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그네 의자, 낙서가 빼곡한 오렌지색 식탁보, 눈꽃빙수…… 카페는 카페인데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곳이라기보단, 카페에 막 입문하는 청소년들이 집결해 시끌시끌하게 수다를 떨던 곳. 그곳은 학교가 파한 십대 여자아이들의 성지였다.
그곳에는 생크림 토스트 무한 리필이라는 사뭇 독특한 서비스가 있었다. 따로 주문하는 메뉴는 아니고, 음료나 빙수를 시키면 한 접시씩 나오는 디저트인데 리필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곱씹어보면 꽤 파격적인 시스템이다. 무한 리필이라고 하면 공짜 빵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악용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다행히 그런 일이 많이 없었는지(전혀 없진 않았을 거다) 내가 가던 시기에는 무탈하게 토스트 리필 서비스가 유지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생크림 토스트는 접시에 구운 식빵 네 조각(두 장을 각각 반으로 가른 조각이었다)과 작은 생크림 종지가 나왔었고, 작은 숟가락으로 생크림을 발라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식빵 하면 딸기잼 아니면 사과잼이 전부였던 나는 생크림을 발라 먹는단 소리에 어쩐지 거부감을 먼저 느꼈던 것 같다. 아니, 식빵이랑 생크림이 무슨 조합이야? 물론 각각 다 맛있는 것들이긴 한데 굳이 이 둘을 같이 먹을 이유가 있나. 별로 맛없을 것 같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혁신적인 서비스를 소개하며 같이 가자고 꼬시던 친구의 말에 슬쩍 따라갔다.
그날 운 좋게도 곰인형이 함께 있는 그네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와 친구는 눈꽃빙수와 오레오빙수 사이에서 씨름하다 결국은 오레오빙수를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빙수가 나왔고, 그 생크림 토스트도 함께였다. 일단 빙수는 제법 내 취향이었다. 초코 아이스크림, 초코 시럽, 바삭한 마시멜로가 드문드문 보이는 오레오 시리얼은 다 좋아하는 것들이었으니까. 물 얼음인 게 조금 아쉬웠지만 오히려 우유 빙수가 드물었던 때라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분명 집에서도 해 먹을 수 있는 맛이었는데, 묘하게 맛있어서 그 뒤로도 자주 사 먹게 됐다. 재료는 모두 슈퍼에서 살 수 있는 정도의 퀄리티였기에 한번은 집에서 그 맛을 보겠다고 초코 아이스크림, 오레오 시리얼, 초코시럽, 얼음을 가져다 직접 만들어도 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 오레오 빙수를 먹을 때처럼 흡족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오레오 빙수는 나의 ‘최애’로 등극하여 (같이 간 사람과 원만히 합의만 된다면) 갈 때마다 그 메뉴를 먹었었다.
그리고 생크림 토스트는 그냥 생크림과 토스트였다. 생크림이랑 밍밍한 빵의 조합이라 허니 브레드도 잠깐 떠올랐는데, 그 촉촉하게 적셔진 빵에 둘러진 카라멜 시럽과 초코 시럽의 맛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하지만 빙수만 먹기 아쉽고 씹을 것이 조금 필요할 때 한입 먹으면 알맞았다. 무엇보다 공짜로 주는 디저트니 불평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나는 입도 짧아서 딱히 리필 욕구가 들지는 않았는데, 친구는 리필을 원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다들 한 번씩은 리필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딱 한 번 토스트를 리필 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우리 둘 다 한 소심 하는 아이였다는 것이다. 빙수를 주문하는 것까진 어찌저찌 했지만 이건 달랐다. 어쨌든 돈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심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대가 없이 하는 요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결정을 내려놓고 괜히 딴 얘기를 하며 ‘그 순간’을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곳에 먼저 와 본 선배인 친구가 주방으로 걸어가 토스트 리필을 말했다. 선배라곤 했지만 사실 그 친구도 과거에 같이 왔었던 다른 친구가 ‘리필해 주세요’라는 말을 도맡았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을 터다. 조금은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온 친구의 손엔 토스트가 얌전히 놓인 접시가 들려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온 생크림 토스트에 손도 안 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 조각을 먹었다. 기분 탓인지 처음 먹을 때보다는 맛있었다.
그런데 검색 중에 이제는 생크림 토스트 리필이 유료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토스트 굽는 것도 일인데 무료로 무한 리필 해 준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기는 했다. 진작에 그랬어도 납득이 간다. 내가 정말 놀란 부분은 아직도 지점이 몇 군데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몽땅 사라지고 남아봤자 한두 군데일 거라고 혼자 생각했는데, 지도를 죽 훑어보니 드문드문 있었다. 어쩐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남아 있구나. 오로지 그 카페만을 위해 갈 만한 거리는 아니어서 과연 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냥 어디라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지금이야 많이 문을 닫았어도 예전에는 이런 카페들이 전국 번화가 곳곳에 있었는데, 이름은 조금씩 달랐던 것 같다. 내가 갔던 곳의 이름은 ‘○소’였지만 ‘캔○아’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터다. 나는 캔○아에 가 본 적이 없지만 눈꽃빙수와 생크림 토스트와 흔들거리는 의자가 있는 걸 보면 캔○아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뭐, 부르는 이름이 다르면 어떤가. 거기 깃든 추억이 중요한 거지. 나는 오렌지색 식탁보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몇월 며칠 누구누구 왔다 감’을 적었던 일, 주구장창 오레오빙수만 시키다가 치즈떡볶이를 시켜보고 실망했던 일(그러나 그 뒤로 몇 번 더 사 먹었다), 아예 미트 토마토 스파게티에, 쉐이크에, 이것저것 시켜서 식사를 했던 일도 있다. 그 가격이면 더 맛있는 데서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알게 모르게 그곳을 참 좋아했나 보다.
다시 먹으면 맛있게 먹지는 못하리란 걸 알지만, 괜스레 생각이 나고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한번은 찾아가고 싶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 시간을 갖기 위해 ‘카페’라는 공간에 앉아서 음료를 한 잔씩 시켜 놓고,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즐기던 그때. 비록 작고 사소할지라도 그 경험 하나하나가 마치 엄청난 성취처럼 느껴지던 그 마음, 새것 같은 마음이 어쩌면 그리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