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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클 Dec 09. 2024

<에세이즘>에 관하여



새해엔 잘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속 시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프로 같은 아마추어가 되고 싶고, 그래서 담백하고 진지한 글을 쓰고 싶다. 특정 카테고리나 카트에 담기는 글보다 자유롭고 솔직한 글. 내가 쓰면서 행복한 글, 그런데 읽는 사람도 행복해지 글. '그래도 될까?' 하는 의구심을 올해로 끝낼 수 있었던 건 두 권의 책 <형식과 영향력>, <에세이즘>의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디아 데이비스에 대해선 앞서 쓴 바가 있으므로 브라이언 딜런에 대해 좀 더 쓰고 싶다. <에세이즘>을 펴면 '00에 관하여'라는 목록에 가까운 목차가 펼쳐지는데 다 덮고 나면 에피그라프를 다시 보게 되는 마력이 있다. 브라이언은 에세이가 '위험이나 모험에의 충동 그리고 완결된 형식이나 미적 완성에의 충동 사이에서 흔들리는 장르'라고 했다. 조각난 채 완성되지 않은 단상들을 쓰는 것에 대해 브라이언은 그것 자체로 완결된 메시지이며, 완결되지 않았지만 그 멈춤도 완결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에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에 행복의 목록 같은 게 있을까? 소유물들, 성과물들, 경력들의 즐거운 언어적 합계 같은 것이? 그것들을 기록하는 일 자체가 어딘가 불편하다는 증거이자 뭔가 누락되었다는 힌트는 아닐까? 39


수집가의 카탈로그, 상인의 장부, 바람둥이의 비밀 주소록 따위가 모두 보상 통제의 사례라고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무거운 목록과 상대적으로 가벼운 목록이 있다고 말하는 구간에선 에세이란 연습장에 던져보는 단어들 모음처럼 느껴진다. 목록의 특정 주제 아래 모인 단어들은 어떤 은유, 그러니까 에세이스트가 부여한 의미 관계를 갖게 되고 그렇게 글쓰기는 시작된다. 그것은 분명 주인공이 어떤 상황에서 특정 사건을 겪게 되는 종류의 임팩트나 견고한 흐름을 갖고 있지는 않다. essay는 그 어원의 의미대로 (시도해 본다는 뜻의 'essayer'는 저울을 뜻하는 후기 라틴어 exagium에서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고 시험하는 글이다. 하나하나 묘사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동반한다.


나에게 쓰기란 하루 이틀 안에 작성될 수 있는 단상들의 연속 생산이다. 착상하고 완료하는 이 리듬을 생각해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경우, 어쩌면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경우에도, 삶을 소진시키는 불안의 접근을 막아주는 것은 바로 이런 리듬 덕분이다. 55


'여러 이질적인 사건들과 활동들, 서로 상충하는 여러 자아들로 가득 찬 삶도 충만한 인생의 의미 중 하나'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발견한다. 일상은 소진과 배움으로 가까스로 그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이를테면, 내 삶이 소진된다고 느낄 때마다 허수경, 배수아, 김진영을 읽고 스타디움과 푼크툼을 잃어버렸다고 느낄 때 롤랑 바르트를 찾고, 잊을만하면 일탈과 탈선의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와 나의 사회생활을 괴롭힐 때는 버지니아 울프와 오스카 와일드, 메리 올리버, 에밀리 디킨슨을 곁에 두는 것이다.


에세이는 하지 않는 몸보다 하는 몸, 해보는 몸에서 나온다. 편린이든 단상이든 그것이 내 몸에서 나온다면 그것이 수동적으로 보일지라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하나의 주제로 쓰는 능력도 부럽지만, 새롭게 자꾸 다시 시작하는 능력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에세이스트에게도 여전히 별것 아닌 것을 오래 관찰하는 능력과 재미/의미를 모두 챙기는 과제가 남아 있다. 물론 브라이언은 본인의 우울감을 극복하려고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의 솔직함이 맘에 든다. 에세이는 작가 자신을 소재로 삼기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면 한 자도 쓸 수 없을 도 모른다.


그의 목차는 목록이라든지, 단상이라든지, 디테일이라든지, 에세이에서 핵심이 될만한 것들을 다루지만 잊을 만하면 위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챕터가 등장한다. 그에게 에세이는 위안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에세이즘을 읽는 이유는 그 솔직함 때문이다. 에세이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과정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다이어리즘(내가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처럼 보인다.


너무 큰 질문이라고, 너무 민망한 질문이라고까지 느껴질지 모르지만, 에세이가 못 다룰 만큼 큰 질문은 없다. 반대로 너무 작은 질문, 너무 사사로운 질문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마찬가지다. 에세이가 못 다룰 만큼 작은 질문은 없다. 64


이런 질문의 크기는 호기심과 연결되는 듯하다. 아주 작고 하찮(게 보이)고 '굳이 이런 것에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의 지식욕만큼이나 그가 갖고 있을지 모를 단어 채집장이 탐난다. 호기심의 방이라 불리는 분더 카머 wunder kammer에는 진귀한 수집품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바닷속 물고기에게서 발견된 반지나 수잔 손택의 일기장에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 시도하고 실패하는 이 발견 놀이에서 에세이는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수잔 손택은 자신의 일기에 다양한 목록을 작성했다. 아벨라르의 해양 생물학, 분젠 남작의 저작, 욥기,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과 같은 연구 주제들도 있다. [...] 이토록 다양한 관심사를 가졌으며 다양한 예술을 열렬히 논하는 비평에 매진하는 비평가에게서 충분히 예상되듯, 손택은 읽을 책과 볼 영화의 목록을 만들기도 했다(작가란 모든 것에 대해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일기에 썼다.) 163


수잔 손택은 일기라는 글의 형식에서 소설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자신은 일기를 쓰는 거짓말쟁이라는 듯이. 일기를 쓰는 자신은 진짜 자기 그 이상의 존재이며, 자신은 일기를 통해 재창조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는 일기를 쓰면서 한 번도 내가 거짓말쟁이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거짓말이 조금 서툴 뿐. 여전히 모종의 창작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럴 바에 완전히 날조된 일기를 쓰는 것도 딱히 양심에 거슬리는 일은 아니다.


글은 오브제다. 나는 글이 독자에게 체험을 제공하기를, 다만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공하기를 바란다. 내가 쓴 것들을 체험하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 같은 건 없다. 165


글의 운명은 오브제다. 글은 쓰는 사람에게서 나왔지만 그 사람을 뛰어넘고 나오는 순간 읽는 사람의 삶으로 스며든다. 가능한 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체험'되는 글쓰기에 대해 오래 생각하니 나는 좀 더 거침없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물쭈물하는 글을 쓰고 있다면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글쓰기는 글을 읽는 사람 못지않게 쓰는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폭력적이다. (그만큼 숨길 수 없다) 딱 살아내는 만큼만 써낼 수 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척할 수 없고, 매여서 답답해하는 사람이 홀가분한 글을 쓸 순 없다.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전부 빠짐없이 쓸 것. 늘 노트를 소지할 것. 171


나는 책방 '잘 익은 언어들'의 책 Q 모임에서 '글쓰기에서 자기 검열이란 얼마나 쓸데없는 독인가?'에 대해 설명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을 끝으로 당분간 자기 검열의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게 리디아와 브라이언이 내게 건네준 수행 동사다. 매일 뭐라도 쓸 것. 내가 글쓰기 앞에서 겪는 문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끈기 있게 오래 말하기, 진짜라고 믿을만한 거짓말을 지어내기, 에너지를 유지하기 등이 있는데 이젠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상과 편린 속에서도 재미와 기발함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믿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 진짜 믿어도 되는지 탐구해도 되지 않을까? 이 미약한 에너지로도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사색과 환상의 힘을 좀 더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말처럼, 에세이는 언제 죽어도 그 자체로 영속하는 하나의 결정체.

미완(未完)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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