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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 로지 Dec 11. 2022

부디 당신에게 결핍이 있기를

다정으로부터 1을 브런치 북으로 묶으며 마지막 글에는 그런 문장을 썼었죠. 저는 결핍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는 동안 결핍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수 있는 순간도 없으니, 부디 당신에게 결핍이 있어 내가 마음 언저리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구요.


여전히 저는 인생에서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혼자서 잘하고, 무엇이든 상황에 맞아떨어지고, 흔한 가위바위보를 해도 늘 이기고, 로또를 사도 적어도 5등에 당첨되고, 우산을 들고 가지 않은 날 퇴근길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늘 따라오고, 그래서 그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는 사람 말고.


어쩐지 노력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고, 경품 추첨에서 꽝아니면 참가상 밖에 받아 보지 못했고, 로또는 매번 5등도 되지 않아 이제 포기한 지 오래고, 비 온다 해서 힘들게 우산을 들고 갔는데 하필이면 기상청의 예보가 맞지 않는, 가끔은 내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인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요.


며칠 전 PD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작품들을 나열했어요. 사람 냄새나는 작품들이죠. 그리고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조연의 비중이 크다는 거예요. 조연이 주연만큼 등장하고, 또 어느 화에서는 주연보다 더 포커스가 맞춰지는, 그런 작품들. 저는 조연을, 주연만큼, 가끔은 주연보다 더 좋아합니다.


저 역시 인생이 안 풀릴 때, 왜 내 인생인데, 주연이 아닌 것 같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하지만 주연답게 일어나지 않고, 주연답지 않은 음악을 선곡하고, 주연 답지 않게 예쁜 식사를 하지도 않고, 주연답지 않은 말투를 써도. 아무도 저를 보지 않고, 제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내 인생에서 내가 주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하자고 하는 바를 모르겠다고요? 이런 이상한 글을 쓰는 이유는, 연말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연말에는 한 해를 돌아보며, 올 한 해는 어땠고, 목표한 바 중에 몇 개를 이뤘고, 몇 개는 이루지 못했고, 그러니 내년엔 어떻게 보낼 것이고, 이런 생각들을 하잖아요.


저는 30대 이후로,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20대에는 철저한 계획러였지만요. 그 강박을 버리고 싶기도 했고, 사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사건들을 너무 많이 마주쳤어요. 그러니 그냥 물 흐르듯 흘러가 봐라, 내가 지켜볼게. 하고 내 인생을 지켜봅니다. 마치 제 3자 처럼요. 그래서 남들이 하는 연말 결산이나,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아요. 이런 대책 없는 삶도 있다고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자 이제 이 두서없는 글의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조금 대책 없는 주연처럼, 저는 내년도 그렇게 살 거예요. 원래 주연은 인생이 망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닥쳐도 어떻게든 극복해가잖아요? 총 몇 발을 맞아도 혼자 안 죽던데요? 그러니, 그렇게 살아요. 죽지 않는 주연처럼. 대책 없이 굴어도 삶이 어떻게든 흘러가는 주연처럼. 결핍을 마구 만들면서요. 결핍이 있는 당신을 제가 마구 좋아할 테니까요.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시길 바라며.

오늘도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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