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말하도록
Silence Speaks Louder
_
침묵에게 무게보다 시간을 준다. 그 시간은 침묵을 듣는 이에게 어떤 공간을 내어준다. 말하고 싶은 것들을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느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숨이 가빠오는 동안 놓쳐버린 것들이 그곳에 산다. 재잘재잘 즐겁게 웃고 떠드느라 끝끝내 말하지 못한다. 아름답지 않아 숨기고 싶은 것들,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상상만 하다 끝나는 것들. 침묵은 '화자'를 통해 글이 될 수 있다. 침묵이 화자가 되는 이야기. 침묵이 목소리를 갖는 이야기. 침묵은 장애물이나 슬픔이 아니라 하나의 호흡이자 연주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동류의 침묵을 가진 화자를 찾는 일이다. 새로운 불안에 반응하기보다 이전의 불안에 직면한다. 사랑하다 미워해버린 것들. 태어나면서 세상을 향해 터트리는 울음은 생애 첫 저항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삶이 시작되자마자 죽어가는 걸 감각한 자의 울음은 생에 대한 강력한 의지. 불안을 틀어막는 수다를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기는 무언가 핵심을, 진실을 받아쓰려는 능동적인 창작의 태도이다.
그간 모아둔 글들이 엑셀 시트에 갇혀버린 건 '연대'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알고 있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높은 사회적 민감성이라는 개인적 성향 탓도 있겠으나, 여성 서사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연대라는 단어가 불편해서 피하곤 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물론 여성 서사의 토양에서 자라온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울분에 차있을 필요도 없고, 인정 욕구에 시달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경제력에 관한 이야기,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엄마들의 이야기, 여성들의 잦은 휴직으로 인해 고통받는 남성 동료들의 이야기 중 어느 것도 내가 오롯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언제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남는 이유이다. 오직 질문만이 가장 나다운 것이다.
자신만의 토양은 직접 발견하는 것이다. 비슷한 '화자'와의 연대를 통해, 저항도 순응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계속 질문하는 것만이 이따금씩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이다.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가 왔고, 내가 채울 이야기는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