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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Jul 10. 2023

존재를 위협받더라도 너에게 닿고 싶어

: 엘리멘탈(2023)


픽사 애니메이션은 거의 좋아한다. <토이스토리>, <업>, <몬스터 주식회사>, <라따뚜이>, <카>, <인사이드 아웃> 등등... 스토리가 뻔하지 않고, 통통 튀는 설정과 살아 있는 캐릭터들이 픽사의 장점이다. 아동 타깃 애니메이션은 고증이나 캐릭터 태도 변화, 문제 해결 방식에 있어서 의아한 부분이 꼭 생기는데 픽사는 그런 면에서 가장 흠잡을 데 없고, 훌륭하다고 생각해 왔다. 한마디로 스토리가 탄탄하다는 것이다.


이번 <엘리멘탈>은 캐릭터 설정에 충실하다면 충실한 문제 해결 방식이 돋보였고, 스토리 자체는 평이했으나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앰버와 웨이드가 한 공간에 밀폐되어 갇혀 있게 되면서 웨이드가 증발해 버린 뒤의 전개다. 물이 가까스로 몇 방울은 남아 있을 거고, 거기다 물을 더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살려내겠지 생각했는데 전개가 조금은 달랐다. '울음 참기 대회' 때 했던 이야길 반복하며 웨이드를 울게 만듦으로써 원 상태로 돌려놓다니! 감정이 풍부해 눈물이 많다는 캐릭터성을 다시금 가져온 것인데 이걸 부활(?)의 장치로 삼을 줄이야. 웨이드가 돌아오는 사실 자체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지만, 우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고인 물이 후두둑 쏟아지는 모습은 기발한데 웃기기까지 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좋았던 건 앰버가 유리공예에 능하다는 설정이었다. 불이라는 캐릭터 특성에 유리공예의 원리를 결합해 똑똑하게 활용했다고 느껴서다. 앰버는 모래를 불로 가열하고, 용암처럼 녹아내린 것을 빠르게 빚어내 무너진 운하의 벽을 막는 것을 성공하는데 굳어진 그 유리의 조형미가 뛰어나다. 웨이드는 그 재능을 칭찬하고 앰버도 자신의 예술적 능력이 뛰어나며, 그에 대한 흥미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상반된 성질을 가진 두 캐릭터가 만나 이루는 조화로운 화학 반응'이란 테마에만 집중했다면 너무 클래식했을 텐데 불의 특성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한 게 재미있고, 관성적이지 않았다.


뜨거운 불덩이를 꾹 참고 먹는 웨이드(매운 김치 먹는 외국인 사위를 연상케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라든가 앰버의 빛 때문에 눈밖에 안 보이게 찍힌 네컷 사진, 배수관에 껴서 몸매가 망가졌다고 근육질의 몸을 통통한 젤리 같은 몸으로 되돌려놓는 웨이드, 울음 참기 대회를 할 만큼 감정이 풍부한 웨이드의 가족들, 연애 사실을 아빠에게는 비밀로 해 주는 엄마... 재밌는 장면도 많았다. 감독이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보니 한국 정서에 맞는 유머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 같다. 앰버 아버지의 가게도 한국 고깃집에서 보이는 배기관에서 착안해 디자인했다고 한다. 문명특급 피터 손 감독 영상에 나온 내용이다.


앰버가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믿고 있던 이유는 부모의 강요가 아니었다. 가업으로 내려온 일이 당연히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리라는 관습적 사고(부모님과 앰버 모두에게 해당), 부모님의 한결같은 기대와 그로 말미암은 의도하지 않은 압박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동안 그래왔기 때문에... 아슈파도 어린 시절부터 우리 불 종족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교육받았으니 선조에 대한 공경심+전통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해 왔는지, 정말 가게 일을 좋아해서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앰버의 부모님은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정해놓은 길대로 자식을 억압하는 부모가 아닌, '가업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건 너'라고 말해 주는 부모님이었다. 그 이상적인 받아들임이 참 좋았다. 가업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도구적 존재로 보는 것도 아니고, (의도했든 아니든) 압박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자식이 버겁다고 하니 존중해 주는, 딱 있을 법한 좋은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웨이드라는 캐릭터는, 기대되어지는 역할과 자신이 원하는 역할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줄도 몰랐던 앰버가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좋아하는 것을 좇도록 돕는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채 이별을 맞고 후회했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앰버에게 조언해 주기도 하는, 촉매 역할이다. 웨이드의 장점은 유연하다는 것. 물다운 속성이다. 경기장에서도 사람들과 곧잘 어울려 힘찬 파도타기 응원을 이끌어내고 '서로 다른 종족이기에 우린 어울릴 수 없다'는 기성관념에 적극적으로 부딪히며 앰버를 설득한다. 다분히 설계된 굴절과 반사를 통해 사랑의 점괘를 완성하며 긍정적인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습이다.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사족이 필요없는 것이 그의 말이 가진 힘이다. "우리가 안 되는 이유는 백만 가지지만 나는 널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둘을 이어줄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직관적이고, 투명하고, 마냥 순진해 보일 수도 있지만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아무리 밀어내고 일부러 모질게 굴어도 다시 다가오는 것도 뾰족한 말 속에 숨은 진심을 알아볼 수 있어서겠지. 외관은 좀 친근하고 어리숙한 느낌이지만 정말 멋있는 캐릭터다.


앰버와 웨이드의 사랑에 특별한 서사가 있는 건 아니다. 서로 반대되는 매력에 본능적으로 끌렸을 뿐이다. 하지만 물과 불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역설이 이 로맨스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다. 앰버를 가까이 하면 웨이드는 증발해 버리고, 웨이드와 닿으면 앰버의 빛은 꺼져 버린다. 더 가까이 했다간 실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용기 내어 뛰어든 두 원소가 빚어낸 순도 100%의 사랑. 그것이 <엘리멘탈>이 선사하는 화끈하고 또 청량한 화학 반응의 에센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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