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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J Jan 26. 2024

나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가?

7년의 수험생활을 끝으로 나는 내 행복을 등대삼아 살아가기로 했다

 나의 꿈은 의사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드라마 ‘허준’을 보며 아픈 사람들을 돕는 모습이 뇌리에 박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한데, 학창시절의 나는 맹목적으로 의사만 되고 싶어 했다. 아마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 말고도 사회적인 위치, 경제적 풍요 등의 요인도 나의 맹목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 


 나의 성적은 학창시절 내내 적당한 상위권이었지만 의대나 한의대를 갈만큼의 성적은 되지 않았다. 고3때 수능을 보고 의대를 지원할 성적이 되지 않았지만 의사를 꿈꿨던 나는 떨어지면 재수하자 라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한의대 원서를 쓰고 재수를 하게 되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처절하게 수험생활을 보냈지만 재수 후에도 성적은 비슷했고, 같은 방식으로 삼수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시간은 많았지만 불안함과 조급함이 커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공부했던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3번째 수능을 볼 때, 1교시 언어역역을 보는데 시험지가 하얗게 보였다. 극도의 긴장과 욕심으로 인해 나는 평소보다 1~2등급 낮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대학 입학을 미룰 수 없어 성적에 맞추어 원서를 쓰기로 했다. 전공은 문과적 성향이 큰 편인 나에게 잘 맞을 거라며 친오빠가 추천해준 산업시스템 공학과로 지원했다.     


 대학교에 가서는 동기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나와 같은 나이인 동기들은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 나이 때 할 수 있는 건 하자는 마음으로 MT도 가고 과모임에도 나갔다. 그렇게 2~3달이 지나자 또 허기진 마음이 들고 오랜 꿈이 고개들 들었다. 나는 또 수능을 보고 싶어졌다. 그런 나에게 중학교 친구 한명은 “수능중독 아니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4번째 수능을 쳤고 결과는 딱히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수능을 또 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     


 그 당시 약학전문 대학원에 가기위한 PEET 시험이 있었고, 주변에서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 의사가 아니라면 그와 비슷한 계통인 약사도 괜찮겠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시험에 도전하게 된다. 대학교 2학년 수료 후 PEET 성적으로 약학전문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고, 약학 전문대학원에 가서 나머지 4년을 채우면 되는 2+4 제도였다. 대학교 2학년 학교를 다니며 PEET를 치고 성적이 좋지 않아 그 다음해는 휴학 후 학원에 다니며 준비했다. 몇 년 째 지속되는 시험 준비에 공부가 지긋지긋했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PEET 재수 성적은 기대보다 높지 않게 나왔고, 나는 마음을 부여잡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PEET는 화학, 유기화학, 생물, 물리 이렇게 4과목을 보는 시험이었는데, 나는 특히 생물이 재미있었다. 내가 꿈꿨던 의사와도 연관이 가장 많은 과목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험 준비한 지식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편입에도 원서를 넣었고 생명과학과에 합격했다. 정말 오랜만에 얻게 된 성취감이었다. 2015년 나는 3번째 PEET 시험을 봤다. 성적은 또 기대 이하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 성적을 확인 한 나는 갑자기 공부에 대해 너무나 큰 배신감이 들었다. 7년 동안의 끊임없는 시험 준비기간 동안 나의 우선순위는 항상 공부였다. 정말 지독한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인생의 방향성을 바꾸고 싶어졌다.     


“이제 짝사랑 멈출래. 내가 성공을 위한, 목표를 위한 도구인가? 나한테 너무 미안하다. 이제는 진정 내가 행복해 하는 것만 쫒으며 살아갈거야.”      


 끊임없는 시험 준비를 하며 나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시험 준비가 아니었기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나의 하소연하기도 어려웠고, 또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 스스로도 싫었다. 그런 마음을 보이고 얘기하면 내 자신이 더 힘들어 질 것 같았다. 나는 긴 수험 생활동안 공부가 끝나고 지쳐서 집에 오면 거의매일 밤 헤드폰을 쓰고 전자피아노에게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내 마음들을 쏟아내곤 했다. 피아노는 나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 시간동안 나는 진정 행복했다. 나는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우리학교 사이트에서 작곡과 학과장님께 메일을 보냈다. 

“작곡과 부전공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교수님께 나의 상황과 음악에 대한 진심을 담아 메일을 보냈고 절차에 따라 지원하여 작곡과 부전공을 하고 작곡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 목적을 위해 나를 도구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나에게 종종 묻는다. 


“어떨 때 행복해? 어떨 때 힘들어? 내가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 너에 대해 알려줘.”

나는 그렇게 내 행복을 등대삼아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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