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길. 핸드폰이 방전됐다.
하필 이런 때에!
간밤에 뒷풀이 후 간신히 옷만 벗어던지고 잠자리에 들었으니 핸드폰 충전을 했을리 없다.
시계는 약속 시간인 10시 30분을 넘어 11시를 향해간다. 핸드폰이 방전됐으니 김작가 연락처도 모르고(당연히 김작가 번호도 외우지 못함) 자동차 안이라 따로 연락할 방도도 없다.
주서영은 초조함 마음에 애꿎은 신호등만 노려본다. 거의 다 왔는데…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 엑셀을 강하게 밟는다.
김작가 성격이면 벌써 돌아갔을거다. 만약 김작가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한다면 기다리고 있을수도.
드디어 약속장소에 도착.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장소를 선호하는 김자가를 위해 고급 한정식집으로 예약했다.
한정식집 앞에 던지듯 차를 세우고 주서영은 냅다 달린다. 나머지는 발렛 주차요원이 알아서 하겠지. 비싼 식당 좋다는게 이런 거지.
헐레벌떡 식당안으로 들어서며 주서영은 외친다.
“헉헉, 예약자 주서영이요! 어디로 가면 되죠? 기다리시는 손님 아직 있나요?”
단아한 한복을 입은 카운터 직원이 주서영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곱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연다.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입술이 슬로우로 움직이는 걸 바라보며 주서영은 ‘제발…제발…’ 하고 기도한다.
“아직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 직원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언제 와있었는지 주서영 뒤로 자로 잰듯한 유니폼을 입고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게 말아 올린 직원이 서있다.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주서영은 가쁜 호흡을 하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속으로 연신 다행이다를 외친다. 김작가가 있는 방문 앞까지 안내한 직원은 짧은 목례를 하고 돌아선다. 가쁜 호흡과 잔뜩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주서영은 손으로 가슴을 크게 쓸어 내린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똑똑-’
드르륵 –
미닫이 문을 열고 주서영은 재빠르게 방안을 살핀다. 식탁에 앉아있는 김작가의 옆모습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다. 이쪽에서 들어가는 인기척을 하는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김작가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다. 마치 주서영이 도착한 걸 알았다는 듯이.
“작가님… 저 왔어요…늦어서 죄송해요… 오다가 사고가 나서 그만…”
주서영은 30대 초반이고 김작가는 50대 후반이다. 나이차 때문이 아니더라도 김작가는 대본의 완성도만큼이나 완고하고 까다로운 사람이다. 어느 업계든 마찬가지지만 본인에게 주어진 일만 잘해낸다면 그리고 그 능력으로 많은 부가가치가 창출된다면 나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김작가의 경우 깐깐함도 실력으로 쳐준다.
김작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문 앞에 쫄아서 서있는 주서영을 한동안 바라본다.
머리는 흐트러져서 머리칼은 튀어나와있고 얼굴은 벌개져서 땀이 맺혀 있다. 허리춤에 들어가 있어야 할 셔츠는 옆구리부터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섰을 때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여진히 가쁜 숨을 쉬고 있다.
“와서 앉아요. 앉아서 얘기해. 나 오래 못있어요. “
“네, 작가님!”
주서영은 재빠르게 김작가 맞은편에 앉는다.
“작가님 제가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김작가는 왼손을 들어 주서영의 말을 막는다.
“주감독 다친 데는 없는거지? 괜찮다면 바로 일 얘기로 들어가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오늘 시간이 없어요.”
“아, 네 작가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서영의 빠른 대응에 김작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작가님 가장 중요한 캐스팅 얘기로 바로 들어갈게요. 여주인공은 저번 드라마에 나왔던 이지원으로 하면 될 듯하고 남주인공은… 혹시 작가님이 따로 생각해두신 배우가 있으실까요?”
주서영의 질문에 김작가는 의아한 눈빛을 보낸다.
“아니, 따로 생각해둔 남주인공이 있냐니? 뭘 물어? 당연히 임형석이지. 외모, 연기력, 인기, 파급력… 현재 임형석이 탑 아닌가?”
“네? 임형석이요?!!!!”
주서영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아이고 깜짝이야! 주pd 왜그래? 아니 그럼 내가 최고 배우 두고 누굴 선택할 줄 알았어? 나 김인아야. 최고 아니면 나도 싫어. “
“아니, 작가님이 현재 최고의 작가님인거 누가 몰라요. 저 역시 작가님이 저와 함께 해주신다고 연락주셨을 때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어요. 하지만 작가님, 갑자기 임형석이라니요. 임형석 배우 스케줄 확인도 못했어요. 말씀대로 요즘 워낙 대세라 cf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을거고 해외 팬 사인회도 있을 거구요. 다른 드라마나 영화 준비 중일수도 있어요. 저희 드라마에 합류하기엔 이것저것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에요.”
주서영은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스케줄 확인은 고사하고 임형석 역시 자기 마음에 드는 대본이 아니면 절대 연기하지 않는 배우다. 작가 명성이 아무리 자자해도 대본 선택 기준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다. 까다로운 작가에 더 까다로운 남자 주인공과 새 드라마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문제는 둘 다 자기분야에서 탑이라는 거다. 즉 양보를 할 생각들이 전혀 없는 인간들이다. 굳이 오전의 주서영과의 사고가 아니더라도 임형석이 지금 스케줄이 될 리가 없다. 즉 본인 때문에 될 일이 틀어지진 않을 거라며 애써 스스로 위안을 하는 주서영이다.
“주감독, 이번에 내 대본 읽어봤지? 그 많은 격정 멜로신과 액션신, 임형석 아니면 누가 해? 임형석만큼이나 키스신 가슴 설레게 뽑아내는 배우 있어? 이 나이에 보는 나도 설레더만.”
“아니 작가님 왜 없어요. 타채널 드라마에 나왔던 김민호 배우도 있고 이번에 영화 호평받은 이수현 배우도 있잖아요. 연기도 잘하고 마스크 좋고 요즘 대세구요. 나왔다하면 홈런입니다.”
“뭐? 김민호? 이수현? 걔네들이 내 대본이 가당키나 해? 걔네들은 아직 멀었어! 지들 멋있게 나오는 대본이나 하려고 하지 임형석처럼 대본 보는 안목들도 부족해. 임형석이 까다로운듯해도 선택한 작품들 봐. 어떻게 저런걸 선택했지? 하는 것들도 잘만 하잖아. 무조건 임형석으로 가. 임형석 이 드라마 안들어오면 나 주pd랑 이번 작품 같이 못해."
“네? 작가님!!! 너무 하신거 아니에요? 임형석이 못하게 된다해도 제 탓이 아니잖아요!”
“아니, 감독이라는 사람이 작가의 의도를 미리 몰랐다는게 말이 되나? 이심전심인줄 알았더니만 내가 주감독을 너무 높이 평가했네. 임형석 이번 드라마에 합류시킬 수 있을 때 연락줘요. 더 이상 얘기는 의미없겠네. 나 먼저 가.”
본인 할말만 다다다 쏟아붇고 김작가는 바로 일어선다. 당황한 주서영은 급하게 따라 일어서지만 김작가는 이번에도 한 손을 들어 그런 주서영을 제지하며 말한다.
“주감독, 프로끼리 이러지 말자고. 내 의견 전했으니 연락줘. 나 주감독한테 악감정없어. 이번 작품, 좋은 배우들과 같이 잘 해보자고.”
“아… 작가님…”
걸어나가는 김작가를 멍하니 바라보던 주서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빌어먹을… 임형석… 어쩌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드라마 메인 감독으로 김인아 작가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던가. 이걸 다른 감독에게 넘길 순 없다. 이게 겨우 신입 드라마 감독인 주서영에게 어떤 기회인지, 얼마만큼 잡기 힘든 기회인지, 방송계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올라온 주서영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지? 이럴줄 알았으면 아침에 좀 잘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