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릴 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왜 나한테 저렇게 이야기하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나와 같지 않음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바라보았던 시간들. 다행히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은 크면서 조금씩 정리되었고, 이제는 많은 것들을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또 이해하려 노력한다.
대학 시절 우리는 함께였다. 13명이서 다 같이 모여 수강신청을 하고, 한 명이 들어오지 못하면 새로 들을 강의를 찾아 모두 함께 옮겼다. 그게 힘들면 그룹을 두 개로 나누어 신청했다. 그렇게 몰려다니기 좋아했다. 13명이나 되니, 매달 누군가의 생일이었고, 그래서 매 달 파티를 했고,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 밤새도 깨워줄 사람이 있었고, 방학이 되면 함께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학교에 아무 시간에 가도 밥 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수업을 듣다가도 배고프다 하면 같이 수업 째고 밥 먹으러 나가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학교 생활에 안정감을 주었다. 나의 동기들이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각자의 경조사를 챙기면서 떠들썩했던 우리의 동기 카톡방은 점차 조용해졌다. 대학시절 새벽까지 잠 안 자고 쉴 새 없이 네이트온으로 떠들 던 아이들은 이제 없었다. 그나마 연말 모임은 꼭 하는 편이었는데, 그것도 해가 바뀔수록 시간 맞추기가 어렵고, 각자의 이유가 생기며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모두가 모이지 않는 모임은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도 그 동기방은 유지되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도 그 방을 나가지는 않았다. 암묵적 룰처럼.
하지만, 어느 날 한 명이 나갔다. 삼수생인 동기 오빠였는데, 우리는 그 흔적을 보고 꽤나 섭섭해했던 것 같다. 아무 말도 없이 그 방을 나간 것에 대하여.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고, 그냥 서운해만 했다. 오빠에게 우리가 이제 아무것도 아닌가 보지. 오빠에게 더 중요한 게 생겨났나 보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멋대로 우리끼리 받은 상처만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십 대의 시끌벅적한 삶을 지내고 있을 때 그는 삼십 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내가 서른 살을 넘기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저리 치이고, 여기저기 데이면서. 우리보다 앞에서 걸었구나. 그래서 작아지는 날에는 아무에게도 연락을 할 수 없었겠구나. 여유가 없을 때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쓸 수도 없었겠구나. 좋기만 했던 시절의 사람들과는 여전히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으니, 멀어지게 되었겠구나.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섭섭했던 일이, 이제는 안쓰럽고 나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로 변한 것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간다. 벌써 10월의 마지막이다. 나는 앞으로 또 어떤 것을 경험하고,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