에선, 4층짜리 낮은 아파트들도 가장 바깥 대문, 중문, 자기 호수의 문까지 2-3개의 문을 열쇠로 꼭꼭 잠그는, 내눈엔 생경한 광경이 있는데(손가락으로 비밀번호만 누르면 되는 편리함이 이들에게는 더 위험하게 느껴진단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집이 8개의 집들중에 문을 안 잠궜다고 확신했는지는 모르겠다. 8집 중에 아시아인들은 우리밖에 없고, 이 아파트가 연금받아 생활하는 은퇴자들의 아파트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런 메모를 받고는 인종차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만큼 화가 났었다. 2층에 사는 머리색 짙은 할머니가 왕왕 우리가 사는 0층 옆집 현관에 와 옆집 할머니랑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중문 열고 들어가면 인사도 안하고 쨍. 하게 서늘한 시선을 주더니, 그분이 자꾸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고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억울해야 할까?
사실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사회가 은근 보여주는 동질성에 기반한 배타성이 전세계 어떤 곳에 내놔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라는 걸 알고, 그에 비해, 이민자 내지는 외국인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벨기에가 보여주는 배타성이 그 정도까지라고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일례로, 모로코에서 온 아저씨가 우버 드라이버가 되고,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작은 동네 구멍가게는 터키 아저씨들이 꽉 잡고 있고, 자그마한 샌드위치 집들은 베트남, 터키, 태국 할 것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오너인 경우가 사실 많다. 합법적으로 이민이 열려있고, 출산율 저하로 감소할뻔한 인구가 EU 내에서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동유럽이나 EU 역외의 개도국 출신 이민들로 감소를 면하고 있는 벨기에이기에, 외국인이나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고는 해도, 사회 구성은 이미 돌이킬수없을만큼 다변화되어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돼지고기를 전세계로 수출하는 벨기에 돼지 농장에서 작업용 트럭을 몰 운전수들이 모자라져서 돼지고기 공급 파동이 온다고 우려가 높았다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EU 회원국 시민들간의 교류는 거의 한 국가 수준으로 긴밀해 져 있다고 느껴진다. EU와 하는 회의에 가보면 이태리 액센트가 강한 여자 과장이 설명을 해주고, 입구에서 회의장까지 안내주시는 비서 분은 동유럽 액센트가 물씬, 화상회의 때 만난 전문가들은 폴란드와 헝가리 출신. 각국의 안보 재무 정책은 여전히 국가별로 다르다고 해도, 차량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이주를 어느때고 할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하면 그 도시가 나의 도시가 될 수있는 자유는, 유럽연합이 가진 아주 독특한 기회의 창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독일인이지만 일은 브뤼셀에서 10년 넘게 하고 있고, 부인은 이태리 사람이라 여름마다 이태리 남부 시골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아이들은 양쪽 국적을 모두 갖고 있는 사례가 흔하다. 휴전선으로 경계가 그어져 사실상 인천공항이나 부산항같은 몇개의 엔트리 포인트들을 거치지 않고서는 외국으로 갈 수 없는 우리가 듣기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범위의 거주와 이전과 직업의 자유가, 회원국들에게는 주어지는 것이다.
EU 회원국이 아니라도, 여러 국가와도 협력협정을 맺고 인적인 교류와 과학기술 투자, 비자 발급 간소화 같은, 상당한 혜택을 부여해 주고 있고, 그래서 브뤼셀에서 나 또한 시내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공원, 그리고 구립 스포츠 센터, 어린이집 같은 인프라를 쉽게 누리고 있다.
EU가 점점 외연을 확장하며, 이질적인 집단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내재화하는 역사를 거쳤기 때문에 이러한 포용성은 앞으로도 지속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곳이 근본적으로는 개방적인 곳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인구감소와 그에 따른 노동력 부족 때문에라도 외국인들의 이주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연구들이 있는만큼 점점 더 개방적으로 변해가겠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유럽의 그것과는 아직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지난 일요일,
서늘함 가운데도 완연히 봄이 찾아와 0층 거주자들에게 주어지는 잔디밭있는 테라스에, 4층에 산다는 집주인이 잔디깍는 자동식 기계를 설치해 주었다며 옆집 할아버지가 두 집 테라스를 가르는 펜스에 기대어 영어로 설명을 해주셨다. 이 기계는 나도 처음봤는데, 타이머로 설정해 놓으면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에 45분씩 잔디를 깍고 구석에 설치된 충전대에 알아서 가서 다시 앉는다며, 강아지 한마리 생긴샘 치라고 하신다. 그 덕에 우리 아기도 나와 로보트다 하며 따라다니고 괜히 남편과 나도 신나 구석에 쳐박혔던 골프 클럽중에 퍼터 하나를 꺼내와 스윙 연습도 해본다.
그걸 위에서 보고 계셨는지 2층 할아버지(바로 그 머리색 짙은 할머니의 남편분인것)가 갑자기 남편보고 폼 좋다고 말을 걸고, 옆집 할아버지도 갑자기 관심을 보이며 어느 클럽 다니냐고 물어보신다. 입주한지 7달이 넘어가는데, 이렇게 잔디깍는 로보트며 골프에 대해서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건 처음인 것같다. 마음깊이에서 반가움과 친밀함이 솟아오른다. 아. 배타적인 마음은 함께 공유하고 좋아하는 것이 없는, 정보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었지, 이 벨기에 할머니 할아버지들과도,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점을 찾을수 있었구나, 하는.
개인적 경험이 결국 인식을 만든다고, 배타적인 구석이 많아... 하던 내 마음은, 작은 일요일 사건으로, 같은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친밀감도 키우고 혹시나 1-2년 뒤엔 같이 연습경기도 나가볼수있지 않을까? 하는 흥미 진진한 생각까지 하고 있다.
어쨌든, 이곳에서 일하는 과정은 많이 익숙해졌는데, 생활 측면에선 소외감이 있었다면, 점점 극복할 수 도 있겠다는 생각에 반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