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악~~~!!! 제길! 늦었다!’
주감독, 아니 주서영은 오싹한 기운에 벌떡 일어났다. 뒷풀이 자리에서 밤새 마신 술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 머리맡에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는다. 방바닥은 어젯밤 벗어던진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다.
'아, 미쳐! 10시다!'
오전 10시 30분에 배역 문제로 작가 미팅이 있는데 지금 일어나다니! 더군다나 까다롭기로 소문난 김작가와의 미팅인데! 돌겠네 진짜! 방바닥에 널부러진 옷들을 허둥지둥 주워 입는다. 화장도 못지우고 잠들었는데...
세수는 커녕 손가락으로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빠르게 훑는다. 습관적으로 팔목에 걸고 잔 고무줄로 질끈 묶고 후다닥 달린다. 나가면서 식탁위에 있는 차키를 발견하고 손으로 스치듯 나이스 캐치!
‘아, 미치겠네. 30분 내로 도착해야하는데!’
주서영은 차에 몸을 던지고 바로 차 시동을 건다.
"부릉부릉~~!! "
엑셀을 있는힘껏 밟는다. 만약 이번 김작가와의 미팅에 늦는다면 드라마 시작 전부터 김작가에게 두고두고 끌려다닐거다. 원래도 을이지만.
배우라면 누구나 흥행보증 김작가 대본을 받고 싶어한다. 드라마 감독 역시 다르지 않다. 명성만으로 시청률이 보장된 김작가라 함께 작품을 하게 된 건 이제 겨우 드라마 메인 감독 2년차인 주서영에겐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동료 감독들이 하나같이축하와 부러움을 전했다.
어떻게 온 기회인데! 하늘이 두쪽나도 무조건 제 시간에 도착해야 한다! 주서영은 엑셀을 더 강하게 밟는다!
‘아,씨~ 오늘 무슨 행사있나?’
러시아워는 벌써 지났는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신호등은 계속 빨강색이고 주서영은 핸들에 손을 얹고 신호등을 노려본다. 초조한 듯 핸들 위에 얹혀있는 손가락을 빠르게 까닥거린다. 빨리 빨리… 주문을 하면서. 그런데 그때 갑자기…
"쾅! "
순간적으로 뭔가 번쩍한다. 동시에 주서영의 몸이 앞으로 훅 쏠리고 핸들에 머리를 박는다.
“아얏!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강한 충격으로 핸들에 부딪힌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찡그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든다.
“아… 아파…”
한손으로는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마를 문지르고 사태파악을 위해 주서영은 차에 앉은채로 두리번거린다. 그런데 주서영 차가 앞에 있던 자동차와 붙어있는 걸 발견.
‘어?! 내가 앞차를 박았어? 왜…? 난 가만히 신호대기 중이었는데?’
약간 비틀대며 주감독은 차문을 열고 나간다. 나와서 보니 주감독 차를 뒤 따라오던 자동차가 제대로 박았다.
“아… 씨… 바빠죽겠는데… 이게 무슨일이야!!!!!”
상황을 보니 주감독 차가 가운데 끼어 있다. 뒷차가 주감독 차를 박으며 밀려간 주감독 차가 앞차를 박은 거였다. 나와서 보니 나란히 세대의 자동차가 딱 붙어있다.
‘빌어먹을 바빠 죽겠는데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생기냐!’
주서영은 빨리 상황 정리하고 가자는 생각뿐이다.
“뭐죠? 이게 어떻게 된거죠?”
주서영은 뒷차 차주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 졸다가 그만…”
‘아… 저 미친…졸음 운전이라니… 그나저나 빨리 가야하는데…’ 주서영은 상대방의 말을 무자르듯 자른다. 오늘은 중요한 날, 내게는 시간이 없다!
“대충 상황 파악됐고요, 졸음 운전이라니 자초지종 더 안들어도 되지요? 지금 제가 바쁘니 일단 명함 주고받고 추후 보험 처리하죠. 다시 연락하도록 해요. 그럼 이만."
주서영은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출발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네… 죄송합니다.”
그때 주서영의 차에 박힌, 앞차의 차주가 걸어나온다. 사정 얘기하고 역시 연락처 주고받고 일단 빨리 출발해야겠다고 빠르게 계획한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뚜벅뚜벅 걸어오는 저 남자는…!
톱스타 임형석이다!!!!!!
키는 180 cm 정도,
쌍거풀 없는 날카로운 두 눈,
오똑하고 균형잡힌 콧날,
여배우들의 키스 만족도 최상이라는 입술,
새하얗고 차가워 보이는 듯한 피부,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시그니처인 무표정.
그 임형석이다. 그 임형석이 지금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배우, 나왔다하면 시청률 30%는 기본, 여배우들이 가장 파트너로 함께하고 싶어하는 남자 배우 1순위. 외모 잘생긴 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작품에 대한 이해와 배역 표현의 섬세함 때문에 드라마 작가들 역시 가장 선호하는 남자 배우다. 사극, 액션, 멜로, 느와르, 장르물이 다 되는 흔치않은 배우다.
물론 연기력과 인성은 별개다.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하는 걸로 소문이 자자하다. 키스신을 찍을 때만큼은 상대 배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서 여배우들이 가장 키스신을 찍고 싶어하는 남자배우지만 딱 거기까지! 절대 연기 이상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그래서 여배우들이 더 애간장을 태우는지도 모르지만. 알려지지 않은 건지 아직까지 그와 연기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 여배우는 없다.
주서영은 감독이 되기 전 연출팀에서 막내로 일할 때 임형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직 그대뿐'이라는 드라마를 찍을 때 임형석의 상대 여배우가 연기인 척 NG인척 임형석에게 지속적 스킨쉽을 시도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임형석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대형 소속사를 통해 간신히 임형석의 상대 배역을 따낸 여배우였다.
좋아하는 이성과의 스킨쉽을 바라는 건 당연한 우주의 법칙. 더군다나 연기라는 합법적인 이유까지 있는 마당에! 하지만 그런 상대 여배우에게 임형석은 그 찬란히 빛나는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고 차갑게 내뱉었다.
"이유없이 그만 만져. 소름끼치니깐."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빨개진 여배우는 울음을 삼키며 그 날의 연기를 간신히 마쳤다고 한다. 친절하거나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닌건 분명하다.
각설하고 방송계에 있으면서도 말로만 들어봤지 이제 메인 드라마 감독 2년차인 주서영도 톱스타 임형석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조연출 때부터 왠만큼 난다긴다 하는 남자 배우들을 많이 보아온 주서영이지만 다가오는 임형석을 빠르게 스캔한 후 중얼거린다.
‘소문보다 심하게 잘생겼는데?! 독보적 비주얼이네.’
뚜벅뚜벅 주서영을 향해 걸어오는 임형석을 바라보며, ‘정신차리자!’ 하고 주서영은 머리를 흔든다. 기에 밀리면 안된다! 걸어오는 임형석을 향해 어깨를 펴고 주서영도 당당히 다가간다. 하나 쫄리지 않는다는듯이!
팔짱낀 임형석과 주서영이 마주보고 섰다. 키차이 때문에 임형석이 주서영을 내려다보고 주서영은 임형석을 올려다보는 형국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다. 선공 날려야겠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주서영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아, 놀라셨죠? 어디 다치신 데는 없고요? 상황 보면 아시겠지만 제가 그런게 아니라 뒷차가 제 차를 박는 바람에 제 차가 밀려서 그쪽 차를 박았고...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고 실수... 아니 사고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 급하게 가봐야 하는 곳이 있어서요. 연락처 주고받고 추후 보험처리 하기로 해요 "
임형석은 말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런 주서영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160cm가 조금 안되는 주서영은 왠지 오늘따라 제 키가 더 작게 느껴진다.
‘사람무시하는 거야, 뭐야? 왜 말이 없어? 내가 너 소문 들어서 다 알고 있어~. 원래 대답 잘 안하는거! 말 짧은 거! 주눅들 필요없지!’
주서영은 고개 빳빳이 들고 앞에 있는 임형석을 올려다본다.
‘살짝 까치발이라도 들까? 키에서 너무 밀리네. 에잇! '내가 쫄 줄 알고? 눈 한번 깜박이지 않으리라! 니가 톱스타면 톱스타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나도 드라마 감독이라고! 아직 유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나저나 큰일났네. 김작가 미팅에 늦으면 안되는데!'
주서영은 안절부절이다. 그런 주서영의 마음도 모르고 임형석은 차갑게 응대한다.
"눈꼽도 안떼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주서영을 쓰윽 훑으며) 이 시간에 그 복장으로 나온 것보니 특별히 하는 일도 없어 보이는데. 당신 내가 누군지 알지? 날 알아보는 눈빛인데. 연락처 알려주면 스토커처럼 밤낮으로 문자하고 전화하려고?"
‘에…? 아…! 오늘 세수도 못하고 나왔구나. 아 쪽팔려. 하필 비주얼 최악일 때 비주얼 최고의 남자와 부딪히는구나 제길.'
주서영은 그제서야 눈, 코, 입 얼굴을 손으로 더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머쓱한듯 쓰다듬는다.
"그렇게 한다고 안씻은 얼굴이 깨끗해지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정리가 되나?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일부러 차 사고낸 거 아니야? "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지금 바빠죽겠는데! 누가 교통사고를 일부러 내요? 그 차에 당신이 탄 줄 제가 어떻게 알고요? 그리고 처음 본 사람한테 너라니요? 제가 나이가 더 많을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는 소리군"
아차. 말렸다.
"당신이 누군지는 알아요. 다행히! 전 당신 팬은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지금 몹시 바빠요. 그러니 간략히 얘기하죠. 당신 연락처를 주기 싫으면 제 연락처를 드릴테니 추후 연락주세요."
주서영은 냅다 차로 돌아가 수첩에서 빈 공간을 찾아 빠르게 제 핸드폰 번호를 적는다. 핸드폰 번호가 적힌 부분을 찢어서 임형석에게 씩씩하게 걸어간다. 팔짱을 낀 채 주서영의 행동을 차갑게 바라보는 임형석에게 연락처가 적혀있는 종이를 내민다.
"이 따위 연락처로 나더러 뭘 어쩌라고? 설마, 내가 당신한테 연락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지? 이건 신종 수법인가?"
'아, 이 귀막힌 까마귀 같은 놈이! 바빠 죽겠는데! 내가 오늘 너랑 싸우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 다행인줄 알아라'
주서영은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임형석 자켓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제가 지금 바쁘니까 일단 연락처 드립니다! 먼저 갈게요! 연락하던지말던지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후다닥 차로 돌아와 급하게 시동을 켠다.
"뭐야?! 이봐! 당신! 야! 너! 거기 안서?!"
“부웅~~~”
주서영은 이미 떠났고 임형석은 주서영이 자켓 주머니에 구겨 넣은 종이를 꺼낸다.
"엉? 이거 뭐야? 숫자를 뭐라고 쓴거야? 개발새발로 써놔서 알아볼 수도 없네. 저거 사기꾼 아니야?!"
주서영이 도망치듯 떠난 곳을 바라보며 임형석은 어이없다는 듯 서있다.
'웅성웅성'
"어? 임형석 아니야?"
임형석을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크.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전에 일단은 자리를 떠야겠군. 이 거지같은... 다음에 만나면 그냥 안둬... 아니 다시 만날 일도 없겠군.'
임형석은 재수없다는 듯 탁탁 어깨를 털며 차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