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회화 감상
한반도를 반으로 가른 선에서 동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지개를 펴는 범의 허리께에 자리잡은 강원도 통천군에 총석정은 위치한다. 동해변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여덟 절경인 관동팔경의 첫째이자 가히 으뜸이 되는 곳이다. 총석정은 이름처럼 그곳에 세워진 정자를 의미하나 흔히 넓은 의미에서 주상절리가 펼쳐진 그곳 일대 자체를 지칭한다. 광막한 동해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바위기둥들이 언제까지고 우뚝 서 있는 곳. 여섯 혹은 다섯 모서리로 깎인 직선적인 화산암 기둥은 일체의 인위를 허락하지 않는 냉담한 자연의 예술품이다. 터져나오는 열기, 수축과 응결의 냉각이라는 충돌하는 두 과정으로 섬세하게 빚어지는 주상절리는 어머니 자연의 고독함과 강직함 그리고 끊임없음이라는 본성을 그대로 품고 있다. 절벽의 끝에서 내려다보는 돌기둥은 생명에 의해 흔들리는 법이 없으나 생명을 몰아내는 법도 없이 다만 서 있다. 일출의 눈부심과 일몰의 부드러움, 한낮의 적막과 폭풍의 광포함을 오직 끝없는 바다를 통해 바위기둥은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많은 이들이 그 말없는 찬란함에 혼을 빼앗겼을 것이며 그 대가로 얻은 것을 붓에 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례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두 점의 구도는 매우 유사하다. 화가는 주상절리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서서 내려다보았으며, 주상절리를 화폭의 중앙에 놓고 절벽 끝에 선 정자를 오른편 가장자리에 위치시켰다. 자연의 예술품을 그곳에 있는 짧은 순간에나마 손 안에 쥐고자 한 열망이 반영된 인간의 건축은 그러나 물론 자연의 공간에서 중앙에 설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돌기둥은 오직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추상화 기법처럼 직선으로 투박하게, 섬세한 명암의 표현 없이 그 우뚝함이 강조되게끔 그려졌다. 실제 모습을 반영하여 색이 짙은 모서리에서 붓을 뉘어 찍은 다음 선이 이어질수록 점점 먹이 묽어지도록 한다. 한편 숨가쁜 파도는 낮은 기둥들의 몸체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희게 부서진다. 돌기둥의 뒤, 물결치는 수면은 농도가 일정한 선들로 흐릿하지만 온화하게 표현한다. 바다는 가까우나 닿을 수 없어 아득하다. 그리고 해풍을 받으며 탄생한 늙은 소나무들.
두 작품은 한눈에도 산수화로서 가질 수 있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최상으로 구현하는 듯하다.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섬세히 묘사된 경관은 눈 앞에 펼쳐진다. 코 끝에 바닷바람이 스친다. 멀리 아래에서 스러지는 파도 소리로 귀가 먹먹하다. 절묘히 깎아낸 기이한 바위 기둥, 그 너머의 고집스럽고 찬란한 바다.
한편 내가 시선을 빼앗긴 이름모를 화가가 담은 총석정은 정선과 김홍도의 것과는 다른 시선, 다른느낌을 주며 고유한 독특함을 가진다. 작품명을 확인하기 전에는 산수화가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먼저, 앞선 두 작품에서는 오른편 외곽에 위치시키긴 했으나 화폭 중앙에서 시작된 시선이 이어진 절벽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하도록 존재감을 주었던 정자가 여기서는 단지 왼편 끄트머리에 배경처럼 담묵의 얇은 선으로 간략히 그려졌을 뿐이다. 주상절리를 표현하는 굵직한 선에 비해 너무나 얇고 멀고 흐려 가까이 서서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정자라기보단 길가에 흔히 늘어선 초가처럼 보여 더욱 존재감이 미미하다. 정자를 떠받치는 절벽 또한 단 일필의 흐린 선으로 그려져 주변부로 밀려난다.
앞선 두 그림에는 없던 존재가 있다. 마찬가지로 얇고 세밀한 붓으로 그려져 우뚝하고 거대한 돌기둥의 위압감을 강조하는 새들이다. 가장 높은 돌기둥에 모여든 새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서 있다. 오른쪽에는 두 마리 새가 느긋하게 지상과 해상을 오간다. 수천년동안 자리를 지킨 바위기둥과는 다르게 찰나를 살며 잠시 그 위에 머물러갈 뿐인 작은 생명인 새들은 바다 위 기암괴석이 품은 비범한 시간성을 뚜렷이 대비해 내보인다. 동해와 맞닿은 거대한 절벽과 기이한 기둥들은 그러한 생명체의 나고 죽음을 수없이 지켜보며 흔들림없이 존재해왔을 것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곧 바위기둥 위의 새가 되어 그 모든 속성을, 무한함을 절감한다.
다시 시야를 넓혀 그림의 중심부를 한눈에 담으면 가감없는 표현력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기암괴석은 오로지 하나의 기법으로만 그려졌다. 필요한만큼 묽게 희석한 먹에 적신 넓은 붓을 대각선 또는 수평으로 비스듬히 눕혀, 먹이 과도하게 뭉치지 않도록 일정한 속도로 그으며 농담을 조절했다. 자연스레 번지는 일필의 수직기둥 곁에 그 옆면이 맞닿도록 또 한 번, 또 한 번. 한 기둥에서도 서로 다른 높이로 깎이어 있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시 적신 붓을 먼저 그려진 기둥의 중간에 대고 똑같이 반복한다. 높이 솟은 기둥들 아래에 촘촘히 뭉뚝히 자리한 낮은 바위들을 그리기 위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다만 선의 농도가 옅어지기 전에 멈춘다. 단 일필로 바위 위에 우뚝 선 기둥으로 변모한 선들의 굵기는 모두 일정하다. 선들은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빈틈없이 나란하다. 하나하나의 모든 선이 흐트러짐 없이 같은 호흡으로 신중하게 그려졌다.
오로지 여백과 먹으로만 형상은 물론이고 화가의 정서, 내면세계의 깊이마저 담아내는 것이 수묵화다. 먹은 붓이 닿는 순간 곧바로 스며들어 수정이 불가하며, 일단 붓을 대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수묵화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허용하지 않는 예술이다. 따라서 화가는 붓을 들기 전에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상을 제 속에 먼저 완벽히 구현해두어야만 하며, 일단 붓을 대었다면 멈추지 않고 자신있게 휘둘러야 한다. 화가가 백지를 눈앞에 둔 채 붓을 들고 어떤 갈등과 두려움으로 망설인다면, 그는 결코 그려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완벽한 자기통제 아래 그려진 곧은 선들을 보며 이름모를 화가가 품은 너른 경지를 짐작했고, 아낌없이 감탄했다.
동양회화를 감상하고 배울 때 핵심적인 개념이 '의경'이다. 이는 작가가 붓을 들기 전 내면에 쌓은 높은 경지의 정신세계로 인하여 구체적인 상관물과 만날 때 새롭게 형성되는 깊은 의미를 뜻한다. 눈앞의 사물은 나의 내면을 그 속에 품고 나의 내면은 그 사물로써 새로워진다. 그러나 사물의 구체적 형상만이 나와 세계 사이의 창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화폭 위에 형상을 지음으로써 그 자신이 가진 정신적인 것들을 상관물 속에 담아 쏟아내는 한편, 형상짓지 않음 즉 비워둠으로써는 더 심오한 의의를 부여하게 된다. 색채와 채움의 미학이 주도하는 서양회화에서와 달리 그 표현법이 지극히 단순화된 수묵화에서는 선을 비롯한 화폭 위의 모든 요소에 뜻을 담는다. 여백에마저도. 여백은 시각적인 '없음'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수단이자 방법으로 기능한다. 여백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화가의 고매한 정신과 미학적 이상을 품는다. 동양회화에서 허와 실은 대립하지만 충돌하지 않으며 서로에 의해 견고해지고 완성된다.
정선과 김홍도의 총석정도와는 달리 이 그림에서는 수면도, 파도도, 수평선도 없다. 지극히 단순하지만 필요한 모든 것을 담도록 표현된 기암괴석들 너머로는 그저 비어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곳에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무자비하도록 깊고 찬란한 바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에서 하늘이 푸름이 아닌 검은 색으로 대응된 것은 현자들이 하늘이 까마득히 높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높이와 관념적인 높이 모두. 따라서 그 깊이를 알 수도 감히 표현할 수도 없는 하늘의 색을 자신 안에 모든 걸 담는 흑색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담을 수 있는 흑색처럼, 여백 또한 마찬가지다. 붓을 대지 않고 내버려둔 여백으로서의 바다는 단순히 눈에 보이게 그려진 그것보다 훨씬 깊고 아름다우며 광막할 것이다. 그려지지 않은 만경창파를 우리는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그 여백을 샅샅이 살피다가 화폭이 된 비단이 마치 흔들리는 수면처럼 잔주름이 져 있음을 발견했다. 바다를 그려낸 선은 단 하나도 없지만, 비단 그 자신이 바위기둥 너머를 꽉 채운 바다가 되어 주었다. 비단이 만들어낸 수면은 안개 자욱한 날 흐리게 파도치는 능선 같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한동안 작품 앞을 떠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