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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언서 Nov 20. 2023

농부의 성적표

가을걷이가 막바지다.

 가을 일이 대충 마무리되니 바람도 불고 비도 오고 첫눈이 내리고 추워지기 시작했다. 가을걷이는 끝나 가지만 농부의 걱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바로 1년 농사의 성적표와도 같은 추곡수매도 있고 콩도 털어야 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도 해야 한다. 그중 추곡수매는 해마다 걱정이다. 쌀값의 변동에 따라 수매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올해에는 얼마나 인상이 될까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수매를 하는 벼는 등급을 잘 받으려면 정부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건조해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요즘은 추수하고 건조하는 일을 모두 장비로 하니 일손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 같으면 벼를 베는 일만 해도 수 일이 걸렸다. 탈곡하고 말리고 풍구로 부쳐서 40kg 매상 포대에 담아 저울로 무게는 맞춰야 하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추곡수매에서 등급을 잘 받으려면 이만한 수고는 감내해야 한다. 

 농부의 걱정은 한도 끝도 없다.

 농사를 잘 지어도 걱정 못 지어도 걱정이다. 다른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매년 껑충껑충 뛰어도 쌀값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쌀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밥상이 아니라 식탁으로 변하면서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닌 간단하게 차려진 빵이나 야채 등으로 식탁에서 해결하고 만다. 그러다 보니 밥과 찌개나 김치를 먹는 세대는 점점 줄어들고 아침을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쌀생산량 대비 소비량이 줄어들어 가격 상승 요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할 수도 없다. 농업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농업과 농민을 위한 직간접적으로 각종 보조금이나 농업 직불금 등을 지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엊그제는 추곡수매를 했다.

 예전 같으면 추곡을 수매하는 날은 잔칫날이나 다름없었다.

 새벽부터 우마차에 볏가마를 가득 실고 수매장으로 가기에 분주했다. 일찍 도착해서 마을별로 볏가마를 쌓아 놓은 순서이기 때문에 서둘러 가야 하는 것이다. 농부는 일찍 나오느라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오다 보니 수매장 주변 막걸리 집은 덩달아 분주해진다. 

 추운 날씨에는 막걸리를 따뜻하게 데워서 먹는다. 

 수매장에 볏가마를 내려놓은 농부는 허기를 달래고자 하나 둘 막걸릿집으로 향한다. 수매 관련 공무원이나 검사관이 나오기도 전에 일찌감치 시끌벅적한 막걸릿집에서부터 수매가 시작된 것이다. 따뜻한 막걸리 한 사발에 뜨끈한 돼지고기 김치찌개 한 술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수매장은 하루종일 분주하고 어수선하다. 이른 아침부터 허기를 달래며 시작된 막걸리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어떤 사람은 수매 등급을 잘 받아 기분이 좋지만, 또 다른 누구는 등급을 잘 못 받아 서운한 마음에 막걸리 한 사발로 위안을 삼는다. 

 이렇듯 농부는 성적표와 막걸리 사발을 손에 쥐고 호탕하게 웃는다.

 수매가 끝나면 등급에 따라 가격에 차이는 있지만 농부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수매가 유일하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목돈이 들어오기도 전에 농부는 이미 쓸 곳이 다 정해져 있다. 외상값도 갚고 농사 도구도 새로 장만해야 하고 오랜만에 고기를 사서 식구끼리 푸짐하게 먹어야 한다. 성적을 잘 받았으면 잘 받은 대로 못 받았어도 못 받은 대로 목돈이 들어온다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면 내년에 잘하면 되는 것이지 굳이 결과에 연연하는 농부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시절 농부의 성적표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오랜만에 수매장에 나갔다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고 2 ~ 30년 전 추억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은 똑같지만 트럭이나 트랙터로 싣고 온 800kg 톤백을 지게차로 옮기고 전자저울에 무게를 달고 수분측정기로 검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요즘은 참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시끌벅적한 막걸릿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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