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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Apr 24. 2023

감기와 얼큰한 소고기 쌀국수




감기에 걸렸다. 목이 따끔거리고 마른 기침이 터져 나온다. 콧물 때문에 숨쉬기가 어렵다.


몸이 아플 때 먹어야 하는 것은 약이지만 먹고 싶은 것은 뜨끈한 국물이다. 푸근하게 온몸을 덥혀주는 국물,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국물이 몸을 낫게 하지는 않지만 조금 이완시키는 효과가 있으니까. 기력이 없어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털레털레 쌀국수집 계단을 올라간다. 매운 것을 꽤 못 먹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얼큰한 맛으로 먹을 요량이다. 막힌 코를 확실하게 뚫으려면 평소의 맑은 국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인기가 있는 집이지만 점심시간 회전율이 나쁘지는 않은지 금방 자리가 난다. 주문은 착석 전 기다리면서 이미 해놓은 상태. 물을 홀짝이며 먼저 주문한 사람들의 쌀국수를 미련 넘치게 바라보기를 반복하니 음식이 나온다.




짬뽕처럼 붉은 빛깔에 얼큰한 냄새가 느껴지는 국물이 시각을 마구 자극한다. 처음에는 예상을 뛰어넘는 매움 그리고 뜨거움에 주춤하게 된다. 국물을 쉽사리 떠먹지는 말고 둘레의 숙주와 청경채만 집어 먹으며 온도가 내려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너무 뜨거우면 안 그래도 매운맛이 더 맵게 느껴지고, 음식 본연의 맛도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트로 나온 달콤하고 바삭한 고구마롤, 튀김 만두 넴(혹은 짜조)을 먹고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다 먹으면 안 된다. 중간중간 매울 때 한 입씩 먹어줘야 입안을 진정시킬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얼얼하지만 한창 뜨거울 때에만 많이 맵고, 따뜻한 정도로 식으면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운 수준이다. '이 정도는 얼큰하다'며 자기 최면을 걸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사실 이러나 저러나 미각성 비염이 있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오트0빈의 역할을 한다.


적절히 식은 이때부터 국물의 진가는 드러난다. 깊고 풍부하게 우러난 국물의 맛이 착착 감겨오고, 소고기, 숙주, 쌀국수를 함께 머금어 씹을 때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 맛있는 국물이라 이집의 맛이 진정한 베트남 쌀국수 본연의 맛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감기로 시름하는 목구멍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따끔거리는 국물이 아니니 먹다가 기침할 일도 없다. 감기에 좋은 음식이 아닐 수 없다.


얼마간 기운이 차려져 코로 숨을 쉬며 가게를 나온다. 갈비탕이나 맑은 국물 쌀국수를 먹었다면 더 편안하게 원기회복을 했을 거란 생각이 스치지만 식사 자체는 만족스러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매몰비용에 대한 기회비용을 따지기 시작하면 스트레스만 더하는 길임을 지독하게 잘 알고 있다. 나에게 심적인 고통을 주는 가장 큰 원인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는 것인데,선택의 결과로 이미 벌어진 일과 계속 생각만 하고 있을 시간에 실행했다면 좋았을 일들이 무수히 많고 그것이 후회를 남긴다. 행동하고 나서 나답지 않게 괜한 짓을 했다며 후회한 적도 많았으나 결국 그것도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반면교사가 되었다. 두려움에서 촉발되어 연쇄되는 생각, 저 말에 어떤 의미가 감추어져 있을까 하는 생각, 과거에 대한 반대 가정으로 시작되는 생각을 끊어내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다른 국물 요리에 관한 생각을 접어둔다. 대신 내일은 돈가스를 먹을지, 샌드위치를 먹을지, 김치찌개를 먹을지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내 해도 해도 즐거운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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