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내게 말한다.
네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 다 네 복이야.
그 말에 멋쩍어 다들 이 정도의 애정은 받고 있지, 나는 그걸 매번 곱씹는 것 뿐이고. 라고 답했다. 친구가 인상을 쓴다. 아니, 내 주위에는 그 정도의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건 특별한 복이지. 하고 다시 한번 말한다.
알고 있다. 내 복인 것을. 하지만 나라고 매번 사랑만 받으며 자란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조금 모자란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지켜본 증인으로 엄마가 있다.
이상하게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지 않았다. 저 사람은 더 좋은 게 있네, 좋겠다. 늘 그렇게 끝났다. 대신 비슷한 노력을 하고도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사람은 부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부러움이 다였다. 못나게도 화살을 늘 내게 돌렸다. 내가 더 노력을 안 해서 일까. 나는 느림보 거북이라, 저 사람보다 더 잰걸음으로 걸어야 따라잡을 수 있는 거구나, 태생이 다른 거네, 하고.
나는 쉽게 양보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든 말든. 내 몫으로 주어진 간식을 누군가가 쳐다보면, 너 먹을래? 하고 주는 사람. 착한 척이 아니라, 그냥 내가 그랬다. 상대방이 맛있게 내 몫의 간식을 먹는 것을 보고, 행복했으니까. 좋은 것이 운 좋게 내 손에 들어와도, 친구가 필요하다 하면 주곤 했다.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더 좋으니까. 그 행동들은 쌓이고 쌓여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언젠가는 행복으로 또 언젠가는 상처로 돌아왔다. 이 행동이 혹시 모자란 것인가 라고 인지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된 후였다.
친구의 생일을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 케이크에 불 안 붙였어? 그럼 해야지! 하며 잘 떨지 않는 호들갑을 떨며 밤늦게 케이크를 구하러 다녔다. 그렇게 모두의 생일을 챙겨주고는 정작 내 생일에 빈손으로 돌아오던 어린날도, 메신저 알림이 뜨지 않으면 모두에게 잊혀지는 날도, 사는 게 바빠 축하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다. 엄마는 그것을 보며 한 소리했다. 주변을 그렇게 살펴놓고, 보살핌 받지 못한다고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상대의 웃는 얼굴이, 가끔 내가 있어서 다행이란 말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말이 내게 올 때면, 다시 나는 무엇을 상대에게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다음에는 더 큰 것을, 다음에는 더 필요한 것을 줘야지. 그러려면 계속 널 바라봐야지. 다시 그렇게 원점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여전히, 나는 내 몫을 챙기는 것보다 남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행복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은 내가 뿌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며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게 그날의 풍경을 보내며 내 안녕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며칠 전 친한 동생이 말한 것처럼, 내가 뿌린 다정들이 이제야 피어나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