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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서 쓰임을 따지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쓰는 글보다 더 한심한 순간들. 그래서인지 '왜 쓰고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그러니까 글의 형식이 글에서 특히 중요한 책들이 철가루처럼 내게 들러붙었다. 김진영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글의 전형적인 장르 가르기가 글쓰기를 가두고 있다고 느꼈다. 일기처럼 쓰면 안 돼. 에세이는 짠하고 소설은 놀라워. 내 얘기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지. 어떤 말은 일부 맞고, 때론 완전히 틀린 말이다. 어쩌다 일어난 사건에 우린 너무 의미를 부여하고 만다. 그의 일기는 내게 세 글자로 읽힌다.
자연, 사랑, (실은) 제발...
지극히 사적인 필자의 죽음, 하지만 누구에게든 일어날 '사적인 나'에 대한 일기는 서신이고 에세이이며 악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애도할 축복은 희소하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도 하지만, 언제까지 살아있을지 알지 못하므로. 오로지 끝을 알아버린 자에게만 주어진 축복이 있다. 우린 그걸 덜 수고스럽게 누리고 있을 뿐.
정신력으로 살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는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다. 몸이 소멸하는 순간에 정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깨져버린 그릇에는 공기도 새어나간다.
Der stille stunde. 아주 고요한 시간이 되어서만 알 수 있는 자기 유지 Wunderbare Selbsterhaltung의 감각이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있구나.. 아주 시끄럽고 정신없이 살기 대회에서 힘도 몸도 사라진 어느 시점에서야 우린 자기 보존을 의식한다. 나는 나를 지키고 있는 걸까? 초안을 완성하기도 전에 편집부터 시작하는 우리에겐 파티는 조금 유난스러워 보인다.
저기요, 저를 초대하셨더라고요. 근데 저를 아세요? 전 여기에 와본 적도 없고 심지어 당신을 알지도 못해요. 아니...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요. 내 주변에 당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제발 저를 이 파티장에서 좀 나가게 해 주세요. 귀도 먹먹하고 공기도 탁해서 숨이 막혀요. (...) 하지만 정작 주인이 나가라고 하니 그땐 좀 서운하더군요. 그제야 이 파티가 꽤 재밌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김진영은 삶을 '힘들'이라고 했다. 수영할 때 턱을 들거나 누군가를 온몸으로 미워하는 그런 힘 말고, 신체의 힘, 정신의 힘, 마음의 힘, 어쩌면 영혼의 힘.
힘이 떨어지면 끝이다.
그리하여 다시 몸. 몸. 몸.
끓였다 식히고 썼다 지우고 기억했다 잊어버린
몸. 몸. 몸.
다시 돌아가는 모양. 자연, 사랑, 그러니까 시간에 대한 구애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자궁으로, 유년으로, 문학과 언어로 자꾸 돌아간다. 마치 왔던 곳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려는 듯이. 누군가에겐 곧 죽는 일, 누군가에겐 '아직' 살아있는 일, 애도이며 구애이고, 존재하는데 무의미한, 이 돌림노래 속에서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닌 Einmal ist keinmal 그 순간이 좀 잔인하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명랑하게 축제를 즐길 수도 있다. 언제든 퇴장당할 수 있는 이 파티장에서 주체로, 우아한 손님으로 살다 가기.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