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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Mar 02. 2024

족발의 재발견과 막국수



사실은 예전부터 족발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고기대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내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고기 요리, 족발. 쫄깃쫄깃한 비계 부위는 씹는 재미 덕에 겨우 먹었지만, 돼지 누린내가 유독 심하게 느껴졌던 음식이 바로 족발이었다. 운이 나빴던 건지 갓 나왔배달된 것이든 내가 만난 족발들과 '누린내'는 상시 함께였다. 퍽퍽함은 덤이었다. 실제로 족발은 부위상 특유의 냄새가 있기 때문에 요리할 때 이물질이나 기타 불순물을 잘 제거하지 않으면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데, 먹는 족족 그랬다. 표본은 작지만 부정적이기만 한 데이터가 축적되어 버린 족발을 맛있게 먹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잘 만들어진 족발을 먹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식사로 먹게 된 족발은, 윤기가 르르 돌면서 따끈한 것이 예의 족발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인상을 주었다. 정교하게 썰린 한 조각을 집어들어 먹어 보니 지방층 부위가 매우 쫀득하고 부드러우면서 살코기는 촉촉했다. 달큼한 양념으로 버무려진 무김치를 얹어 먹으면 지방층으로 말미암은 느끼함을 잡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비빔 막국수와의 궁합은 냉면과 숯불갈비를 능가하는 환상적인 맛을 보여주었다. 풍부한 콜라겐 덕에 기름기로 번드르르한 족발을 매콤새콤한 비빔 막국수로 싹 감싸준 다음, 입안에 넣으면 톡톡 쏘는 양념을 빨아들인 탱글한 메밀면이 고기와 만나 행복감을 주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족발은 맛있는 음식이라는 개념이 내게도 자리 잡았다. 조건이 달려 있기는 하다. 누린내를 확실히 잡고 촉촉하게 만든 것이어야 함은 기본이고, 핵심은 '비빔 막국수와 함께 할 것'이다. 제아무리 촉촉하고 맛있는 족발이라도 지방의 느끼한 맛을 덜어줄 비빔 막국수가 없다면 몇 조각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음식들이 꼭 있다. 오롯이 따로 먹는다고 했을 때는 그만큼 끌리지 않지만, 최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짝꿍이 있어 이따금 찾고 싶어지는 것이다. 족발을 주문할 때 세트로 함께 오는 이 비빔 막국수가 사라진다면 슬플 것 같다. 더 이상 족발을 최상의 조건으로 즐기지 못하게 되니까 말이다.



한편, 족발은 돼지 족을 파, 마늘, 생강, 간장 등을 더한 육수에 담그고 푹 삶아내는 음식이다. 돼지 '족'이라고는 하지만 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포함한 다리 부위를 이용한다. 보통은 앞다리살과 뒷다리살을 섞어 내어주는 식인 것 같지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다리를 고르는 것이 좋다. 대개 앞다리살의 지방 비율이 높아 식감이 쫄깃하고 부드러우며, 뒷다리살은 살코기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담백하지만 비교적 퍽퍽하기 때문이다. 사실 운동량이 많은 부위의 고기는 근육이 발달해 대체로 지방이 적고 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돼지 앞다리살은 운동량이 더 많은데도 뒷다리보다 지방이 많고 부드럽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실은 앞다리살도 돼지고기 부위 전체에서 따지면 상급을 매기긴 어렵다. 지방이 적은 부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뭐 살살 녹는 최상급 부위가 못 되면 어떤가? 찌개와 장조림과 제육볶음 등 일상에 가까운 한식에서 앞다리는 빛을 발하고 있다. 소고기 부채살도 운동량이 많은 부위지만, 가성비 좋은 구이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부위든 활용하기 나름인 듯하다.


나는 어쩐지 족발을 생각하면 상하이 돼지고기 요리인 동파육이 함께 연상되는데, 갈색 빛이 돌고 탱글탱글하게 윤기가 나는 고기 요리라는 점에서 이런 발상이 시작된 것 같다. 하지만 동파육은 베어물면 살살 녹아내린다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살이 무르고 촉촉한 데다, 달고 짭짜름한 맛의 간장 양념으로 범벅되어 있다. 또한 통삼겹 부위를 쓰기 때문에 앞다리를 쓰는 족발과는 개념이 한참 다르다. 양념이 진하게 배어 있으니 쌀밥과 함께 먹는 반찬 격의 음식이라는 점도 차이가 있다. 확실히 쌀밥과 짝을 이루면 황홀한 맛을 자랑할 것 같아 밥을 좋아하는 내게 중국 현지의 유명 맛집에서 먹어 보고 싶은 음식 1위다.


족발과 가장 비슷한 외국 요리는 독일의 슈바인스학세다. 슈바인스학세는 돼지 다리 부위를 가지고 만드는 요리인데, 먼저 앞다리 혹은 뒷다리 고기를 삶아서 '아이스바인'을 만들고 또 이것을 오븐에 구워내어 완성한다. 썰지 않은 통다리의 형태로 제공되며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 고기'의 비주얼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또한 독일 현지에서 가장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다. 어느 만화에서든 푸짐하고 투박하지만 먹음직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군침을 돌게 한 주범을 직접 먹어볼 수 있다니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는지. 기대를 너무 크게 한 바람에 실망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긴 하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겉이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통째로 들고 거친 바이킹처럼 뜯어먹어 보는 로망을 이뤄보고 싶다.


슈바인스학세에는 독일식 김치라고 불리는 양배추 절임 자우어크라우트나 으깬 감자를 곁들여 먹는 것이 보통이고, 그중에서도 자우어크라우트는 필수인 것으로 보인다. 족발과 막국수의 관계처럼 슈바인스학세와 자우어크라우트는 반드시 함께인 것이다. 자우어크라우트가 시큼한 맛이라는 묘사를 고려하면 메인 요리의 기름짐을 훨씬 가볍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의 족발이든 독일의 족발이든 영혼의 단짝은 꼭 필요한 모양이다. 족발엔 막국수, 슈바인스학세엔 자우어크라우트. 나는 막국수라는 짝꿍 없이 족발을 온전히 즐길 수 없지만, 함께라면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수 있다. 이쯤 되면 막국수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푹푹 찌는 여름 더위를 사냥하는 개념으로 종종 막국수를 먹지만 이 또한 맛을 즐기기보단 기능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지 그 자체가 맛있어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 이 둘은 최강의 파트너다. 두 음식 모두 따로 있으면 나를 사로잡지 못했지만, 협공이라는 방법으로 함락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나는 비빔 막국수 덕에 족발을 재발견했지만 그 반대도 성립하니, 내 음식관을 넓혀준 조화로운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난공불락이어도 대책은 있는 법이다. 이제 짝을 이루어 나의 세계를 두드린 족발과 막국수를 맞이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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